EP.199
쿠바 혁명군은 매일 수십km를 걸어 다니는 방랑자 생활을 했다.
특정한 거점 없이 쫓겨 다니는 일개 게릴라다 보니 바티스타는 그들을 대단찮은 존재로 인식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티스타의 태도가 바뀌었다.
혁명군을 반드시 박멸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을 고쳤는지 대규모 추격대를 붙여 끈질기게 뒤를 쫓았다.
그 과정에서 혁명군은 적잖은 동지들을 잃어야 했다.
“카스트로 동지. 이대론 오래 못 버팁니다.”
“아니 버틸 수 있네.”
그럼에도 카스트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굳건함이 너무 놀라워서 체 게바라가 의아함을 표시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유지하시는 겁니까?”
카스트로는 품에서 누렇게 변색 된 편지를 꺼냈다.
“우리에겐 우리 대의를 믿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네.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우리의 가능성을 믿고 거금을 내놓은 동지들이 있는데 어찌 조금 고난을 겪는다고 무릎을 굽히겠나?”
카스트로의 말에 모두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랬다.
익명의 독지가들은 천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혁명군에 보내줬다.
혁명군은 지금까지 그 돈으로 밥을 먹고 의료봉사를 하고 동지들을 단련시킬 수 있었다.
그토록 귀한 도움을 받아놓고 약한 소리를 했다니.
“그러니 믿음을 가지게. 우리 대의가 흔들리지 않는 한 돌파구는 열릴 걸세. 아무렴 쿠바 인민을 착취하는 바티스타와 미국에게 정의가 있겠는가?”
카스트로와 동지들은 결의를 다진 채 강행군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이들을 잡기 위해 열의를 보였던 바티스타의 추격대도 나중에는 슬슬 일을 건성으로 하기 시작했다.
‘빨갱이라고 해봐야 결국 일개 게릴라들인데 저것들 잡으려고 밤낮없이 오지를 드나드는 게 말이 되나?’
몇 주 정도면 그들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을 오지에서 견딜 순 없었다.
애초에 바티스타의 병사들은 특권 계급이었다.
험악한 오지 생활을 견딜 만큼 정신 무장이 돼 있지 않았다.
그럴 동기도 없었다.
‘이런다고 급여가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뭐 하러 생고생을 한담.’
바티스타의 병사들은 적당히 뒤를 쫓다가 마을에 퍼져서 쉬기 시작했다.
추격이 이런 식이니 섬멸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혁명군은 의료봉사와 교육을 무기로 꾸준히 동지를 늘려가며 전력을 불렸다.
혁명군이 지나간 자리엔 동조자와 네트워크가 깔렸다.
바티스타는 표면상으로 보이는 게릴라들의 숫자만 보고 카스트로를 과소평가했다.
“워싱턴에서 경계하라니 경계는 하겠다만 저게 뭐 대단한 놈들이라고. 빨갱이라고 해봐야 지원도 없는 놈들 아닌가.”
바티스타에겐 당장 대도시를 흔드는 시위대가 더 큰 위협이었다.
이 같은 방심 속에 쿠바 혁명군의 네트워크는 착실하게 확장됐다.
그리하여 1956년 후반에 이르자 쿠바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를 노려볼 만한 잠재적인 전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혁명군은 준비가 끝나자 산타클라라에서 바티스타 군대의 기차를 공격해 300명이 넘는 병사를 무장 해제시켰다.
“아니 고작해야 30명도 안 되는 놈들에게 300명이 당했다고?”
혁명군은 산타클라라의 승리를 계기로 전국에서 들고 일어나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마을과 도시가 혁명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놈들 장난이 아니잖아.’
바티스타는 뒤늦게 혁명군이 정말 위협적인 적수란 사실을 깨달았다.
“워 워싱턴에서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쿠바가 빨갱이들에게 먹힙니다.”
바티스타는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일단 알겠으니 기다리시오. 정권 인수 작업만 끝나면 바로 도와줄 테니 버티기만 하시오.”
바티스타는 어떻게든 아바나를 사수하며 미국의 원조가 오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야과하이 전투에서 정부군이 참패하며 끝장났다.
장비와 규모에서 우세했던 정부군이 패한 이유는 다른 것보다도 시위 진압을 위해 과도하게 돌린 충정 훈련이 결정적이었다.
“짐 챙겨.”
바티스타는 더는 권좌를 지킬 욕심을 품지 않았다.
그는 귀금속이 든 가방을 챙겨 들고 재빨리 도미니카로 달아났다.
이 충격적인 결과에 미국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몇 주만 버티라니까 그것도 못 버텨?”
미국은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쿠바 주재 미국 대사 아서 가드너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도대체 상황 파악을 어떻게 한 거요? 쿠바에 공산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시하라고 했을 텐데 그런 보고는 한 장도 없었잖소!”
“죄 죄송합니다.”
다만 대사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는 별개로 쿠바에 대한 군사 행동에 나서진 않았다.
지금은 정권이 교체되는 미묘한 시기였다.
