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4
모스크바는 아랍 연방의 접근에 반색했다.
“쿠바 문제로 연방의 위신이 실추된 지금 중동에서 세력을 확대해 위상을 만회하는 게 좋겠습니다.”
“확실히 이번 기회에 중동에 세력을 부식해놓으면 미국 놈들도 간담이 서늘해지겠지.”
소련 정치국의 조언에 흐루쇼프도 아랍에 손을 내밀기로 했다.
쿠바에서의 후퇴로 자존심이 상한 흐루쇼프도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모스크바가 우릴 지원한답니다.”
아랍 국가들은 소련의 지원 이야기에 만족했다.
모스크바는 아랍 연방 대표단과 대량의 전차 장갑차 자주포 헬기 전투기 등을 넘겨주는 계약에 서명했다.
“빨갱이들이 아랍하고 손을 잡아?”
이스라엘로선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출현이었다.
이스라엘은 소련과 아랍의 밀착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워싱턴으로 달려갔다.
“저거 보십시오. 저 아랍 빨갱이들이 결국 본색을 드러냈단 말입니다.”
“아랍 놈들이 빨갱이들 손을 잡았다고?”
미국은 이 정보를 듣고 반신반의했다.
그러다가 수에즈 운하를 떠올리고 경악했다.
“그럼 빨갱이들이 수에즈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단 소리 아닌가.”
절반은 이스라엘 손에 있지만 반절이라도 빨갱이들이 손을 뻗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 우릴 도와주셔야 합니다.”
미국은 스티븐슨 정권까지 이스라엘에 대해 최소한의 지원을 제공하는 포지션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진영 논리가 발동한 시점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옵션은 많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원조하시오.”
“이스라엘에 원조? 우리하고 척질 생각이야?”
중동의 친미 아랍 국가들이 일제히 불편하다는 감정을 표시했다.
“저놈들 친미 국가 아니었나?”
“친미지만 반이스라엘인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미국 정부 내에선 이스라엘에 힘을 실어줘선 안 된다는 견해와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밀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부딪쳤다.
골드워터는 양쪽을 저울질을 한 끝에 유대계가 뒤를 봐주는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랍의 반발은 무시하도록 해.”
어차피 친미 아랍 국가들은 미국의 지지가 없으면 빨갱이나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왕정을 유지하지도 못할 놈들이다.
미국이 강하게 나간다면 뭘 어떡할 텐가.
“반발이 만만찮을 겁니다.”
“당분간은 감수해야지 어쩌겠나?”
수에즈 운하가 빨갱이들 손에 들어가는 꼴을 보느니 반발을 좀 사는 게 나았다.
미국이 대놓고 이스라엘을 밀어주는 포지션을 택하면서 중동에 명확한 대립 구도가 섰다.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과 소련이 지원하는 아랍 연방이 그것이었다.
무서운 사실은 대리전의 당사자인 양측 모두 언제라도 전쟁을 결심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스라엘 놈들. 이번 빚은 반드시 갚아준다.”
“전쟁 각 보이면 한 판 더 붙는 거지. 우리가 겁낼 줄 아나.”
핵전쟁의 가능성을 머금은 중동 위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아랍이 소련에 붙으면서 그림이 묘하게 변했다.
미국-이스라엘 소련-아랍 연방이라는 대리전 구도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이게 무서운 이유는 이스라엘이 가진 핵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스라엘이 아랍에 핵을 사용하면 핵이 없는 아랍의 보복은 누가 대신하겠는가?
소련이다.
그럼 미국은 가만히 있나?
바로 에스컬레이터 직행이었다.
‘구도가 골치 아프게 됐군.’
물론 이 뇌관이 바로 폭발할 일은 없었다.
이번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아랍이 전열을 정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설령 아랍이 전열을 정비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차지한 천혜의 방어선을 돌파하긴 쉽지 않았다.
‘미국도 그걸 방관하진 않을 거고.’
웬만해선 핵이 주목받는 상황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일이 꼬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가장 큰 변수는 미 대통령 골드워터였다.
노 빠꾸로 쿠바를 쓸어버린 놈이 있는데 상황이 상식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가능하면 이번 문제는 불이 붙기 전에 해결하는 게 최선으로 보였다.
‘소련이 미국과 공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야 골드워터도 행동을 신중하게 가져갈 텐데.’
생각이 정리되질 않아 머리를 식힐 겸 정길이와 카드 게임을 했다.
그런데 수 싸움에서 정길이에게 계속 졌다.
“임자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각하께서 속임수를 잘 쓰질 못하셔서 그런 겁니다.”
내가 속임수를 잘 못 써?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나는 정길이에게 꾸깃꾸깃 접은 지폐를 넘겨주려다 문득 스친 생각에 무릎을 쳤다.
“속임수가 있었군. 바로 그거야.”
“예?”
나는 즉시 중정부장 강수철에게 총리공관으로 들어올 것을 지시했다.
“부르셨습니까.”
나는 조금 전까지 떠올린 생각을 중정부장에게 이야기했다.
