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0
독일과 소련이 숙명적인 대결을 앞둔 1941년 4월의 봄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독일과 소련은 상대를 향해 불가침 조약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삿대질을 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폭풍전야의 분위기에 세계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대한에선 전쟁의 공포는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전쟁에 뛰어들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군국주의 새싹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때려잡고 밟아도 이 나라의 본성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독일이랑 동맹을 안 맺을 거면 소련 편을 들어서 독일 똘마니 프랑스 놈들의 식민지를 빼앗자!”
“어차피 독소전 터지면 독일 놈들은 프랑스를 도와주지도 못하는데 뭐가 그렇게 무섭단 말이냐.”
이런 독버섯들이 커지기 전에 나는 손을 쓰기로 했다.
임시적인 조치로 안 되면 법을 만드는 수밖에.
“치안 유지법에 반대하는 분 계십니까?”
“없습니다(메이요).”
“없습니다(메이요).”
“없습니다. 통과(메이요 통과)!”
치안 유지법 통과!
시 주석의 3선 개헌이 생각났다면 오해다.
“치 치안 유지법? 그게 뭔데?”
“아아 그건 사회의 불온 분자들을 소탕하는 몽둥이지. 너희 같은 군국주의 꿈나무들을 콩밥 먹여주는 법이란다. 그럼 이제부터 법 집행하겠습니다.”
대한제국 의회는 내 거수기.
총리 관저에서 법안을 입안해 의회로 노룩패스 하면 1시간도 안 돼 입법이 완료돼서 내 책상에 돌아온다.
병신 같은 새끼들.
감히 이런 독재 정권 밑에서 내가 하지 말란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생각 같아선 혁명화 수용소를 부활시켜서 삼시세끼 이성준 시리즈만 읽게 만들고 싶었다.
‘참아. 내 안의 독재 파워.’
그 와중에 부패 사건이 하나 터졌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구국 군사 위원회에 속한 장군님이 저지른 병기창에서 저지른 횡령 사건이었다.
수명주기가 다한 전차 엔진을 빼돌려서 떡 사먹었다나?
이 스캔들은 보안사의 사전 검열로 신문에 한 줄도 실리지 않았지만 나를 빡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잖아도 군국주의자들 누르느라 정치력이 줄줄 새고 있는데 내 추종자란 놈들이 사고를 치네.’
당장 육군 대신인 김성주가 내 앞에 달려와 석고대죄했다.
“각하 제가 군부를 잘못 관리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신임 보안 사령관 이정윤도 고개를 조아렸다.
“각하. 군을 감찰하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하.
“됐어. 임자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 새끼 이름이 뭐라고?”
“한창석 소장입니다. 16후비 사단 120연대장을 맡았던 친구입니다.”
“그 새끼 잘라버려. 당장 예편시켜버려!”
내 한 마디에 부하들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혁명의 동지인데 보직 해임도 아니고 군복을 벗기란 말에 경악한 듯했다.
하지만 이럴 땐 충격적인 조치가 따라야 했다.
혁명 동지고 나발이고 내 권력에 짐이 되면 잘라야지.
조국 근대화와 국가 존립이란 막중한 사명을 짊어진 이성준 각하에게 누가 되는 놈을 어떻게 가만둘 수 있단 말인가.
김성주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 각하. 너무 과한 조치는 군을 동요시킬 수도 있습니다.”
암. 그렇겠지.
목숨 걸고 믿고 따른 장군님이 공금으로 떡 좀 사 먹었다고 모가지를 날리는데 얼떨떨하겠지.
그러니까 이건 경고다.
내 밑에서 공금으로 떡 사 먹는 새끼들은 혁명 동지고 뭐고 없다 이 말이다.
이 이성준 각하도 사치하지 않고 소박하게 시가만 피우면서 사시는데 지들이 뭐라고 호화스럽게 외제차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사서 안에 금괴를 쌓아놓느냔 말이다.
스탈린 밑에 살았으면 그런 생각 자체를 못 했을 거다.
그러니 이 이성준이가 권력을 휘둘러서 쓴맛을 보여줄 수밖에.
“임자.”
“예 총리님.”
“우리가 왜 혁명했나?”
“제국을 일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유신인가? 혁명이냐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내 분명히 말해두지. 대한제국에서 공금으로 떡 사 먹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어떤 놈이라도.”
섬뜩한 경고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가서 처리해.”
보안 사령관과 육군 대신이 허리를 90도로 꺾은 다음 집무실에서 물러갔다.
그간 혁명 동지에게 무르게 대해왔지만 이젠 아니다.
이 나라의 유일한 통치자로서 최측근들에게도 절대적인 권력자의 면모를 보일 시간이었다.
“실장.”
“예 총리님.”
정길이가 결재서류를 든 채 답했다.
