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9
한국의 국내 정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영독이 충돌했다.
“렌드리스는 전시 중립에 어긋난다! 멈춰!”
북극해를 통해 항진하던 영국의 호송선단을 독일 전함이 정면으로 가로막으면서 대치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대치는 양측 해군 병력이 출동해 1주일이나 신경전을 벌이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두체가 주사위를 굴렸다.
“이거 영국하고 독일이 신경전을 벌이는 틈에 영토를 확장해 보는 게 어떻겠나?”
그렇잖아도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에 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출병시켜 게릴라들과 생사를 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다들 두체의 생각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무솔리니의 생각은 단호했다.
“독일이 소련에서 좀 고전하고 있지만 끝내 승리할 게 뻔하다. 이런 전쟁에서 우리가 원하는 전리품을 얻으려면 미리미리 고기에 포크를 찔러둬야지.”
두체가 노린 타겟은 터키였다.
같은 추축국 그리스도 아니고 만만찮은 영국도 아니다.
그저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때 보장받았던 아나톨리아의 ‘미수복 영토’를 되찾으러 가는 것뿐이다.
두체는 나름 자신의 논리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두체! 그것만은 안 됩니다.”
터키가 비록 약체의 국가라 하나 근대화된 군대를 가진 나라였다.
26개 사단의 현역 사단을 무시하더라도 그 인구는 최소 200만의 가용 병력을 쥐어짤 수 있었다.
그걸 어떻게 제압한단 말인가.
“내 뜻은 정해졌네.”
두체는 냅다 터키에 명분작을 시작했다.
“우리 이탈리아는 세브르 조약(주:오스만 제국 분할을 약속한 조약)에서 보장받은 영토를 터키의 ‘불법적인’ 행위로 강탈당했다. 로마는 전승국으로서 흘린 피의 대가를 챙길 권리가 있다.”
물론 무솔리니가 이유도 없이 급발진한 건 아니었다.
두체가 조울증에 걸린 것도 아니고 미쳐서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정치인의 행동엔 나름의 논리와 이유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무솔리니 저놈 저거 유고에서 영토 확장했다고 큰소리치던데 유고 놈들 제압은 언제 할 거야.”
“저놈 저거 인제 끝났어.”
국민들은 끝없이 피만 흘리게 된 유고 점령에 더는 열광하지도 지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거기에 막대한 점령 비용과 1935년부터 누적된 군사비가 이탈리아 경제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두체로선 인기도 회복하고 따갚돼를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 상대가 터키였을 뿐이었다.
무솔리니의 명분작에 터키는 당황했다.
“아니 언제적 세브르 조약이야. 로잔 조약(주:터키 독립전쟁을 끝낸 종전 조약)에서 너희 권리는 다 포기했잖아.”
“그건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무솔리니가 급발진을 밟을 각을 보이자 히틀러도 당황했다.
“아니 터키는 장기적으로 우리 추축 동맹에 들여야.”
“총통 각하 잘 생각해. 나 무솔리니야. 오스트리아 병합 눈감아준 거 은혜 갚겠다고 한 말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나야 터키야.’의 양자택일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로마의 행동을 묵인하기로 했다.
전에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은혜를 갚는 셈 쳤다.
“총통 각하! 이건 말이 안 되는 짓거리입니다. 터키가 홀랑 넘어가는 걸 영국이 그냥 두고 보고 있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영국이 개입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 말을 하자 총통도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럼 안 되나? 영국 놈들은 소련에다 무기를 넣으면서 대놓고 우리 심기를 긁고 있어. 우리도 놈들에게 아니꼬운 짓 좀 할 수 있지.”
총통의 묵인 아래 1942년 6월 3일 이탈리아군은 터키를 침공했다.
이 충격적인 상황을 ‘설마’하며 지켜보던 영국은 충격을 받았다.
“이거 보세요! 추축국 놈들을 그냥 내 버려두니까 온 세상을 다 휘젓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대로 놈들이 하고 싶은 대로 뒀다간 지중해의 우리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겁니다.”
이탈리아의 행동을 ‘교정’해줄 것을 주장하는 처칠이 아니더라도 영국의 조야는 적잖은 자극을 받은 상태였다.
대영제국의 국익에 긴요한 보스포루스-다르다넬즈 해협을 특정 열강이 손에 쥐려 시도하는 것부터 거슬렸다.
그리고 터키는 그 자체로 전략적 요충지.
발칸과 중동에 동시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국가를 이탈리아가 손에 쥔다면 대영제국의 중동 영토까지 위협받을 건 자명했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수에즈 운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위협받아선 안 될 생명선이었다.
“이젠 우리도 단호해질 때입니다. 언제까지 지난 패배에 겁을 먹고 전전긍긍할 겁니까?”
“하지만 우린 독일과 조약을.”
“그 조약을 독일 놈들은 잘 지키고 있답니까!”
