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8
김국환은 거리에서 보호세를 걷는 걸로 먹고 사는 자칭 낭만 협객이었다.
국환은 스스로의 주먹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함부로 힘을 쓰지 않았다.
나름의 규칙이 있었고 선도 있었다.
그래봐야 주변에선 그를 건달이라고 불렀다.
사실 놀고 먹는 인생에 협객이니 하는 칭호는 가당찮았다.
김국환은 그렇게 편하게 주먹으로 먹고사는 삶을 살다가 ‘범죄와의 전쟁’ 때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됐다.
유치장을 나오고 보니 국환이 모시고 있던 주먹 형님과 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
국환은 하는 수 없이 막노동을 시작했다.
다행히 제국 각지에는 일거리가 널려 있었다.
김국환은 처음으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맛을 봤지만 이내 때려치웠다.
급여가 너무 적어서였다.
‘시이발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국환은 아는 주먹 형님들을 통해 하우스 도박 영업을 뛰기 시작했다.
“소리 지르면 바로 들어오라고. 알았지?”
“예 형님. 맡겨만 주십쇼.”
자칭 낭만 협객 시절엔 쳐다도 안 본 일이었지만 이젠 먹고 사는 게 급했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수작을 부려?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냐!”
국환은 하우스에서 무시무시한 어깨로 행세하며 타짜와 호구들을 짓뭉갰다.
“내가 말이야 평양 서동 거리의 쌍 포크야. 알아?”
국환은 나름 허세도 떨어가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리고 다시 대한제국의 무시무시한 마수가 그를 덮쳤다.
“이 새끼들 다 잡아.”
무자비한 공안기관의 공권력 앞에 국환은 한낱 미물조차 못 되는 존재였다.
국환은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잡혔다.
주먹이니 뭐니 해도 관의 지엄함 앞에선 아무 소용없었다.
이번엔 판사도 봐주지 않아서 교도소로 갔다.
국환은 교도소에서 중범죄자로 분류돼 5년 형기를 살게 됐다.
“야 111번 가석방.”
그나마 힘을 절제할 줄 아는 국환을 좋게 봐준 교도소장이 형기를 크게 줄여준 덕에 2년만 살고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감옥에서 나와 유치장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양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집으로 찾아왔다.
“김국환 씨?”
남자는 낮고 차가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심하면 사람의 목을 물어버리는 뱀 같은 자였다.
국환은 거리에서 이런 자들을 종종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 그런데요?”
“우리 국환 씨는 죄를 아주 많이 지었더군. 사기도박 폭력 금품 갈취 조직 폭력 강도. 안 지은 죄가 없어.”
“나는 강간은 안 했습니다. 그리고 죗값은 다 치렀는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낭만 협객 김국환이 내세울 수 있는 항변은 그게 다였다.
“어쨌든 그 죄 때문에 인생이 꼬인 건 사실이지. 안 그런가?”
국환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오늘날을 생각하면 차라리 어릴 때 마음 잡고 공부나 했으면 어떨까 하는 후회가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도박에 미쳐 소를 팔고 집을 팔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다른 길을 걸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새끼가 남의 집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국환의 말투가 자연히 불퉁해졌다.
“그게 어떻다는 거요.”
“아버지 때문에 망한 인생 조국을 위해 한 번 써보는 건 어떤가?”
그 말에 김국환이 살짝 얼어붙었다.
“조 조국? 무슨 중정이나 그런 곳에서 나온 분이십니까?”
“생각이 있으면 찬찬히 고민해보도록 해. 사흘 후에 찾아올 테니까.”
남자는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김국환은 며칠을 집에서 생각했다.
그 남자는 누굴까.
그리고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건 뭘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못 배운 국환의 머리로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어차피 망한 인생 한 번 더 굴려본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국환의 고민이 끝날 즈음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결심이 섰다면 이 옷으로 갈아입어.”
남자는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좋은 양복과 구두가 들어 있었다.
국환은 황송스러워하며 조심스레 옷을 입었다.
“이것도 차.”
남자가 시계도 던져주었다.
국환이 옷차림을 마치자 남자가 말했다.
“머리에 새겨둬라. 이제부터 옛날의 놈팽이 김국환이는 이 세상에 없는 거야.”
“예.”
남자가 손짓하자 멀리 있던 차가 국환의 앞으로 왔다.
역시 한 번도 보지 못한 좋은 차였다.
독일제인가?
국환이 두리번거리는데 남자가 말했다.
“타라.”
차를 타고 간 곳은 금수산 방향이었다.
죽 달린 차는 이내 금수산 앞에서 방향을 틀어 평범해 보이는 주택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공기가 달랐다.
일자무식한 김국환이가 보기에도 일반 민가 따위일 리가 없는 곳이었다.
“내려.”
국환은 남자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넓직한 거실에는 국환과 비슷한 양복을 입은 자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척 봐도 동류였다.
국환은 적당한 자리에 눈치껏 앉았다.
곧 남자가 손뼉을 쳐 주의를 모은 다음 양복 입은 무리를 향해 말했다.