“임자가 보기엔 내가 너무한 것 같나?”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께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당한 결정을 내리셨을 뿐입니다.”
“그래.”
나도 사람이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내 결정을 이해받고 싶고 동의를 구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정길이는 괜찮은 말벗이었다.
“앞으로 많은 동지가 옷을 벗게 될 거야.”
한창석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군을 감찰해보면 혁명 동지 중 타락한 자들이 많이 걸릴 것이다.
그런 자들을 다 쳐내면 군에서도 동요가 없진 않을 터.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왜 스탈린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때려죽이고도 뛰어난 통치자란 평가를 받았겠는가.
‘부패를 없애서지.’
적어도 스탈린 시대 소련은 ‘부패’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그랬기에 소련은 강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우리 대한도 일류열강이 되고자 한다면 부패를 없애야 했다.
부패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했다.
지연 혈연 학연에 관계없이 부패 사범을 엄하게 다스리면 된다.
예외가 없다면 고위층은 부패를 저지르지 않는다.
부패 범죄를 저질렀다가 걸렸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부패가 없다면 국가의 부패도는 전반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정길이의 말을 들으니 시가가 당겼지만 손을 저었다.
너무 골초가 되어도 이 이성준 각하가 대한제국을 오래 지도하지 못한다.
기왕 쿠데타로 나라를 엎은 거 국가 꼴을 만들어놓고 가야 할 거 아닌가.
그조차 못하면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총통만도 못한 거지.
내가 이 이성준이가 인간 백정 프랑코보다 못한 인간이 될 순 없잖아.
“그보다 임자.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
“예. 말씀하십시오 각하.”
“기자 회견을 준비해.”
“예?”
“임자가 들은 대로야. 10대 일간지에 연락 넣고 공관으로 오게 해.”
“받들겠습니다.”
나는 떨떠름해하는 정길이를 내보냈다.
사실 부패 사건이 터진 직후 생각한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그렇게 해서 나온 게 기자 회견이었다.
나는 이번 사건을 물밑에 숨길 생각이 없었다.
‘위기는 기회다.’
부패한 자는 측근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나는 국민에게 그런 면도날 같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런 이미지가 정치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괴벨스가 잘 보여줬다.
단지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이번 부패 범죄 조사가 내 예상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군 내 범죄는 대개 이익 카르텔을 끼고 대규모로 벌어지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뭐 그 지경까지 간다면 나도 입을 싹 씻고 적당한 선에서 덮을 수밖에 없었다.
원칙 하나 세우려고 정권의 기반을 무너트릴 순 없으니 말이다.
따르릉.
막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전화가 왔다.
비서실에서 확인하고 직접 연결한 듯했다.
원래 같으면 비서실장인 정길이가 받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을 많이 썼으면 몰라도 이 공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이성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총리님. 태정의 조태수입니다.”
아 태정?
우리 쿠데타군의 자금줄?
그런데 태정이 왜 나한테 연락했지?
우리 사이의 거래는 다 끝났을 텐데.
내가 부패 범죄를 건드린 순간 태정이 연락을 해왔다는 게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회장님 목소리를 들으니 좋군요. 여전히 정정해 보이십니다.”
“총리님이야말로 목소리에 더 힘이 느껴지십니다.”
뭐 잡담은 이쯤 할까.
“회장님.”
“예 총리님.”
“내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딱 3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전화를 거신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내 시간은 아주 비쌉니다.”
조태수가 전화 너머에서 침 삼키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전화를 드린 건 한창석 장군 문제 때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 장군이 체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지 여쭈러 연락을 드렸습니다.”
여쭌다?
문의가 아니라 압력이겠지.
풀어달라는 암묵적인 표현이겠지.
나는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 늙은이는 쿠데타 자금을 댔다는 인연 하나로 지금까지 우리 정권과 잘 지내왔다.
그래서 내가 이 이성준이가 얼마나 강력한 권력자로 변했는지 아직 실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럼 알려주는 수밖에.
이빨과 발톱을 꺼내서라도.
“회장님.”
“예 총리님.”
“지금 한 번 선을 넘으셨습니다.”
“예?”
“어딜 민간인이 주제넘게 군 인사에 개입해!”
내가 호통을 치자 조태수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딱 한 번만 알아듣게 말씀드리지요. 한창석이가 회장님의 군 인맥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그 새끼는 내가 잘랐습니다. 결정을 번복할 일은 없고요. 그러니 자중하십시오. 혁명을 함께한 동지로서 드리는 마지막 경고입니다.”
“····”
조태수가 전화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조태수가 날 편하게 대할 일은 없겠지.
위계를 한 번 확인하면 두 번 다시 이전 같은 인간관계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꾸짖을 만한 행동에 호통을 쳤음에도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참으려 했던 시가를 꺼내 물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최고 권력자로서 고독의 길은 숙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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