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4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서기장은 이성준이와 사전 협상을 통해 많은 것을 약속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다.
빨갱이가 왜 빨갱이겠는가.
내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남의 것까지 공유하려 드니 빨갱이인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독일군 주력을 상대하는 건 순전히 우리인데 한국과 영국이 너무 많은 걸 가져가려는 것 같군.”
물론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스탈린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다.
“코바 그래도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네. 우리가 쓰는 군수 물자의 상당량을 그들이 공급해주고 있지 않나.”
“그걸 고려해서 이 정도로 말하는 거야. 어쨌거나 그 친구들도 가져갈 몫에 맞는 활약을 해줘야지.”
스탈린은 가까운 시일 내에 서부에 제2전선을 열 것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소련 혼자 독일군의 주력을 떠안는 상황은 불공평했다.
보로실로프는 헛웃음을 지었다.
“영국은 당장 개막된 아프리카와 중동 전선을 신경쓰기도 벅차지 않나. 사정이 좀 나은 한국도 중국 전쟁이 급할 거고. 그자들이 서부에 전선을 열어주려면 못해도 2년은 필요할 거야.”
“그게 불공평하단 말일세. 누구는 힘이 덜 들어서 독일군을 전부 맡고 있나?”
“그러니 이야기만 해두세.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걸 요구해봐야 그자들이 들어줄 리가 없잖나.”
스탈린도 보로실로프의 조언을 물리치지 못했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몰로토프는 3상 회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분명히 했다.
“동부 전선에 집중된 막강한 독일군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라도 1943년까지 서부에 제2전선을 열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연합의 공평한 부담을 위해서라도 지금처럼 소련이 단독으로 독일을 상대하는 구도는 곤란합니다.”
물론 처칠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 누가 스탈린보고 히틀러 옆에 이사가라고 칼 들고 협박했나?
폴란드를 없애고 이웃집이 된 건 소련 빨갱이들의 선택 아니었나?
자기들이 히틀러랑 손 잡고 유럽의 민주 국가들을 다 쳐부술 기회를 줘 놓고 뭔 소리래.
처칠은 빨갱이들이 양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1차 목표는 이탈리아입니다. 로마를 쓰러트려 200만 이탈리아군을 전열에서 이탈시켜줄 테니 서부 전선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그러니 빨갱이들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한국도 여력이 없습니다. 43년까지 2전선을 여는 건 우리 역량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한은 중국을 상대하는데 육군력의 대부분을 투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시경도 영국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사안에 따라 이익이 된다면 한국은 언제라도 영국의 손을 들어줄 준비가 돼 있었다.
“아니 그럼 우리 혼자 독일을 계속 감당하란 말입니까?”
몰로토프가 펄쩍 뛰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서가 아니라 서기장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제스처였다.
“대신 지중해에 함대를 넣고 아프리카의 추축군을 괴멸시켜드리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봐야 피 몇 방울 흘리는 일이잖습니까.”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서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기에 마치 벽을 보고 대화하는 듯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던 그때 이성준이 나섰다.
“2전선을 바로 여는 게 어렵긴 하지만 꼭 서부에 열란 법은 없잖습니까.”
이성준은 이탈리아 혹은 그리스에 제2전선을 여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다.
주시경은 이성준의 제안을 3상 회의의 참석자들에게 전했다.
“제2전선을 지중해 연안에서 연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작전을 펴길 원하던 영국도 여기에 구미가 당겼다.
아니 딱 그들의 취향에 맞았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봄직하지.”
대영제국의 관심사는 프랑스보다는 지중해 연안에 있었다.
영국과 한국이 43년에 지중해에서 2전선을 열 의지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몰로토프는 그나마 체면은 세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한국과 영국이 43년에 움직여준다는 건 양보입니다 서기장 동지.”
몰로토프의 보고에 스탈린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서방 연합국의 주력인 영국은 지상군이 충분치 않았고 한국은 여력이 부족했다.
그런 그들이 지중해에 2전선을 열어주겠다는 것만 해도 큰 성의였다.
“그 친구들의 지중해 전략이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군.”
서기장은 솔직히 프랑스가 아니면 소련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를 전열에서 이탈시켜봐야 독일 전력에 얼마나 마이너스가 나겠는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군.”
어쨌든 전선이 열리면 독일군 전력이 빠지긴 할 테니 그걸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3상 회의의 가장 큰 난제가 해결되자 나머지 합의는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추축에 대응하는 3원칙도 어렵잖게 합의됐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되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에 대한 처분이었다.
“폴란드는 반드시 전쟁 이전의 국가로 복귀해야 합니다.”
