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 (4) >
광활한 숲을 둘러보던 권기택 감독이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날씨는 푹푹 찌고 습도는 촉촉하니 기분 나쁜 게 딱 마음에 드는군.’
직접 만들어낸 ‘실종의 섬’이다 권기택 감독은 눈만 감으면 ‘실종의 섬’의 세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런 권기택 감독이 몸을 뒤로 돌렸고 몇 걸은 떨어진 곳에서 소형 카메라로 주변을 찍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촬영 감독이었다.
“여기 어떤 것 같아? 김일병 목 떨어지는 곳으로.”
‘김일병 역’의 이름이 나온다는 건 이 장소가 매우 중요함을 뜻했다. 김일병은 ‘실종의 섬’의 사건 시작을 알리는 역할이니까.
어쨌든.
“어후 드럽게 덥네.”
소형 카메라를 내린 촬영 감독이 땀을 닦으면서도 ‘실종의 섬’ 중 ‘김일병 역’을 상기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고.
“좋습니다. 거의 흡사하네요 그림이. 특히 여기 냄새가. 이게 대체 뭔 냄새람? 어디 시체라도 숨겨진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따위의 대답을 한 사파리 모자를 잠깐 벗은 권기택 감독이 쪼그려 앉아 바닥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바닥이 질퍽질퍽했다.
따라서 권기택 감독의 손가락이 바닥에 푹푹 들어간다. 이내 손가락을 빼낸 그가 묻은 것을 대충 허벅지에 닦아 내며 고개를 올렸다.
“김일병 목 떨어지는 건 밑에서 위로 치는 게 좋겠어 머리통 제작할 때 좀 무겁게 하라고 해. 바닥에 떨어졌을 때 움푹 들어가면 재밌겠어.”
대답은 뒤쪽 더위에 헉헉대던 조감독이 했다.
“옙! 알겠습니다.”
이렇듯 권기택 감독을 포함해 ‘실종의 섬’ 팀이 베트남에 나와 있는 이유는 심플했다. 해외 로케 촬영 관련해서 장소 헌팅을 나온 것.
다만 예정에 있던 스케줄은 아니었다.
원랜 세트장에서 촬영할 예정이었으나 막상 완성된 세트장을 본 권기택 감독이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세트 반 해외 로케 반 촬영으로. 감독의 생각이 바뀌는 일은 너무나도 빈번한 일. 뒤로 권기택 감독이 뱉은 말은 하나였다.
‘베트남에 박PD 좀 연락해봐.’
전작에도 같이 했던 라인 PD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실종의 섬’ 팀은 재빨리 짐을 꾸려 베트남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벌써 이틀째. 덕분에 4월쯤 시작된 프리프로덕션의 일정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막바지.
이쯤.
“박 PD.”
사파리 모자를 다시 쓴 권기택 감독이 땀을 닦으며 라인 PD에게 나긋나긋 물었다.
“여기도 리스트업하지. 앞으로 몇 곳이나 남았어요?”
“다섯 곳 정도?”
“전체 일정은?”
“오늘 내일 장소헌팅 그리고 현지 스탭 미팅 건만 정리되면 됩니다. 3일이면 되지 싶어요.”
“다 합쳐서 3일 맞지?”
“네 감독님.”
천천히 고개 끄덕인 권기택 감독이 풍경 사진 찍기 바쁜 기획팀 실장을 불렀다.
“류실장!”
“아! 예! 감독님! 죄송합니다 하하. 딸이 사진 보내달라고 하도 성화라.”
“편하게 보내 것보다 며칠 뒤 한국 들어가면 바로 세트장부터 확인하는 스케줄 잡으라고. 예상 대본리딩날이 언제라고 했지?”
“베트남 로케 건 때문에 좀 넉넉하게 잡았었습니다.”
“생각보다 베트남 문제가 빨리 끝났으니까 ’대본리딩‘ 좀 당기자고.”
잠시간 날짜를 가늠하던 권기택 감독이 다시금 입을 열었고.
“8월 3일은 어떨 것 같아? 너무 빠른가?”
챙겨온 다이어리를 확인한 기획팀 실장이 괜찮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2주. 아니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은 권기택 감독이 다시금 울창한 숲에 시선을 돌리며.
“그럼 대본리딩은 그날로 확정하고.”
잔잔히 읊조렸다.
“한국 들어가는 대로 배우들한테 연락 돌려요.“
이틀 뒤 24일 늦은 점심.
수십 ‘남사친’ 팀은 고등학교의 본간 뒤쪽 약간 외진 곳에서 세팅을 서두르고 있었다. 레일을 깔고 조명을 세우고 주변에 소품을 배치한다. 작은 창고와 여러 쓰레기가 모인 곳.
오늘 여기선 약간의 고구마 컷과 한인호의 성격을 강조할 씬을 찍을 예정.
극 중으론 2학년에 오른 ‘이보민’을 마음에 안 들어하는 일진들이 등장한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저 이보민이 예뻐서. 꼬투리를 잡으려면 뭔들 없을까. 그렇기에 일진 멤버 중 한 여자가 이상한 소문을 내며 이보민을 괴롭힌다.
