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1
군 내 비리 사건 수사는 이내 병기창 이권 카르텔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졌다.
“벼 병기창의 장군들을 전부 수사하라고요?”
“각하의 특명이야.”
“받들겠습니다.”
병참감 초진영 대장 육군성 군수과장 배연수 중장 남포 병기창 오진기 소장 등 장군들이 줄줄이 보안사로 연행됐다.
“이 장군. 어떻게 우리 사이에 이럴 수 있나. 각하께 잘 좀 말씀드려주게.”
“말씀 같은 소리 하네. 야! 이 새끼 옷 벗기고 조사 시작해.”
그리고 그대로 군복을 벗고 예편당했다.
떨어진 별의 개수만 20개에 달했다.
구국 군사 위원회의 장군들은 육군성 회의실에 모여 이번 사건 수사를 놓고 수군거렸다.
“각하께서 이번 일로 몹시 불편해하셨답니다. 그 김성주한테 호통도 치셨다는데요.”
“각하께서요? 허 그것참.”
“애초에 혁명하겠다는 친구들이 그렇게 공금을 빼돌려서 사리사욕을 채웠으니 각하께서 진노하실 수밖에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각하께서 우릴 색안경을 끼고 보셔도 뭐라 할 말이 없게 된 게 안타깝소.”
장군들은 혁명 동지고 뭐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이성준의 조치에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대의명분을 생각해 이번 숙청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거나 나라를 유신하겠다고 일어선 우리 아닌가.’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면 결국 권력욕으로 일어선 쿠데타밖에 안 된다는 소리다.
장군들은 자기들의 혁명이 부패하고 비루한 흔한 군사 쿠데타로 남길 원치 않았다.
군부의 숙청은 오래지 않아 장성에서 고급 장교들로 옮겨갔다.
“너도 오 장군 밑에서 공금 횡령했지? 따라와!”
“자 잠깐만요. 삼촌한테 전화 좀.”
“너 이 새끼. 지금 백 같은 게 통할 거 같아? 이건 이 나라에서 제일 높으신 총리 각하 명령이야. 삼촌이랑 같이 콩밥 먹고 싶어?”
“이거 놔라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총리대신 각하의 오촌당숙이다!”
“각하께선 친인척이면 더더욱 본을 보이라고 하셨다. 너 같은 미꾸라지가 감히 각하의 이름을 더럽히려 들어? 이 새끼는 안 되겠다. 포승줄 채워!”
하루에도 수십 명이 보안사로 잡혀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바른 대로 말해! 그 돈 어딨어!”
끌려온 장교들은 매일 잠도 재우지 않는 강도 높은 조사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난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 일단 알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네?”
“이름.”
보안사의 조사는 이가 갈릴 만큼 철저하고 잔혹했다.
“이 이 장군을 불러! 이 장군 똘마니인 너희들하고 할 얘기 없어.”
“이 양반이 호랑이 간을 삶아드셨나.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보안사야.”
“이놈들이 그래도! 나는 대한제국 육군 대장이다.”
“이거 영 말발이 안 먹히는 양반이로구만. 야!”
“이 이놈들이.”
퍽퍽. 윽.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다.
‘한국식 민주주의’에서는 사실 인권을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보안사는 중간 수사 결과를 결산해 총리에게 보고했다.
“많이도 해 처먹었군.”
“어떻게 할까요?”
“이미 기자회견도 했는데 뭘 숨기겠나. 대국민 연설 준비해.”
“받들겠습니다.”
이 조사 결과는 곧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 국민에게 공개됐다.
*
“곧 방송 시작합니다. 사인을 드리면 그때부터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래요.”
“5 4 3 2 1. 큐.”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원고를 들었다.
썩 좋지 않은 일로 국민 앞에 서는 자리였지만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성준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근래 군에서 대규모 비리 사건이 발견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책임을 지고 있었던 구국 군사 위원회에서도 이에 연루된 자들이 나왔습니다. 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자로서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나는 사람들이 지켜보기라도 하듯 말을 끊고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방송 관계자들이 흠칫하는 모습을 보며 숫자를 헤아렸다.
5초.
딱 적당하구먼.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국가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총리대신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책임이 있는 자는 엄히 문책하고 예편시킬 것이며 향후 공직 임용 또한 철저히 막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놈들은 본보기다.
공금 횡령을 하면 그냥 인생이 X 망한다는 걸 보여줄 산증인이란 말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 이성준이의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부패 범죄가 발생한다면 범죄자들에 대해선 결단코 관용을 베풀지 않겠습니다. 철저히 처벌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국민 여러분의 세금이 헛되이 새는 일을 막을 것입니다.”
물론 이건 다짐이다.
