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5
나치들로선 유감스럽게도 SD가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미국 내 친나치 단체들이 무너져 내렸다.
막대한 규모의 독일계 미국인을 배경으로 두었음에도 이들이 허무하게 무너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FBI가 공개한 녹취록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뭐? 자유 민주주의 미합중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독일과 연대해 미국에서도 유대인 청소를 시작해야 한다고?”
너무나 터무니없는 얘기들이었기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쉽게 믿지 못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서 도망쳐온 망명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녹취록은 힘을 받았다.
“나치 놈들은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라니까요!”
설상가상으로 녹음된 음성 SP가 공개되면서 미국인들의 여론은 친나치 단체 해체 쪽으로 확 기울어졌다.
“국가 반역자 놈들! 놈들의 목을 매달아라!”
미국이 잡탕 국가라고 놀림을 받긴 하지만 애국주의 측면에선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나라였다.
“도 도망칩시다!”
친나치 단체의 주요 구성원들은 재빨리 배를 타고 대서양 건너편 독일로 달아났다.
수는 적어도 목소리 하나는 고립주의자 뺨치게 강하던 나치들이 숨을 죽이자 루스벨트는 한결 운신하기가 편해졌다.
“국장 다음 계획을 시작하시오.”
FBI의 다음 목표는 고립주의자들이었다.
미국 정부의 올가미가 죄어오자 공화당의 고립주의자들도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나치들이 반역까지 생각할 줄 누가 알았답니까.”
정책적으로 나치들과 연대해 참전을 막고 있던 몇몇 의원들은 재빨리 입장을 바꾸는 것으로 FBI와 타협을 봤다.
“이제 의회의 고립 기조는 대세가 아니게 될 겁니다.”
후버는 대통령에게 자신이 거둔 전과를 자랑스레 보고했다.
“수고 많았소.”
루스벨트는 짧으면 두 달 안에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킬 작정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피를 흘리는 일도 아니잖은가.’
물자 좀 대줘서 나치를 쓰러트린다면 남는 장사였다.
루스벨트는 이런 정책 기조를 주미 영국 대사 로디언 후작에게 넌지시 전했다.
영국 총리 핼리팩스는 이 같은 미국 정부의 의향을 전달받자 고민에 빠졌다.
그로선 고민스럽게도 국내에는 전쟁에 끌려 들어가는 걸 경계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전함 몇 척 훔치려다 수십 만명을 생지옥에 몰아넣은 인간의 주장을 귀 담아 들을 가치가 있습니까.”
물론 히틀러의 승리를 묵인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았다.
“나는 독일 총통을 위해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싶지 않다!”
핼리팩스는 이 복잡한 여론 속에서 행보를 결정해야 했다.
그는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과 상의 끝에 약간의 용기를 내기로 했다.
‘미국이 개입에 나선다면 우리도 손을 살짝 보태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포로는 일정한 액수의 보상금을 내고 모두 송환받았다.
나치에 맞선다고 해서 문제 될 구석은 전혀 없었다.
핼리팩스는 미국 대사 존 길버트 위넌트에 암시를 줬다.
“대영제국 정부는 독일과 정면으로 싸울 의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인들이 유럽 대륙을 독식하게 방관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독일과 타협을 선택한 핼리팩스도 근본적으로 나치를 신용하지 않았다.
평화 조약 이후 독일이 점령지 철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만 봐도 베를린이 신용할 수 없는 상대란 사실은 명백했다.
독일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영국이 성실하게 평화 조약을 준수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핼리팩스의 의중을 확인한 미국 대사는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했다.
‘결국 영국도 개입을 생각한다 이거군.’
미국조차 대서양 건너편에서 안보 위협을 느끼는데 40km 폭의 도랑에 안보를 의지하는 영국은 오죽하겠는가.
핼리팩스의 성향과 관계없이 영국은 다시금 독일의 반대편에 배팅할 운명이었다.
영미 양국 정부의 보폭이 빨라지자 독일 대외 정보청SD도 바빠졌다.
“아니 어떻게 관리했길래 단체들이 싹 날아가버린 건가.”
“그게 미국 정부의 공작 같습니다.”
“그 머저리들은 사람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새지 말아야 할 말까지 다 흘린 거야!”
미국 내 친나치 단체들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바람에 SD는 계획한 공작의 일부도 시도해볼 수 없는 상태에서 전투에 임해야 했다.
SD는 급한 대로 아직 숨이 붙어 있던 미국-독일 분트의 소모임을 이용해 제럴드 프렌티스 나이 상원의원 같은 고립주의자들에게 후원금을 보냈다.
“모두 어려운 시기에 후원금을 지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의원님. 호전광 개입주의자들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려는 의원님을 돕는 일인데 액수가 문제겠습니까.”
SD 국장 하인츠 요스트는 유대인으로부터 약탈한 자금을 바닥까지 긁어냈다.
그 돈으로 고립주의를 지지하는 지식인이라면 작가 학자 언론인 정치인 가리지 않고 후원하며 그들의 활동을 독려했다.