그러나 워낙에 낙천적인 이보민은 당당했다 수그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거기다 그녀에겐 한인호가 있기도 했다. 다 등을 돌려도 한인호만 있으면 버틸 수 있었다. 다만 일진들은 아무렇지 않은 이보민을 가만두지 않았다. 별 타격이 없으니 이젠 대놓고 괴롭혀 줘야지.
덕분일까?
“‘일진’ 모이시랍니다!!”
‘일진’ 단역 배우들이 카메라 앞쪽에 섰다. 수는 다섯 명. 여자 셋에 남자 둘. 모두 교복을 입고 있긴 했다만 일반 학생들과는 풍기는 아우라가 확실히 달랐다. 몸에 딱 붙거나 단추를 풀어헤치거나.
어떻게든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상에 담았다.
그런 단역 배우들은 보출(보조출연)과는 달랐다. 모두 대사가 있고 소속사도 있었다. 뭐가 됐든 카메라에 선 그들을 모니터로 보던 신동춘 감독이 아쉬운 한숨을 뱉었다.
“흠- 좀 아쉬운데.”
그러자 그의 옆에 선 조연출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대본 볼 땐 몰랐는데 막상 세워놓고 보니까 뭐랄까-”
말끝을 흐린 신동춘 감독이 카메라 너머 단역배우 다섯에게 시선을 맞췄다.
“볼륨이 좀 약한 느낌. 첫 고구마 씬인데 심심하지 않아요?”
“전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아니야. 딱 보자마자 으- 거리는 과함이 있는 게 낫거든 이런 컷은. 그래야 먹는 고구마가 퍽퍽해지고 이어진 사이다가 시원하죠.”
“따로 생각이 있으세요?”
“음···”
사각턱 신동춘 감독이 의자에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본다. 뛰어다니는 수십 스탭들을 훑은 것.
“같이 좀 찾아보죠. 마스크가 좀 ‘일진’스럽고 덩치도 컸으면 좋겠는데.”
“설마 단역 추가하시려고요?”
“그렇지.”
“가 갑자기 현장에서 구하는 건 좀! 이 일진 역들이 단역 중에선 나름 비중이 있지 않습니까? 다들 대사도 있고 카메라 원샷도 받고. 그래서 오디션을 통한 거 아니었습니까?”
“뭐 괜찮아요.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되니까.”
“그래도 표정 연기라는 것도 있고.”
조연출이 말리는 느낌이지만 신동춘 감독은 별수롭지 않게 현장을 훑는다. 하지만 이렇다 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뭣보다 연령대가 맞지 않는다. 고등학생 일진인데 다들 고생해서인지 얼굴이 팍팍했다.
곧 아쉬움에 턱을 긁은 신동춘 감독.
‘한인호가 멋있게 나올 역이라 가능하면 씬 볼륨을 키우고 싶은데···쯧 별수없이 아쉬운 대로 가야 되나?’
그때였다.
“감독님.”
신동춘 감독의 뒤쪽에서 낮은 남자 목소리가 끼었다. 돌아보니 교복 입은 강우진이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웃음을 띤 신동춘 감독이 바로 훅 일어났다.
“어어어 우진씨. 메이크업 끝난 건가?”
“네 그보다 우연히 들었습니다만.”
“음?”
“혹시 일진 역으로 추가를 원하시는 겁니까?”
“아아- 뭐 지금도 충분하긴 한데 좀 더 과했으면 좋겠다하는 거죠. 욕심이지 욕심. 근데 그냥 아쉬운 대로 가는 게 좋겠어요.”
“···”
말없이 신동춘 감독을 응시하던 우진이 몸을 반쯤 비켜서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럼 우리 매니저님은 어떠십니까?”
“···매니저? 누구?”
우진이 가리키는 곳엔 우람한 남자가 서 있다. 강우진은 담담하게 김대영을 소개했다.
“김대영씨요.”
순간 두 눈이 디립다 커진 김대영.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이 강우진을 향한다. 그는 눈빛으로 욕했다.
‘뭐 뭔 짓인데 또라이야!!’
당연히 강우진에겐 1도 타격이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김대영의 시선을 무시한 우진이 신동춘 감독에게 다시 말했다.
“꽤 오랫동안 연기 동호회에 있었답니다 연기 경험은 있는 것 같습니다.”
강우진은 김대영이 과거 언제가 말했던 그의 꿈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야 김대영. 넌 근데 연기 왜 하는 거? 재밌냐?’
‘재밌지. 언젠가는 꼭 카메라 앞에 서보고는 싶어.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 말고 단역으로. 대사도 있으면 감지덕지고. 꿈이다 그게.’
‘단역이라- 그 정도면 쉬운 거야? 아니면 어렵냐? 난 뭐 그쪽 연예계는 개뿔 모르니까.’
‘존나게 어렵다. 그러니까 꿈이고.’
‘새끼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풀악셀 한 번 밟아봐야지. 들이받아 봐.’