스탈린조차 부패를 다 막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온종일 서류만 들여다보며 사는 스탈린이나 홍무제 같은 행정의 달인이 아니다.
“앞으로는 좋은 소식으로 국민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국민 연설은 항상 5분을 넘기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도 길면 다들 집중하지 않는다.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숙군사업은 어느 정도 느슨해져 있던 군의 기강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
나는 이참에 사회 전반에 대한 기강을 잡기로 했다.
소련의 그 누구더라
그래 유리 안드로포프.
KGB국장 출신의 빨갱이 서기장은 망해가는 소련을 보고 이런 캠페인을 전개한다.
“원칙과 질서.”
전반적으로 해이해진 소비에트 사회의 기강을 한 번 세게 조임으로서 안드로포프는 잠시나마 소련의 경제 성장률을 크게 끌어올리며 연방을 숨을 쉬게 만들었다.
나는 유리 안드로포프의 캠페인을 그대로 베껴다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안드로포프처럼 사회 전 분야에 생산성 강화를 주문했다.
“일터에서는 일에만 집중하고 잡담이나 담배 술 따위에 시간을 써선 안 됩니다. 여러분이 헛손질을 하거나 딴청을 피우는 시간만큼 기업과 국가는 손해를 봅니다. 그렇게 머뭇거려서 언제 대한이 미국과 소련을 따라잡겠습니까.”
“질서도 중요합니다. 차로에선 교통 신호를 준수하고 줄을 서야 할 곳에선 줄을 서고 아무도 보지 않아도 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나라가 중국과 같은 무법천지 세상이 되길 바라십니까.”
사회 전 분야에 대한 나사 죄기 운동이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잡혀 온 ‘경범죄자’들은 유치장에 구류해놓은 다음 이성준 시리즈 교육을 시켰다.
“몇 달 시키면 좀 위험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1~2주 정도는 괜찮겠지.”
적어도 이 이성준이의 말을 따라야겠다는 생각 정도 심어주는 건 괜찮잖아.
본국에서 시작된 캠페인은 이내 일본으로도 파급됐다.
“저 각하. 일본 통감부에서도 원칙과 질서 캠페인을 시작하란 말씀이십니까?”
“분명 그렇게 말했소.”
“하지만 일본은 일본만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시끄러워지기라도 하면.”
“임자. 나도 일본은 좀 압니다.”
“죄 죄송합니다.”
내가 어찌 왜놈들을 모르겠는가.
21세기까지 이웃으로 두고 평생을 지켜봐 온 놈들인데.
“그 친구들은 세게 나가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강자에 순종하는 친구들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자기 권리가 걸린 문제에선 얌전하지 않은 친구들입니다.”
“그건 임자가 물러서 그런 거요.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당장 시행하는 건 무리인 듯하니 ‘문화 통치’부터 시작하시오.”
“문화 통치라면 일본인들을 좀 풀어주란 말씀이신지?”
“적당히 활동할 구멍을 늘려주고 대신 경찰력을 3배쯤 늘리시오.”
“예?”
이동녕은 그 말에 당황해했다.
하지만 이게 일본식 문화 통치 아닌가.
나는 그렇게 배웠다.
원칙과 질서 캠페인은 오래지 않아 제국 전역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조금이지만 생산성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 소련식 ‘영웅 제도’를 창설하기로 했다.
“원산의 노동자 이길섭 시민은 기업소에서 할당한 피복류 생산을 300% 달성했으므로 노력 영웅상을 수여하는 바입니다.”
“그 감사합니다.”
나는 사회 곳곳에 영웅상을 만들어 사람들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아니 이 부서엔 영웅이 하나도 없어?”
“애국자가 없는 삭막한 곳이구만.”
이러니 실적 몰아주기를 해서라도 영웅을 만들려는 풍조가 생겨났다.
썩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제국의 생산력에 도움이 된다면 다소의 부작용은 감수할 수 있었다.
독소전이 코앞인 상황 아닌가.
“각하. 내무성 보고입니다. 최근 원칙과 질서 위배로 구류된 자가 5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 추세면 2달 후엔 유치장이 포화 상태가 될 기세라 혁명화 수용소를 재개장했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혁명화 수용소? 그건 절대 안 돼.
아무리 사회 전반의 기강을 죄고 부패를 때려잡고 있어도 그것만은 안 됐다.
그건 대한제국의 흑염룡 같은 것이었다.
“임자. 그 서류 파쇄해버려.”
나는 못 들은 것이다.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유리 안드로포프는 소련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겐 별 존재감이 없지만 소련 회생의 유일한 희망이라 불렸던 사람입니다. 아 물론 칼기를 격추한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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