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5
한국이 3세계 지원에 원화를 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 국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배째라. 달러가 없는데 무슨 수로 빚을 갚으라고?”
한국은 이 국가들에 재빠르게 다가가 이런 말을 건넸다.
“달러가 없으면 1세계와 거래를 못하잖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3세계 역내 무역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침 이들의 손엔 한국이 준 원화가 있었다.
한국은 이런 식으로 3세계 국가들의 역내 의존도를 극도로 끌어 올렸다.
“석유 곡물 공산품 원자재 우리끼리도 다 자급할 수 있는데 뭐 하러 비싼 환전 수수료 내는 달러를 쓰십니까? 역내에서는 원화만 쓰시지요. 수수료도 최대한 안 들게 배려해드리겠습니다.”
평양은 이참에 달러의 흔들기로부터 안전한 원 블록을 만들자고 각국을 꼬드겼다.
“그거 그럴듯한 얘긴데?”
각국은 원 블록에 솔깃함을 느꼈다.
“원으로만 거래하면 유사시에 외환 위기가 터져도 한국이 손 써주기 편하다 이 말입니다.”
한국은 이런 식으로 각국 정부를 구슬리면서 시민 사회를 상대로 한 여론전도 펼쳤다.
“이번에 벌어진 인도-태평양 지역의 경제 위기는 3세계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종속시키기 위한 미제의 음모다. 조금만 지켜보면 알 거다.”
한국이 소유한 무가지를 중심으로 이런 정보들이 무섭게 퍼져나갔다.
대중들은 이런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반덤핑 관세도 마음대로 때려대던 미제 놈들 아닌가. 그놈들이 우리가 잘살게 가만히 둘 리가 없지.”
지식인들도 이런 이야기에 동조했다.
“안 그래도 IMF 세계은행에서 달러 차관을 빌려준다고 하고 있지 않나. 하여간 미제 놈들 교활한 건 알아줘야 해.”
실제 3세계 국가들의 위기를 촉발한 게 미국이니만큼 이 음모론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미국은 한국이 펼친 여론전의 진의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3세계 국가들이 달러 차관을 거부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3세계 국가들에 달러 차관을 제공해주며 목줄을 죌 생각이던 워싱턴은 차관 거부 소식에 당황했다.
“국민 여론이 달러 차관을 거부한답니다.”
“도대체 대중들이 차관을 왜 거부한단 거요? 그 사람들도 모라토리엄을 빨리 끝내는 게 좋다는 건 알 거 아니오?”
“각하 3세계 국가의 여론은 우리가 자신들을 종속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예. 한국이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한국이 3세계 동맹에 외환 위기를 해결해줄 수 없는 원화를 내놓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국이 달러로 교란할 여지까지 없앨 줄이야.
한국의 교활함은 워싱턴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린든 존슨은 상대가 보인 영악한 수에 헛웃음이 나왔다.
대통령은 한국을 견제하겠다는 당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3세계 친구들이 달러 차관을 받지 않는다면 조약 갱신을 방해하는 작업은 시도도 못 하겠군.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각하.”
각료들도 대통령의 판단에 동의했다.
오히려 이번 공격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의 결속력만 키워주었다.
이런 구도에서 워싱턴이 구상한 동맹의 해체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 공격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시오.”
대통령은 각료들에게 수건을 던지고 링 밖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미국의 철수는 곧바로 금리 변화를 통해 감지됐다.
“미국이 금리를 인하했다?”
“기준 금리가 11.75%로 내려갔습니다. 연준의 발표로 미루어보면 앞으로도 금리를 꾸준히 내릴 걸로 보입니다.”
“경제 연구원의 전망은 어떤가?”
“목표 금리는 7% 안팎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달러를 흡수해 개도국들을 흔드는 계획은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금리가 내려간다면 당분간 워싱턴이 조용히 있겠단 뜻이다.
이성준은 워싱턴의 공격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럼 우리가 움직일 차례군.”
이성준의 한마디에 각료들의 시선이 진지해졌다.
늙은 총리가 손짓을 보내자 비서들이 서류를 가져왔다.
각료들은 자신들의 앞에 배부된 문서를 조심스레 읽었다.
“이 이건.”
각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다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정말 미국을 상대로 국채를 털어내실 생각이십니까?”
“이 이성준이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던가.”
미국 국채를 던진다는 건 워싱턴의 뺨을 후려치겠단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승기를 거머쥐고 좋게 마무리하면 될 상황에서 미국에 먼저 싸움을 건다?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도 못 할 발상이었다.
“각하. 아무리 그래도 국채를 건드리는 건 미국 측과의 관계 악화를 고려해야 합니다. 공화당 쪽도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미국이 이렇게 나오기 전이라면 나도 그랬을 걸세.”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미국이 동맹을 와해하겠단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상 한국도 불쾌감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미국과 무슨 경쟁이란 말인가.