의회에선 그 어느 때보다 주전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칠은 이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강경론이 득세할 때 우리도 추축국을 끝장내는 대열에 합류해야 할 겁니다. 전승국에 끼어야 우리도 지분을 얻을 수 있잖습니까.”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도 처칠의 논리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일과 끝장을 보기 위해 전쟁을 재개하자는 얘기는 총리께서 절대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만만한 이탈리아를 자극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수로 말입니까?”
“잊으셨습니까? 우리는 소련에도 렌드리스를 보내는 중입니다.”
렌드리스!
앤서니 이든은 그 말에 머릿속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대영제국이 렌드리스를 대놓고 보내는 걸 무솔리니가 참을 수 있을까.
한번 시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영국인들이 이런 계산을 하거나 말거나 당장 이탈리아의 공격을 받은 터키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탈리아 하나도 부담스럽지만 상대의 전력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로마는 ‘추축국 동맹’의 일원이었다.
만에 하나 독일이나 발칸 국가들이 개입한다면?
무스타파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은 급한 대로 추축국에 맞설 동맹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각하. 추축국에 맞서 싸워줄 국가는 지구상에 딱 둘뿐입니다.”
한국과 소련.
이뇌뉘는 급한 대로 양국에 서한을 보냈다.
한국 총리 이성준은 터키의 구원 요청에 이런 답변을 보냈다.
“한국 정부는 터키 국민이 부당한 전쟁에 휩쓸렸음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터키에서 너무 멀고 도움을 줄 만큼 여력이 충분치도 않습니다. 부족하나마 약간의 자금을 보내며 귀국의 건승을 빌겠습니다.”
한국은 예의를 차리며 지원을 딱 거절했다.
하긴 한국은 중동과 별 상관이 없는 나라였다.
이뇌뉘는 모스크바를 보았다.
여긴 좀 고민이 많았다.
한국이야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 자본주의를 채택한 나라였지만 소련은 달랐다.
공산주의 국가는 이념적으로 터키와 상극이었다.
거기다 영토 분쟁까지 있었다.
외교적 화해를 했다곤 하지만 앙금은 남아 있었다.
모스크바는 앙카라가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려운 상대였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보단 낫잖은가.
‘아타튀르크께서 히틀러가 망할 거라 하셨다.’
히틀러가 망한다면 그 반대편에 선 소련의 승리가 명확하지 않은가.
전후의 질서를 생각해서라도 지금부터 소련에 숙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뇌뉘는 전쟁장관 알리 리자 아루룬칼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터키의 특사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몰로토프가 공항까지 나와 그를 영접했다.
“서기장 동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루룬칼은 스탈린을 만나자마자 터키의 사정을 설명하며 소련이 지원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물론 가능합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터키의 구원 요청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즈 해협을 통해 흑해로 들어와 설치는 추축국 해군을 어항 속의 물고기로 만들고 소련 해군이 지중해로 나아갈 길을 열 수 있는데 마다할 리가.
스탈린은 무척이나 친절한 태도로 아루룬칼을 대하면서 당장 10개 사단을 무장시킬 물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생사를 건 대전을 벌이면서도 엄청난 군수물자를 보내주겠다는 말에 아루룬칼은 경악했다.
아루룬칼은 독일의 심기를 건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소련과 손을 잡는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튿날 양국은 정식으로 국방 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전후 터키 영토 일부에 소련군의 주둔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 충격적인 조약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빨갱이들이 지중해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그 문을 누가 열어 주게 했는가.
이탈리아다.
이탈리아가 대영제국의 텃밭을 마음대로 헤집고 망쳐놓고 있다.
이놈들의 폭거를 그냥 두고 봐야 하는가.
터키로도 렌드리스를 보내자는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탈리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터키로 소총 한 정 탄환 한 발이라도 보내면 가만두지 않겠다.”
반파시스트 의용군의 개입으로 유고에서 한 번 피를 봤던 이탈리아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로마의 강도 높은 반발은 다시 영국의 강도 높은 반응을 이끌었다.
“해보시지!”
영국은 이탈리아의 터키 침공 2주 만에 렌드리스 선단을 띄웠다.
“감히! 감히!”
두체는 분노했지만 이 선단을 감히 막을 용기를 내진 못했다.
영국인들에 맞서려면 히틀러의 지원이 절실했다.
무솔리니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히틀러에게 다가갔다.
“총통. 우리 이탈리아는 독일의 지지와 지원이 필요합니다.”
인제 와서 또?
일은 이탈리아가 저지르고 수습은 독일이 해야 하는 모양새였다.
그렇잖아도 동부 전선에 집중하기도 바쁜 히틀러는 이 요구를 물리쳤다.
“그건 로마에서 알아서 하시오.”
그런데 의사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다.
무솔리니는 알아서 하라는 히틀러의 말을 이탈리아의 행동을 지지해주겠다는 백지 위임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야 무서울 게 없지.”
이탈리아는 전력으로 영국에 맞설 것을 결심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시 이야기를 가볍게 해줄 두체 타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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