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0
한국의 대독 선전포고는 장제스를 흥분시켰다.
세계 제일의 열강인 독일과 한국이 싸운다.
구도가 이렇게 됐으니 평양도 마냥 중국과 장기전을 끌고 가긴 부담스러울 것이다.
장제스는 한국인들이 접촉하기 쉽게 홍콩으로 자신의 측근을 보내 협상 창구를 열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한국의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위원장 각하. 공비들이 점령지를 20곳이나 더 확장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우한도 위험합니다.”
“왕징웨이의 행보도 심상찮습니다. 놈은 삼민주의三民主義(주:쑨원이 주장한 중화민국의 이념)를 멋대로 재해석해 대아주주의大亞洲主義(주:아시아인의 아시아를 주장)라는 해괴한 주장을 떠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넘어가는 자들이 있단 겁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장제스는 믿을 수 없었다.
한간 중의 한간인 왕징웨이의 쓰레기 같은 말에 넘어갈 중국인이 세상에 어딨단 말인가.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 왕징웨이는 한국이 침략자가 아니라 군벌로부터 중화 인민을 구원하는 구원자라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왕징웨이 정권의 직할령에선 국방과 관련한 다양한 잡세가 폐지된 상태입니다.”
장제스는 그 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세금을 깎아준다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중국인들에게 돈 문제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한간이냐 아니냐는 감정의 문제지만 세금은 생존의 문제였다.
장제스는 처음으로 왕징웨이에게 위협감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왕징웨이가 빨갱이들보다 위협적이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가?”
장제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왕징웨이는 군사력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허어.”
어처구니가 없어 솔직히 말문이 막혔다.
그게 말이 되는 짓거리인가?
그건 보여주기라도 주권 국가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버렸다는 뜻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한간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위원장 각하. 이젠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선 왕징웨이에게 뒤에선 마오쩌둥에게 압박을 당하는 실정입니다.”
허잉친의 지적은 뼈아팠지만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우리가 먼저 한국에 협상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수건을 던진다.
장제스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걸 말이라고.”
“위원장 각하. 서구 열강은 우릴 중재해줄 생각이 없습니다. 엊그제 미국 대사의 태도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미국 대사 클라렌스 에드워드 가우스는 중국에 그 어떤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 대사는 중국이 추축국 가입을 시도해 한국을 자극한 게 전쟁의 원인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전쟁 책임을 중국 측에 돌렸다.
“그래도 안 돼.”
장제스는 절대 한국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아니 보여선 안 됐다.
한국에 억지 도발을 당해 2번을 내리 패전한 지도자가 되면 누가 그를 믿고 따르겠는가.
장제스는 이미 정치력을 상당히 잃은 상태였다.
여기서 더 타격을 받았다간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각하. 우리가 무슨 수로 전쟁을 끌고 나가겠습니까? 우리 중국은 물자도 시간도 돈도 없습니다.”
“허 부장.”
“저도 위원장님께 희망적인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이런 걸 어쩌겠습니까? 부디 4억 중국 인민을 위한 영단을 내려주십시오.”
“그만 가봐.”
허잉친은 허리를 굽힌 다음 집무실에서 물러갔다.
장제스도 사정이 어렵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독일이 소련을 꺾기만 하면 한국의 뻣뻣한 태도도 바뀔 것이다.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장제스가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군사 위원장입니다.”
“위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소련이 소련이.”
“소련이 뭘 어쨌단 말인가?”
“소련군이 신장을 점령했습니다.”
장제스는 세상이 새하얗게 질리는 걸 느꼈다.
그는 그대로 집무실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소련군의 신장 진주는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장의 주인인 서북 군벌 성스차이는 소련군에 대항하는 대신 재빨리 백기를 내걸고 모스크바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애초에 성스차이는 국민당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10만 소련군을 이끌고 신장에 들어온 키릴 메레츠코프는 중국인들의 한심한 태도에 경멸감을 표시했다.
“국가를 지키려는 의지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 장군이네 총독이네 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메레츠코프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성스차이와 마주한 자리에선 무척이나 우호적인 태도로 그를 대했다.
“성 장군의 결단이 불필요한 충돌을 막았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장군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됐든 인명이 우선 아닙니까.”
성스차이와 메레츠코프는 그 자리에서 ‘소련-중화민국 신장 주둔 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의 이 같은 침공은 몇 가지 계산이 뒷받침된 행위였다.