총리가 자신의 의도를 솔직하게 밝히자 각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쉽게 동의하기 힘들었다.
“각하. 아무리 그래도 던질 액수가 너무 큽니다.”
“액수가 작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지만.
관료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성준이 던지라고 말한 액수는 한두 푼이 아니었다.
1 2억 달러도 아니고 자그마치 300억 달러였다.
각료들은 그 액수를 실감하자 마른침이 넘어가는 걸 느꼈다.
“명심하게. 대한의 의사 표시는 그리 값싸지 않아.”
총리는 노쇠했지만 그 안광은 여전히 호랑이의 그것처럼 날카로웠다.
“받들겠습니다.”
이성준의 지시는 곧바로 각의를 통과했다.
며칠 후 한국은행과 국부 펀드들이 대량의 미국 국채를 던지기 시작했다.
“전부 팔아.”
처음엔 이것을 기쁜 마음으로 매입하던 각국의 기관과 투자자들은 점점 늘어나는 국채 물량을 보고 경악했다.
“도대체 저놈들 얼마를 던지는 거야?”
국채 매도 물량이 쌓이고 쌓여 100억 달러를 초과한 순간 다들 손을 덜덜 떨었다.
이러다 한국이 국채를 전부 던지는 게 아닐까?
백악관도 경악하긴 마찬가지였다.
“한국 놈들이 국채를 얼마를 던졌다고?”
“지금까지 100억 달러입니다. 지금도 국채를 계속 던지고 있으니 200억 달러를 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월가의 대형 은행들도 국채가 이렇게 쏟아져 나오자 매입을 주저했다.
공화당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민주당 놈들이 불 장난하다가 한국 심기를 건드린 것 같은데 우리가 달래줘야겠소.”
공화당은 급한 대로 대선후보를 지낸 거물 리처드 닉슨 의원을 평양으로 보냈다.
닉슨은 이성준을 마주한 자리에서 한국의 대규모 국채 판매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에 대한 이성준의 답은 간단했다.
“백악관이 우리 뺨을 후려치면 평양도 불쾌하다는 의사 표시는 보내야 할 거 아니오.”
그 의사 표시의 값이 수백억 달러라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각하. 워싱턴은 각하의 불쾌감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백악관에서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의원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속는 셈 치고 믿어보겠습니다.”
이성준은 그 자리에서 국채 매각을 멈출 것을 지시했다.
그때까지 국채 시장에 던져진 국채는 270억 달러였다.
“이성준이가 정말 백악관이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270억 달러를 던졌단 말입니까?”
“이성준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이 주도하는 동맹을 깨트린 것도 아니고 공격 작업을 하다 실패하고 물러났는데도 불쾌하다고 수백억 달러를 던진다.
그럼 한국에 제대로 피해를 주면 어떤 보복을 하겠단 말인가?
이와 관련해 민주당 싱크 탱크들이 입수한 한국의 보복 옵션들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농담이 아니라 한국이 이런 옵션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단 겁니까?”
“이번에 보셨잖습니까.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고 그 많은 국채를 시장에 던진 나라입니다.”
속뜻이야 따로 있겠지만 이성준이 본인이 대놓고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 식의 표현이 얼마나 위험한 의미로 해석될지 모르고 그랬을까?
이성준이처럼 정계에서 오래 굴러먹은 노괴가 그 정도도 모를 리 만무했다.
“사용하는 수사만 봐도 알겠군. 이성준이가 나이가 들어 노망이 든 게 틀림없어.”
이성준이가 노망이 들었는지 몰라도 화가 나면 미치광이처럼 굴 수 있는 인간이란 이야기가 미국 정계에 돌았다.
이를 두고 이성준의 치매와 관련된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각하께 노망이라니. 이런 무례한 이야기가 어딨습니까.”
이성준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웃었다.
아니 흡족해했다.
“딱 내가 원하던 반응이야.”
“각하.”
이성준이 의도하는 바는 간단했다.
MAD.
즉 미치광이 전략이었다.
“남들이 날 합리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반미치광이로 여긴다면 그만큼 행동을 조심하겠지.”
한국도 미국도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할 경제적 ‘핵’ 옵션을 들고 있다.
양자 모두 핵을 쥔 상황에서 한쪽의 수장이 미치광이면 어떨까.
물론 워싱턴에서 정말 이성준이 미쳤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는 생각이 든다면 행동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준이 원하는 바도 딱 그 정도였다.
“미국의 망설임이 대가라면 노망난 늙은이란 꼬리표를 달 만하지.”
인생의 황혼에 이른 노인은 명예 따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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