어떻게든 당면한 루스벨트의 개입을 막아내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병신 같은 밥벌레 놈들만 우릴 도왔어도.’
SD 요원들은 대사관이 그들을 지원해주기만 했어도 일이 편했을 거라며 욕설을 쏟아냈다.
대사관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건 제쳐두고 현재 주미 독일 대사는 공석이었다.
그래서 대리 대사인 한스 톰센이 직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격이 맞지 않다 보니 외교 활동에 지장이 많았다.
그렇다고 대사관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미국 정계에 선을 대서 미국의 개입주의를 저지하려 애는 썼다.
고립주의를 선전하는 캠페인에도 참가했고 공화당 전당 대회에도 나갔다.
문제는 둘이 전혀 협력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물론 대사관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외무성 같은 전통 있는 관료기구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잡놈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말이 되나.”
두 기관은 같은 목적을 위해 달리면서도 힘을 합치질 못했다.
나치 독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료주의 조직 이기주의였다.
이러다 보니 독일은 당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불리한 여론전을 끌고 가야 했다.
“각하. 외무성이 우리 일에 전혀 협조를 해주질 않습니다. 공작도 따로 하는 바람에 비용만 2배로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이드리히는 상황을 보고받자 격노했다.
정말이지 이 나라 독일은 비효율적이고 병신 같은 나라였다.
생각 같아선 다 갈아 엎어버리고 싶었다.
‘이성준이가 이런 심정이었나.’
하이드리히는 전쟁 중에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이성준에게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드리히가 이성준이처럼 혁명을 생각했냐면 그렇진 않았다.
애초에 하이드리히는 ‘혁명’을 일으킬 만한 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한국으로 치면 보안사 하나만 쥐고 있는 꼴인데 그걸로 뭘 하겠는가.
“뾰족한 방법이 없군.”
“예?”
“일단 막을 수 있는 선까지 막아봐.”
하이드리히는 어쩔 수 없이 물밑 전쟁에서의 패배를 전제로 싸우기로 했다.
기왕 패할 싸움이라면 질질 끌기라도 해야 했다.
독일인들이 물밑 전투에서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장기전으로 옮겨가려 할 무렵 소련 정보기관은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하하하. 일이 잘 풀리려니 이렇게도 돌아가는군.”
소련군 총정보국장 필리프 골리코프는 뜻하지 않은 미국 내 정세 변화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련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미국 내 나치들이 전멸해버렸다.
그러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건이 조성됐으니 루스벨트가 운신하기 한결 편할 것이다.
그럼 힘을 좀 실어줘야지.
골리코프는 주미 소련 대사관에 전문을 보내게 했다.
“미국 공산당에 지령을 내리시오. 루스벨트의 정책에 전적으로 협조하라고 말이오.”
현재까지 확인된 루스벨트의 성향은 반독 친소.
그렇다면 이쪽도 협조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물론 루스벨트를 그냥 믿는 건 아니었다.
루스벨트의 가까운 거리엔 소련의 지령을 받는 국무부 차관보 보좌관 앨저 히스가 있었다.
앨저 히스는 주기적으로 소련에 정보를 보냈는데 골리코프는 그 정보를 통해 미국 정부 심처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각하. 런던에서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줘봐.”
골리코프는 영국에도 손을 뻗어두고 있었다.
미국이 그렇듯 영국 정부의 요직에도 소련의 첩자들이 숨어 있었다.
빨갱이들은 그 어디에나 있고 또 그 어디에도 없을 수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존재였다.
“흠. 영국도 제한적 개입을 고려 중이라니. 서기장 동지께서 기뻐하시겠군.”
골리코프는 재빨리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곧 완성된 보고서는 깨끗하게 철을 한 다음 스탈린의 책상에 올려졌다.
서기장은 기계적으로 서류를 처리하다 골리코프가 올린 문서를 봤다.
“영미가 개입을 생각 중이라.”
그 생각을 하니 문득 이성준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전후의 질서는 이념의 경쟁장이 될 거라 했지.’
설마 이성준은 그때부터 영미와 소련이 협공해 독일을 무너트리는 그림을 보고 있었던 건가.
스탈린은 새삼 이성준에 대한 평가를 높이 잡았다.
상대는 흔해 빠진 군부 독재자 따위가 아니었다.
전후를 구상하고 거기에 대비해 밑그림을 그리는 전략가였다.
‘이성준에 비하면 히틀러는 삼류 도박사에 불과한 놈이지.’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전쟁을 도발해 위기를 자초한다는 점에서 히틀러는 높이 평가할 가치도 없었다.
권력을 잡는 과정까지 보여준 모습은 훌륭했지만 국가를 멈출 수 없는 따갚돼 도박에 빠트린 점에서 히틀러는 실격이었다.
실로 유감스러웠다.
히틀러가 조금만 대국을 볼 줄 알았다면 연방과 독일이 손을 잡고 천하무적의 동맹을 구축했을 텐데.
차라리 이성준이 독일의 지도자였으면 어땠을까.
스탈린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당연히 녹취록과 음성 SP는 이성준이의 지시를 받은 중정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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