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한국이 숙청과 사회 정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달이 바뀌었다.
유라시아의 운명을 건 일전이 목전에 이르러 있었다.
1941년 5월 9일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 탈영병 하나가 국경을 넘어와 횡설수설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절 살려주시겠습니까?”
연방과 독일이 실질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다곤 하지만 공식적으론 여전히 불가침 관계에 있었다.
“우리가 왜 우방국의 군인을 해친단 건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41년 5월 15일 오전 4시에 독일군이 연방을 침공할 겁니다.”
당국은 독일 탈영병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 있던 첩자들이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은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같은 러시아어 기초 회화 모음집이 대량으로 인쇄된 사실을 보고해왔다.
철도에서 일하는 공산주의 노동자들도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항공기와 전차 대포 병사들의 행렬을 보고해왔다.
스위스의 첩자 알렉산더 푸테에게서도 중요한 정보 보고가 입수됐다.
“독일 침공군은 도합 168개 사단 380만 대군으로 러시아를 침공해올 계획입니다. 목표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입니다.”
푸테는 베일에 감춰져 있던 바르바로사 작전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이 보고를 받고 충격에 빠졌다.
“나치 놈들이 이렇게 대규모 침략군을 보내올 거라고?”
이제 독일의 침략 의도는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그렇기에 서기장 동무가 지시한 동원은 시의적절했다.
스탈린이 아니었다면 2월부터 1200만 명을 과감하게 징집한다는 결정을 어떻게 내렸겠는가.
장군들은 독일 침공군의 규모에 긴장하면서도 충분히 싸워볼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 연방군은 1350만에 육박한다.’
수적으로 따지면 독일군의 4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원역 바르바롯사 당시의 소련군이 독일 및 그 동맹군 430만 명에 대해 320만의 병사를 보유해 수적 열세에 시달렸음을 고려하면 장군들이 자신감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기장 동무. 이제 어떤 조처를 내리는 게 좋겠습니까?”
“전시 태세로 이행하시오. 지금부터 독일인들은 우리의 적이요.”
스탈린은 단호하게 응전을 준비하게 했다.
5월 10일 독일 대사관에서 암호를 소각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대사관 가족들이 본국으로 귀국했다.
5월 13일에는 독일에서 소련으로 오는 열차가 끊겼다.
5월 14일에는 소련의 항구에 그 어떤 독일 상선도 입항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베를린에서는 독일과 소련 사이의 긴장을 외교적으로 풀 수 있을 거란 기만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스탈린은 그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소련이 이렇게 날을 바짝 세우자 독일도 조금 긴장했다.
히틀러는 이전의 성공에 취해 자신만만해하고 있었지만 독일 육군 장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연방이 대놓고 총동원을 내린 상황입니다. 지금 전선의 병력 비율이 못해도 1:2는 될 겁니다.”
실제론 그보다 많은 소련군 병력이 있었다.
아무튼 1:2 상황이면 공격자로서 적의 약점을 수월하게 뚫고 들어가며 기동전을 펼치기가 매우 곤란했다.
독일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지만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러다가 겨울까지 전쟁을 질질 끌면 동계 피복 부족이 발목을 잡을 텐데 어떡하지?’
총통에게 동계 장비 문제를 슬쩍 이야기해보긴 했지만 히틀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련은 썩은 문짝이요. 걷어차기만 하면 넘어질 문짝을 상대로 겨울까지 전쟁할 생각이란 말이오?”
“죄 죄송합니다.”
그저 이반들이 핀란드에서처럼 저열한 전투력을 보여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계획대로 작전을 준비했다.
1941년 5월 14일 오후 10시.
동부 전선에 배치된 380만 명의 독일 국방군 장병들은 히틀러가 쓴 연설문을 들었다.
“장병 여러분! 무거운 걱정에 짓눌려 몇 달 동안 침묵을 지켰던 제가 마침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히틀러는 공격적인 문구로 대소 전쟁의 당위를 설명했다.
전통적인 독일의 영역이었던 발트 삼국에서 벌어졌던 발트계 독일인의 강제 이주 불가침 조약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소련의 무책임한 행동과 도발 서구와 독일의 공멸을 노린 스탈린의 음흉한 계략.
믿지 못할 볼셰비키들의 협잡에 대한 비난이 계속됐다.
총통은 말했다.
이 유대-볼셰비키 정권을 내버려두고선 유럽에 평화는 없다.
대독일의 아들딸이 두 다리를 뻗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동쪽의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짐승들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독일이 살 수 있다.
히틀러는 동시에 이 전쟁이 얼마나 승산이 있는지도 말했다.
“우리 군대는 이미 무적임을 증명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덴마크에서 네덜란드에서 벨기에에서 룩셈부르크에서 프랑스에서 계속해서 승리하고 이겨왔습니다. 저 위대한 대영제국조차 우리에게 화의를 구걸해왔습니다. 하나로 결속한 게르만은 이렇듯 강대합니다.”