“여기까지 영문도 모르고 오느라 수고들 했다. 걱정마라. 안 좋은 일로 부른 거 아니다. 나랏일을 하게 될 거란 얘기는 들었지? 오늘부터 너희는 국가 안전부 소속으로 일하게 됐다. 그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국가 안전부란 곳이 뭐 하는 곳인가 하는 생각을 할 텐데 그건 당연한 거다. 그건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 기관이라 그런 거다. 그냥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라고만 알면 된다.”
남자는 앞으로 국가 안전부라는 곳에서 하게 될 일에 관해서 설명했다.
국가 안전부는 국가를 위해 기업과 공장 등에 침투해 회계 자료 등을 훔쳐 오는 게 임무라고 했다.
목적은 그자들이 국가를 속이고 있지 않은지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국가가 물샐틈없이 관리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조용한 거였다.
그런 애국자 집단의 일원이 되다니.
김국환은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오늘부터 그는 거리의 건달이 아닌 국가 공무원 김국환이었다.
“그럼 각자 임무를 배당하겠다.”
국환은 태정에 침투해 남포 조병창의 물류 창고를 살피는 임무를 맡았다.
시일은 꽤 넉넉하게 주어졌다.
사람을 포섭하라고 공작금도 나왔기에 국환은 모처럼 여유로운 삶을 즐기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딱 열흘이 지날 무렵 형사들이 찾아왔다.
“김국환 씨?”
“저 전데 왜 그러십니까?”
“맞단다 야 잡아.”
김국환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자 잠깐만요.”
“이 새끼 입부터 막아.”
형사들은 우격다짐으로 김국환을 포박한 다음 포승줄로 감았다.
그렇게 김국환은 경찰서로 끌려갔다.
솔직히 이유를 알 수도 없었다.
나랏일을 하는데 형사들이 왜?
그런 억울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리고 도착한 경찰서엔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야 찍어.”
번쩍이는 빛에 국환은 눈도 뜨기 힘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국환이 눈을 가리며 소리치자 기자 하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했다.
“당신 5열이잖아.”
5열?
국환은 가방끈이 짧아서 5열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간첩 아니냐고!”
“내가요?”
국환은 어이가 없어졌다.
국환이 간첩씩이나 할 능력자였으면 거리에서 협객짓이나 하고 살았겠나.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아니에요?”
“내가 왜 간첩입니까. 나는 그저 나랏일을.”
국환은 그 말을 하려다 삼켰다.
“절대 국가 안전부 소속이란 걸 밝혀선 안 된다.”
남자가 그렇게 말해서였다.
그래도 심문이 계속되자 국환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국가 안전부 소속입니다. 위에 말을 하면 알아주실 테니 말씀이나 전해주시죠.”
그 말에 형사들이 어이없어했다.
“국가 안전부란다. 대한제국에 그런 기관이 어딨어?”
“비밀스러운 기관이라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야. 그런 곳이 있었으면 운동권 애들이 먼저 알았어. 그럼 우리도 알았고. 그런데 우리가 모르네? 그럼 없는 거지.”
국환은 그 말에 망치로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럼 국가 안전부는 대체 뭐야.
“야. 하여간 국가 안전부인지 뭔지 국가 기관을 사칭해가면서 조직적으로 5열 활동을 할 정도면 대단한 간첩 조직이야. 그렇지 않아?”
“암요. 이런 놈들은 처음이지라.”
국환은 손톱을 깨물었다.
뭔가 잘못됐다.
이 분위기는 그가 간첩이라고 단정 내리는 것 같았다.
국환은 급하게 형사에게 하소연했다.
“아니 국가 안전부란 조직을 만든 사람은 진짜 국가 기관 사람이라니까요. 안 그러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들을 모았겠어요.”
못 배운 국환도 그 정도 심증은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증이 없었다.
그리고 물증 없이는 형사들을 믿게 할 수 없었다.
아니 형사들은 믿을 생각이 없었다.
형사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한 명이 딱하다는 듯 국환에게 다가와 말해주었다.
“야. 이 친구야.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어.”
“네?”
“네 말이 사실이라도 그걸 믿어줄 사람은 없거든.”
“왜 왜 그렇죠?”
“네 말이 사실이면 보안사나 중정 작품이란 건데 우리 주제에 그걸 어떻게 파?”
국환은 그 말에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정말 이럴 순 없었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해서 얼마나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는데.
이날 한국에서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간첩 조직이 발각됐다.
이 대규모 5열 사건으로 한국 내 시위는 일거에 잠잠해졌다.
어디든 5열이 숨어 국가를 사보타주하고 있을 거란 의심에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기 바빴다.
혹시 오해를 사면 5열의 일원으로 몰릴 수 있단 생각이 사람들의 입과 행동을 조심하게 만들었다.
“사령관님. 국가 안전부 계획을 완료했습니다. 당분간은 세상이 조용할 겁니다.”
“그래 수고했군. 이건 수고한 애들 회식비로 써.”
보안사의 공작은 그렇게 소리없이 성공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보안사나 중정이 늘 주인공의 궂은 일만 해주는 거 같아서 그 본질을 보여주는 화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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