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5
독재자 이성준의 의지는 단호했다.
무반들은 앉은 자리에서 항의할 틈도 없이 토지를 몽땅 뺏겼다.
50년에 걸쳐 원리금과 이자를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게 어디 제대로 된 보상일 턱이 있겠는가.
물가 상승률과 기회비용 토지에서 얻을 수 있었던 수익을 고려하면 1/10의 헐값에 땅을 뺏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강현식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대대손손 지켜온 땅을 제국이 강탈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에게 맞서 땅을 되찾아야 했다.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닌 가문의 자존심이자 무반이란 신분의 상징 그 자체였다.
강현식은 근처의 무반들과 연락부터 취했다.
“강 후작.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 사람들과 자주 왕래하면 좋지 않네. 사세가 좋아질 때까지 좀 참아보게.”
“아 누가 그걸 모르나? 상황을 보게 상황을. 이걸 어떻게 참으란 건가.”
강현식은 친우들에게 울분을 터트렸다.
알량한 후작이란 작위 하나만 빼고 다 뺏긴 상황에 무얼 더 참으란 말인가.
하지만 친우 상당수는 강현식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 마음속으로는 강현식의 말에 동감했지만 행동으로 옮기길 두려워했다.
‘이성준이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놈인데 거기 대들 생각을 해?’
역쿠데타가 한번 실패한 시점에서 무반들은 이성준에게 도전할 능력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군부에 남아 있던 무반들도 얼마 전에 보안사와 헌병에 줄줄이 끌려갔다고 했다.
이래선 쿠데타고 뭐고 할 건덕지도 없었다.
“에이 빌어먹을 겁쟁이들.”
강현식은 집으로 돌아와 씩씩거렸다.
그러던 차에 은밀한 서신 한 통이 강현식에게 날아왔다.
‘황국 협회?’
이름부터 보수파의 맛이 느껴지는 네이밍이었다.
강현식은 황국 협회의 모임이 있다는 요정을 찾아갔다.
“강 후작도 왔나.”
“아니 자형도 계셨습니까?”
뜻밖에 황국 협회의 모임에는 이름 있는 무반들이 꽤 나와 있었다.
강현식이처럼 이성준 정권에 맞서 목소리를 낼 용기를 가진 중량감 있는 인사들이었다.
다들 후작이네 백작이네 남작이네 하는 작위를 달고 있는 사람들이라 강현식이는 내심 흡족함을 느꼈다.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안 가 이를 주최한 걸로 보이는 늙은 무반이 방에 나타났다.
“남진승 공작 각하야.”
“아니 남진승 각하께서 이런 일에 나서주셨다고?”
다들 남진승의 등장에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남진승이 누구던가.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반 의령 남씨의 장손이자 당대 안산 공작의 지위를 계승한 사람이었다.
“각하.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무반들이 앞을 다투어 남진승에게 허리를 굽혔다.
남진승은 당연하다는 듯 인사를 받았다.
강현식도 얼른 가 인사를 올렸다.
“강 후작이군.”
“저 절 아십니까?”
“자네 선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지.”
선친과 친분이 있다는 말에 강현식은 남진승이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회합은 별 거 없이 끝났다.
다들 안면을 익히면서 이성준이를 씹는 걸로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틀 후 강현식은 또 황국 협회의 초대장을 받았다.
전과는 다른 위치의 요정이었다.
요정을 방문하니 이전과 비슷한 구성원들이 있었다.
몇몇은 오지 못했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남진승이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회합에 나타났다.
이렇게 10번 정도 회합을 들락거리는 동안 고정 멤버가 된 사람들은 서로를 익숙하게 여기게 됐다.
그리고 11번째 회합이 있던 날 남진승이가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이제 서로 안면도 충분히 익혔으니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네. 자네들은 이 나라 대한이 어떤 상황이라고 생각하나?”
“그야 근본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 말대로네. 이 나라는 근본이 무너지고 있어. 대한이 어떤 나라인가. 위대한 고조께서 왜란의 후유증에서 나라를 일으키시고 성조께서 후금을 무너트려 반석에 올린 국가일세. 그 일을 두 분이 모두 다 하셨던가? 아니 그분의 손발이 되어드린 무반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위업이었네.”
무반이 제국의 근본이란 건 고조와 성조 시대 제국을 재흥시킨 공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 이야기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여야 마땅했다.
“그런 우리 무반을 이성준이가 짓밟고 있어. 흙발로 짓밟으면서 천것들과 같은 위치로 떨어트리려 한단 말일세. 이걸 그냥 두고 봐야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우리 무반이 어찌 천것들과 같은 위치에 놓인단 말입니까.”
“내 생각도 그렇네. 그러니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아 이성준이를 타도해야지.”
남진승의 말에 무반들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회합에 참석하면서 이 황국 협회에 대한 소속감은 어느 정도 형성됐지만 이성준이 타도 같은 위험한 이야기에 따르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무반들 사이에 망설임이 흐르는 것 같자 남진승이 말을 이었다.