워싱턴은 정권이 교체된 후에 쿠바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고심에 빠졌다.
미국이 군사 옵션을 고려하고 있을 무렵 쿠바도 워싱턴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조만간 집권할 미 대통령은 초강경파로 유명한 매파의 수장 골드워터.
골드워터가 집권하면 대화의 기회도 주지 않고 미국이 공격해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워싱턴에 쿠바 혁명이 미국에 적대적인 사건이 아니란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란 사실부터 알리게.”
카스트로도 미국에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사회주의가 아니라 한국식 민주주의를 공부했었다.
카스트로는 미국 측에 체 게바라를 특사로 파견했다.
“새파란 애송이를 특사라고 보내다니 저놈들이 돌았나?”
미국은 쿠바의 특사를 보고 일단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체 게바라를 사흘 정도 호텔에 박아두고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 뒤에 국무부로 불렀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뜻밖에 젊은 애송이는 전혀 기가 꺾이지 않은 채로 미국 관료들을 대했다.
미국인들은 먼저 쿠바 공화국이 미국에 특사를 보낸 이유부터 물었다.
“그야 양국 사이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 우호가 가능하단 말이오?”
미국인들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못 할 건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오해를 정정해드리자면 저희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자입니다.”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체 게바라는 새로운 쿠바 정부의 조직도부터 보여줬다.
“우리는 소련이 아니라 한국식 정부 체계를 씁니다.”
그 말에 미국인들은 당황했다.
그냥 빨갱이가 아니라 한국식 민주주의자라고?
그럼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건 공산주의가 아니라 유사 독재를 추구하는 독재자 친구들의 패션 이념이니까.
미국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눈 후 비로소 태도를 바꿨다.
공산 빨갱이가 아니라면 워싱턴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자격이 있다는 게 미국 관료들의 인식이었다.
그렇다면 물을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쿠바 내 미국 자산에 관한 공화국의 입장은?
“한국식 유상 몰수 유상 분배를 고려합니다. 이 부분은 미국 정부의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다소 불편하시겠지만 토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쿠바에서 혁명은 언제고 재발할 겁니다. 두 번째 혁명이 발생하면 진짜 빨갱이들이 집권할 겁니다.”
미국인들은 쿠바 측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신생국 특유의 우격다짐 식 몰수도 없고 이만하면 꽤 이성적이고 온건했다.
문제는 이 말을 믿을 수 있느냐였다.
미국인들은 쿠바의 대외 정책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항을 확인하며 상대의 태도를 떠봤다.
체 게바라는 막힘없이 술술 답변했다.
“쿠바의 입장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쿠바의 특사가 돌아가자 미국 국무부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워싱턴에 올렸다.
“진짜 빨갱이가 아니란 사실만 확인되면 그냥 내버려 둬도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연히 주권 국가를 침공해 전복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유엔에서 우리 체면만 구겨집니다.”
골드워터는 미국 국무부의 보고에 냉소를 보냈다.
국무부의 시선은 너무 나이브했다.
저놈들은 친미 정권을 전복한 혁명 세력이었다.
혁명가들이 바라는 궁극의 목표가 뭐겠는가.
집중된 부의 분배다.
자기들 입으로도 유상 몰수 유상 분배를 주장하지 않았나.
쿠바 혁명을 용인하고 그들과 타협하면 쿠바에 있는 광대한 이권과 자산이 침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같은 선례를 보여주면 중남미에 있는 자산과 이권은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그러니 쿠바와의 타협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됐다.
골드워터가 취할 옵션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바티스타와 접선을 준비하시오.”
골드워터는 바티스타의 지지자들에 용병을 좀 보태 쿠바를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골드워터의 구상은 이랬다.
단번에 쿠바의 핵심부를 폭격으로 쓸어버린 다음 바티스타의 군대를 상륙시켜 쿠바를 탈환한다.
명분은 쿠바의 정당한 집권자인 바티스타의 복귀 지원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 계획을 실행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적어도 6개월 정도는 바티스타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변수가 생길 여지가 없진 않았지만 골드워터는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
빨갱이들이 개입하고 싶다 해도 카리브해는 미국의 영역.
놈들이 감히 손을 뻗는다면 세계 최강 미 해군의 위력을 보여줄 뿐이었다.
골드워터의 이 같은 구상에 측근들은 우려를 표시했다.
“당선인 각하. 쿠바를 공격하는 것도 좋지만 명분이 너무 모호합니다. 쿠바도 명색이 주권 국가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는 쿠바는 바티스타 정권이잖소.”
골드워터는 이 문제에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각하. 개입은 최소한으로 하셔야 합니다.”
“개입을 최소한으로 하자니 무슨 말이오?”
“명목상 우리는 개입하지 않는 모양새로 보여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야 국제 사회에 둘러댈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가 실패하면? 그게 더 망신 아니오?”
골드워터는 공화당 사람들의 설득에도 직접 개입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정말 골드워터 저 양반은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이군.”
세간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골드워터는 뒤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초강경파가 초강대국 미국의 지도자란 사실은 정말로 이 세계의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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