“여기에 수많은 친구가 우리 깃발 아래 섰습니다. 핀란드의 만네르하임 원수 루마니아의 이온 안토네스쿠 원수가 우리와 나란히 빨갱이들의 심장을 향해 전진할 것입니다.”
“단호히 말하건대 1942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불쾌한 이름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의 장병들이여 승리를 향해 전진하라. 도이칠란트 지크 하일!”
히틀러는 이 전쟁을 성전으로 포장했다.
공산주의라는 거악에 맞서는 반공 십자군 전쟁.
실제 성격도 그러했다.
전 유럽의 파시스트들이 이 승부를 위해 SS의용병으로 혹은 독일군으로 자원입대해 군복을 입었다.
이 전쟁은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었다.
장병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지를 되새기며 각오를 다졌다.
반드시 이번 전쟁에서 빨갱이들을 분쇄하리라.
갈가리 찢어발겨 지구상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라.
독일군 장병들은 동쪽 땅을 사납게 노려보며 적개심을 고취시켰다.
1941년 5월 15일 오전 2시.
어둠이 내린 비행장이 훤히 밝혀지더니 수백 명의 조종사와 항공 지원 인력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첫 공격을 완벽한 기습으로 끝내려면 새벽녘에 공습을 개시해야 했다.
야간 비행의 위험성을 고려해 이 임무에는 베테랑 조종사들만 차출됐다.
“빨리빨리. 시간 모자란다.”
정비 장교의 외침에 부사관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졌다.
오전 3시.
주둔지에 머물던 독일군 야포들이 준비해둔 포병 진지로 전진해 방열을 마쳤다.
1만 문이 넘는 막대한 화포의 표적은 국경 너머에 있는 소련군 진지와 초소였다.
“이반 놈들 혼이 빠지겠군.”
독일군은 자신들의 입체적인 공격을 소련군이 감당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오전 3시 50분.
국경을 코앞에 둔 도로 곳곳에 엄청난 차량 행렬이 나타났다.
전차와 트럭들은 시동을 건 채 공격 개시 명령을 기다렸다.
독일 기갑 부대의 아버지 하인츠 구데리안 또한 자신의 기갑 군단을 일선에서 직접 지휘하기 위해 전차에 탄 채 명령만을 기다렸다.
“공격 개시 시간까지 10분 남았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구데리안은 헤드셋을 가져와 귀에 썼다.
오전 4시.
발트해에서 흑해에 걸친 긴 전선 전체에 걸쳐 1만 문이 넘는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콰쾅!
독일군의 압도적인 포격은 단번에 모든 것을 휩쓸었다.
내무 인민위원회의 초소 막사 진지 요새 비행장 모든 곳이 타격 대상이었다.
동시에 어둠을 뚫고 독일군 폭격부대가 소련 영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번 공격에서 이반 놈들의 공군을 지상에서 싹 쓸어버린다.”
“하하. 어린애 팔 비틀기보다 쉽죠.”
독일 조종사들은 승리를 자신했다.
핀란드에서 졸전한 소련군의 전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련 공군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수도 없이 격추시킨 상대가 뭐가 무섭단 말인가.
조종사들은 교신을 주고받으며 재빠르게 가장 가까운 비행장을 향해 날아갔다.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있는지 비행장은 어두웠다.
“받아라 이반 놈들아.”
독일군은 250kg 폭탄을 주기된 기체가 있을 법한 활주로와 격납고에 대량으로 쏟아부었다.
몇 번의 폭발과 함께 기지가 어느 정도 밝아지자 독일군 지휘관은 한바퀴를 돌며 지상에서 거둔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뭔가 불에 타는 게 별로 없어 보였다.
기지의 유류고처럼 보이는 곳은 확실히 잘 타오르고 있었지만 비행기로 보이는 물체는 별로 없었다.
‘설마 기습이 실패한 건가.’
그런 생각이 얼핏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비행장 위를 빙빙 돌며 상황을 살피고 있을 수도 없었다.
“회항한다.”
독일군 지휘관은 찜찜한 마음을 품은 채 기수를 서쪽으로 돌렸다.
오전 5시.
1시간의 준비 포격이 끝나자 380만의 독일 국방군과 80만의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육군으로 이루어진 동맹군 부대가 국경을 넘어섰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침공 작전 바르바롯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거창한 준비와 달리 소련군의 저항은 생각보다 약했다.
“적의 저항은?”
“형식적입니다.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국경 경비대 병력 외엔 저항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랐다.
만약 소련군 주력을 국경 근처에서 포위 섬멸하지 못한다면 계획한 단기전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다.
‘이반 놈들이 쓸데없이 겁이 많아서 일이 꼬이게 생겼군.’
하지만 독일의 최종적인 승리에 지장을 주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전쟁을 질질 끌어도 42년에는 승리로 끝나겠지.
독일 장성들은 무적의 국방군이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독소전 개전입니다. 영미 쪽 상황은 다다음 화에 묘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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