그들의 속내를 정리하면
1. 한중 전쟁의 조기 종결을 압박한다.
신장 점령으로 중화민국을 압박함으로써 장제스가 강화에 응할 가능성을 높인다.
2. 인적 자원의 확보.
독소전에 막대한 군대를 동원하면서 소련은 민간 차원에서 쓸 인력이 부족해졌다.
이 부족분을 신장에서 끌어온다면 소련 경제에 가해지는 부하를 줄일 수 있었다.
3. 전후를 대비한 포석.
신장을 확보해두면 전후 소비에트 연방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완충지대를 마련해둘 수 있다.
모스크바로선 이 같은 계산이 합리적일지 몰라도 중국으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당장 당내에서 한국과 강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러다 나라가 앉은 채로 산산조각나게 생겼습니다. 한국도 모자라 소련까지 침공해온 상황인데 계속 항전하자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겁니까?”
당내에선 이러다 순 왕조 말기처럼 열강에 할거割據당하는 미래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장제스도 이 압박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
그는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공비들과 다시 대화 창구를 열어보시오.”
2차 국공합작을 멋대로 깨트린 빨갱이들과 협상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왕징웨이와 한국에는 절대 굽힐 수 없다.
장제스가 열 수 있는 창구는 결국 빨갱이들뿐이었다.
장제스는 특사로 연금 상태에 두었던 요서 군벌의 수장 장쭤린을 보내기로 했다.
장쭤린은 장제스가 자신을 용서(?)해줬다는 사실에 감격했지만 이내 자신이 풀려난 이유를 알고 겁에 질렸다.
“3 3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가 서안에서 초공을 망치지만 않았어도 빨갱이들과 이렇게 굴욕적인 협상을 시도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러니 자네가 책임지고 빨갱이들 도장을 받아와.”
하지만 말이 안 됐다.
한국에 붙어서 중화민국의 뒤통수를 친 놈들이 인제 와서 협상을 왜 받아들이겠는가?
그럴 거면 애초에 배신하질 않았겠지.
장쭤린은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서안에서 장제스를 연금하고 2차 국공합작을 강요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장쭤린은 바닥만 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옌안으로 가보겠습니다.”
어쩌면 사지로 가는 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을 생각해야 했다.
장쭤린은 비행기를 타고 곧장 옌안으로 날아갔다.
장쭤린이 옌안에 도착하자 뜻밖에 저우언라이가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장 동지.”
중국 공산당은 장쭤린을 환영했다.
그야 서안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공산당을 구해 준 장본인이니 대접이 박할 수가 없었다.
장쭤린은 공산당 측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런데 마오 주석께서는?”
“주석께서는 업무가 바쁘십니다.”
다만 마오쩌둥은 절대 만날 수 없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말이라도 전해달라고 해도 깨끗이 묵살당했다.
그러면서도 장쭤린을 대접하는 일은 공산당 고위 인사가 계속 맡았다.
이걸 두고 홀대나 무시라고 표현하긴 좀 그랬다.
장쭤린이 아리송한 채로 협상만 기다리고 있을 때 공산당의 우두머리 마오쩌둥은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멍청한 친구는 아직도 감이 없군. 장제스가 정말 협상하라고 자기를 보내놓은 줄 아나.”
오랫동안 장제스와 싸워온 마오쩌둥은 그의 숙적이 품은 생각을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장쭤린을 보낸 건 그저 당내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나는 공비들과 협상하기 위해 내 목숨을 위협한 반역도당도 풀어줬다.’
그런데 협상 결과가 안 좋으면 그게 누구 책임이겠는가?
최선을 다해 성의를 보인 장제스 탓이겠는가?
아니지.
은혜도 모르고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장쭤린 탓이다.
장제스는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장쭤린을 보낸 것이었다.
마오쩌둥도 이런 숙적의 꿍꿍이를 알고 있었기에 박자를 맞춰줬다.
어차피 협상이 불가능할 거란 점에서 둘의 생각은 일치했다.
그러니 적과 손을 맞춰주지 못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주석 동지. 이번 협상이 틀어지더라도 한동안은 국민당을 적극 공격해선 안 됩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 짓거리를 했다간 국민의 반감을 산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니 느긋하게 움직여도 상관없지.’
마오쩌둥은 장쭤린에게 여자를 몇 더 붙여서 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하란 지시를 내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대독 선전포고의 영향편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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