“지금 이성준이가 두려워서 자네들이 겁을 먹은 건 알고 있네. 이성준이가 두려운 건 나도 인정함세. 하지만 우리가 더 물러날 공간이 남아 있나?”
그건 아니었다.
토지를 건드린 순간 무반은 선택해야 했다.
천것들과 같은 위치로 떨어질지 목숨을 걸고 달려들지.
여기 남은 사람들은 목숨보다 가문의 명예에 무게를 둔 작위 계승자들이었다.
강현식도 한참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만약 일을 도모한다면 어떤 식으로 진행할 건지 각하의 의중을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 이 서방.”
남진승이가 손뼉을 치자 정장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들어와 무언가가 쓰인 종이를 무반들에게 배부했다.
무반들은 그걸 조심스레 읽다가 흠칫 놀랐다.
“이 이건.”
남진승이는 군사력으로 이성준이를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얼로 이성준이를 치겠는가?
남진승이는 그 답으로 테러를 제시했다.
남진승이가 젓가락으로 민어의 살점을 뒤적이며 말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나는 1차 세계대전 참전자네. 그때 가스라는 걸 처음 맛봤지.”
남진승은 자욱하게 몰려오는 독가스의 공포를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가스만 몰려오면 멀쩡한 사람도 몇 분 안에 피거품을 내뿜는 산송장이 되곤 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만 하면 잠이 오질 않는다네.”
가스.
여기 있는 무반들은 그 공포를 느껴본 사람이 몇 없었다.
하지만 전설 같은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공포를 이성준에게도 맛보게 해주면 어떻겠나.”
사람들은 당혹감에 술렁였다.
아무리 그래도 독가스 테러는 좀 아니지 않을까.
“그래 다들 아직은 망설이는 생각들이 있을 거야. 하지만 잘들 생각해보게. 우린 모든 걸 빼앗기고 있는 입장이네. 수단 방법 가릴 처진가?”
강현식이는 남진승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각하께서 말씀하신 ‘테러’는 어떤 식으로 준비하실 생각이십니까? 보아하니 가스는 화학 설비를 갖추지 않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잖습니까.”
단순한 염소가스라면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염소가스는 자극적인 냄새와 색상을 가지고 있어 사용 즉시 발각이 되어 테러 무기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독일이 개발한 타분 가스나 사린 가스 같은 걸 써야 하는데 이런 걸 만들려면 제대로 된 공장 설비와 기술자가 필요했다.
거기엔 막대한 돈이 들뿐더러 정부 당국의 감시망에 들기 쉬웠다.
남진승이도 생각해둔 게 있었다.
“중국에다 공장을 세워서 가져오면 될 거 아닌가.”
“!!!!!”
묘수였다.
현재의 중화민국은 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무법천지 세상이었다.
그 혼란 속에 독가스를 제조할 화학공장 하나 세운다고 해서 누가 제대로 살피겠는가.
“각하의 말씀대로라면 비용이 문제겠군요.”
궁극적인 문제는 결국 비용이었다.
설비를 들여와 화학공장을 세우고 기술자를 초빙하려면 한두 푼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들 도움이 필요한 걸세.”
‘화학 테러 준비에 자금을 대라 이거군.’
만에 하나 여기 비용을 댄다면 테러 조직에 확실히 이름을 올리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이야기를 다 들어놓고 빼기도 뭐 했다.
무반들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성의를 표시하긴 해야 했다.
“그럼 얼마나?”
“5백 원. 5백 원씩만 준비해주게.”
아주 많지는 않지만 적은 돈도 아니었다.
사정이 좋을 때라면 몰라도.
강현식은 사람들이 우물쭈물하는 걸 보고 자기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내가 비용을 대겠습니다. 대한을 위한 일에 왜 이렇게 겁들이 많은지.”
강현식이가 나서자 다른 무반들도 하나둘 용기를 냈다.
“저도 대겠습니다.”
이성준이만 테러로 없애버리면 토지 개혁은 흐지부지된다.
그리고 그 혼란 통에 새로 집권할 지도자는 정권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무반들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이런 계산이 없었다면 무반들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다들 이렇게 힘을 보태주니 고맙군.”
“아닙니다. 이 일에 총대를 메어 주신 공작 각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회합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무반들이 모두 돌아가자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남진승이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충성스러운 가신을 대하던 남진승이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여기까지 협조했으니 내 멍청한 서자 놈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약속 지키시오.”
“물론입니다 각하. 우리 중정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공작의 심복 이 서방으로 가장했던 중정 요원이 물러가자 남진승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음모 자체는 그럴듯했지만 이건 불평분자들을 낚기 위한 중정의 함정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남진승이는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질 동료 무반들에게 동정을 표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는 놈은 사기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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