이성준은 암묵적으로 소련이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다는 자세를 취했지만 영국의 입장은 달랐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는 대로 망명 정부들이 본국으로 귀환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스탈린은 영국의 구상에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절대 그럴 수 없지. 폴란드는 우리 위성국으로 확보해야 돼. 폴란드는 우리가 정당하게 받아낼 전리품이야!’
스탈린은 두 번 다시 본토가 침공받지 않을 수 있도록 동유럽에 충분한 완충지대를 얻길 원했다.
지금까지 반복된 역사만 봐도 서방 침략자들은 별다른 지리적 장애물이 없는 동유럽 평원을 아주 쉽게 넘어 모스크바까지 와서 러시아 국가의 존망을 위협했다.
폴란드와 스웨덴의 영주들이 프랑스 황제가 독일의 카이저와 총통이 반복해서 같은 교훈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 같은 악몽은 끝내야 했다.
그러려면 폴란드를 소비에트 제국의 일부로 만들고 독일을 찢어발겨야 했다.
체코를 삼켜야 했다.
동유럽을 소련의 안마당으로 만들어야 했다.
사실 스탈린이 품은 완충지대에 대한 강박관념은 옛 차르 제국의 군주들 또한 품어왔던 것이었다.
스탈린이 유별나게 땅 욕심이 많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이것은 러시아의 지배자 자리에 앉게 되면 반드시 앓게 되는 병이었다.
물론 이런 의문이 들 순 있을 것이다.
소련의 욕망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 폴란드의 주권이나 인민의 의사가 침해되는 건 좀 문제지 않냐고.
스탈린에겐 전혀 상관없었다.
그딴 걸 고려했다면 카틴 숲에서 폴란드 지식인들의 씨를 말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은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의사 교수 장교 교사 하여튼 폴란드 민족을 이끌 만한 사람들은 죄다 카틴 숲의 음침한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서기장이 특별히 냉혹한 건 아니었다.
처칠도 루스벨트도 필요에 따라 약소국의 이해와 주권을 얼마든지 짓밟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스탈린은 남을 짓밟으며 미안한 시늉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뿐이었다.
“베리야 동무.”
“예 서기장 동지.”
“폴란드 노동자당 친구들 지금부터 철저히 관리하도록 해. 폴란드 민족주의 성향이 있거나 좀 삐딱한 발언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조용히 없애두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철저히 확인하겠습니다.”
서기장의 지시는 명확했다.
폴란드 위성정권 수립 과정에 잡음을 낼 만한 장애물들을 미리 없애두란 것이다.
폴란드 노동자당을 철저한 괴뢰로 만들어야 위성국가화의 첫 단계가 완성된다.
“체코 공산당 친구들도 머리로 세울 만한 친구가 있으면 슬슬 명단 준비하도록 해. 적당히 우리 말이 통할 만한 친구로 말이야.”
“예 서기장 동지.”
스탈린은 전후 중유럽에서 힘이 닿는 만큼 세력을 확장할 생각이었다.
‘우리가 삼킬 수 있는 건 전부 전부 삼킨다.’
서기장은 양심 없는 빨갱이답게 영국과 한국이 제안한 것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할 준비를 지금부터 갖춰나갈 계획이었다.
폴란드 체코 독일의 절반.
그 정도만 얻어도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에서 적수가 없는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서구의 견제였다.
소련이 지나치게 거대해지면 서방도 지금처럼 관용적인 태도로 모스크바를 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독일이 그런 것처럼 연방이 새로운 공공의 적이 되겠지.
하지만 견제가 두렵다고 성장의 기회를 저버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운이 좋아.’
처음엔 독일이 공적이 되어 한국의 팽창이 견제받는 걸 막아줬고 그 다음은 소련이 나서줄 예정이었다.
이렇게 순조롭게 열강 서열을 올릴 기회를 얻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하나 있긴 하군.’
미국.
경쟁자가 없는 신대륙에 홀로 떨어져 마음껏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증가시킨 세계 제1의 경제대국.
장차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큰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자유 민주주의의 아버지.
그 거대한 제국과 늙은 사자 영국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걸 생각하면 소련도 그에 맞설 친구가 필요했다.
그 상대는 국력으로 보나 대소 관계로 보나 한국밖에 없었다.
이념적으로 그토록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를 신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는 게 우스꽝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보면 영국 측 이야기는 무시해도 이성준이 의견은 들어줄 수밖에 없겠군.’
대한 관계를 고려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한국 측이 제시한 구상을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폴란드는 무조건 삼킬 생각이었다.
그것만은 서기장도 양보할 수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소련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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