“소련이 개발한 미사일 제원을 뻥튀기한 가짜 정보를 미국에 흘리라 그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나는 워싱턴이 소련이 ICBM을 가졌다고 믿게 할 생각이었다.
얼마 후면 스푸트니크 쇼크도 있을 테니 미국을 겁주기엔 지금이 딱 좋았다.
“제원을 제대로 부풀리려면 한국 항공 우주 기술 연구소의 자문이 필요합니다.”
“그건 중정에서 알아서 하게.”
나는 중정에 가짜 정보를 흘리게 하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소련이 인공위성을 준비 중이란 정보도 흘리게 했다.
미국은 소련이 인공위성을 준비 중이란 말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도 못 하는 걸 빨갱이들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놈들은 가난한 농업 사회에서 벗어난 지도 얼마 안 된 놈들입니다.”
몇 달 후면 생각이 달라질걸?
그때부턴 오히려 과대평가하지 못해 안달일 것이다.
나는 이걸로 문제를 대충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수에즈 운하 문제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아.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를 점령해버리면서 세계 3대 수로 중 하나인 수에즈 운하가 사용불능 상태가 됐다.
덕분에 우리의 대유럽 수출에도 애로사항이 꽃피게 됐다.
이탈리아 전쟁 종전 이후 나름 수에즈를 애용해온 우리 선사들은 당장 희망봉을 돌아가는 긴 항로로 우회해야 했다.
이 문제가 단시간에 풀릴 거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스라엘이 자력으로 시나이반도를 내놓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수에즈는 통행로가 아니라 자국을 지키는 방패였다.
그걸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나는 이 문제를 중재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1~2년에 해결될 문제 같진 않으니 상선 대형화를 지원하도록 하시오. 미국에서 쓴다는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규격으로 만들면 좋겠군.”
초대형 선박을 띄우면 늘어나는 운송비를 그런대로 절감할 수 있다.
“정책 금융도 좀 제공하고.”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이참에 우리 선사들이 가진 선박을 대형화시켜 구미 선사들과 운임 경쟁을 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받들겠습니다.”
중동 위기에 대한 대처는 이 정도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무언가 조처를 더 취하기도 애매했다.
나는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면서 손을 쓰기로 했다.
딱 2달이 지난 1957년 10월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미국을 충격에 빠트린 스푸트니크 쇼크의 시작이었다.
“아니? 우리도 못 쏘는 위성을 소련이 쏘았다고?”
이 사실을 알자마자 미국은 경악에 빠졌다.
그리곤 우리에게 헐레벌떡 달려와 지금까지 받은 정보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우리가 확인한 바론 그렇습니다.”
미국 동해안 전체가 ICBM의 사정거리에 들어 있다는 얘기를 확인받자마자 워싱턴의 태도가 바뀌었다.
당장 빨갱이와 타협 따윈 없다는 듯 소련과 마찰을 빚던 골드워터의 목소리부터 확 줄어들었다.
‘역시 핵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군.’
자기도 핵에 맞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면 강경론은 수그러들게 마련이었다.
실제 미국 여론의 추이가 그랬다.
골드워터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미국 내 여론은 ‘소련’과 끝까지 가자는 행정부의 강경론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빨갱이 핵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질 수도 있다며? 그럼 그놈들하고 끝까지 가는 게 맞아?”
미국 정부 안에서도 모스크바와의 대립을 타협 불가능한 수준까지 끌고 가선 안 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이런 분위기 좋아.’
우리는 미국인들이 두려움에 덜덜 떠는 모습을 지켜보며 충격을 하나 더해주기로 했다.
“시험용 ICBM을 발사하시오.”
실제 완성된 미사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도 이만한 기술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제스처였다.
한국도 이런 게 있는데 소련은 어떻겠느냐.
나는 미국에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1957년 11월 6일 제주도에서 발사한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가로질러 북태평양에 떨어졌다.
우리는 이 시험발사를 주변국에 드러내놓고 과시했다.
미국은 우리의 미사일 발사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한국도 저 정도 미사일을 가지고 있는데 우린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당장 미 의회가 이 문제로 난리를 떨었다.
나는 미국이 자신들의 미사일 전력에 확신을 품기 전까지는 소련과 대놓고 충돌 각을 만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골드워터도 당분간은 조용할 겁니다. 아무리 자기가 강성이라도 미국 국민이 대놓고 불안에 떠는데 전쟁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뿌린 거짓 정보만 믿고 있을 순 없었다.
미국인들에겐 정보를 검증할 최신 초고고도 정찰기 U-2와 CIA가 있었다.
그래서 소련 측에 1957년에 양산에 들어간 U-2의 존재를 넌지시 알려뒀다.
공교롭게도 U-2를 잡을 S-75 대공 미사일 역시 1957년에 개발이 완료돼 있었다.
소련이 이 S-75를 핵심 지역에 도배를 시작하면 U-2의 정찰을 충분히 방해할 수 있었다.
정찰을 방해받으면 그만큼 미국의 검증도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딱 몇 년만 벌길 희망했다.
소련이 상호확증 파괴를 완성할 때까지 말이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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