‘내 대가리만 깨질걸? 크크 됐고 술이나 빨자.’
그것을 이뤄주려는 것. 억지도 아니고 상황상 자연스럽기도 했다. 문제 될 것도 없고 김대영이나 신동춘 감독 둘 다 윈윈.
‘뭐 감독님이 별로라면 말짱 꽝이지만.’
강우진이 덤덤하게 설명을 추가했다.
“보시면 알겠지만 피지컬도 좋습니다 어떠십니까?”
되물음에 신동춘 감독이 턱을 쓸다가.
-스윽.
당황한 김대영의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곧 김대영을 가늠하는 신동춘 감독. 조금 삭긴 했지만 저런 건 메이크업으로 커버될 정도.
‘그래도 여기 있는 스탭들보다는 마스크가 괜찮아 억지로 집어넣은 티는 안 나. 덩치가 좋아서 씬 볼륨이 확 커지겠어. 연기 동호회였으면 경험도 있을 테고.’
나쁘지 않다 생각한 신동춘 감독이 김대영에게 물었고.
“할 수 있겠어요? 확정은 아니에요. 테스트로 몇 컷 정돈 찍어봐야 되긴 해. 어때? 해볼래요?”
“···”
잠시 이게 현실 맞나? 싶은 얼굴로 멍타던 김대영이.
-스으.
앞에 선 무표정 강우진 얼굴을 보다가 울컥한 마음을 빌어 어렵사리 답했다.
“할 수···있습니다 감독님.”
우람한 김대영의 눈가가 약간 촉촉해졌다. 그 모습을 힐끔한 강우진.
‘우는 거냐 설마? 가만 보면 덩치는 1등으로 큰 새끼가 제일 말랑말랑하다니까.’
속으로 웃은 우진이 티 안 나게 김대영의 옆구리를 찔렀고 움찔한 김대영이 오른쪽에 선 강우진을 봤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앞의 사각턱 신동춘 감독에게 우렁차게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이때야 입가에 미소가 번진 신동춘 감독이 김대영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오케이 보자- 그럼 일단 의상부터 어떻게 해봐야겠네.”
곧 신동춘 감독이 주변 스탭들에게 물었다.
“우리 교복 의상 제일 큰 사이즈가 뭐야?”
이 시각 일본.
일본의 연예계에선 약 일주일 전 넷플렉스에 런칭한 ‘프로파일러 한량’ 얘기가 많이 돌았다. 언론 쪽이나 각종 제작사나 에이전시 그리고 배우들 등등.
특히나 일본 배우들 사이로 한량은 퍽 많이 오르내렸다.
“요즘 한국 거 한량? 그거 시끄럽던데? 아직도 넷플렉스 1윈가?”
“그냥 런칭 첫 주라 시끄러운 거지. 과거에도 그런 한국 드라마 많았잖아?”
“하긴. 런칭 첫 주에나 좀 유난이고 시간 지나면 순위에서 떨어지긴 하더라.”
“금방 잠잠해질걸?”
반응은 반반이었다. 아니 더 깊숙이 들어가면 부정적인 시각이 좀 더 크긴 했다. 한량이 잘 될수록 한류의 힘이 거세지는 거니까.
그러나 일본 내에서 한량의 인기는 굳건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일본 대중들 사이로 가파른 입소문이 퍼졌다. 런칭과 함께 1위를 차지한 한량은 저 꼭대기에서 흔들림 없이 요지부동. 심상치 않다. 반짝 런칭빨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도 그럴 게.
『넷플렉스 1위 차지한 한국 드라마「프로파일러 한량」인기 치솟는다』
일본 쪽 언론에서도 한량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으니까. 일본의 젊은 층을 넘어 다양한 연령대에서 큰 반응이 오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에.
『한국식 추리극 「프로파일러 한량」SNS 등으로 입소문 빠르게 확산』
이미 꽤 많은 K드라마가 일본에 상륙했지만 한량은 그 어떤 것들보다 강력할 기미가 보였다. 당장에 SNS나 여러 커뮤니티만 봐도 그랬다.
심지어 며칠 전 일본의 한 예능에서도 언급될 정도.
“아아 혹시 한량 보신 분? 저 어제 그거 보다가 밤새울 뻔했는데.”
“저 봤어요! 박대리 사랑해!”
“미코짱이 뭘 좀 아시네? 나도 박대리 사랑해!”
상황이 이쯤 되면 거장 쿄타로 감독이 모를 수가 없었다. 현재 배우 캐스팅이 한창인 쿄타로 감독은 한량의 상승세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이러다 우리 영화 개봉하기도 전에 일본에서의 인지도가 높아지겠어.”
강우진을 향한 평가였다.
그리고 이쯤 일본의 한 유명 토크쇼 팀 미팅에서도 ‘프로파일러 한량’의 얘기가 나왔다. 이들은 한창 아이템 선정 중이었고.
“다음 해외 특집 편에선 뭘 다루면 좋겠어요?”
“저번 헐리웃 편은 좀 반응이 약했습니다. 게스트 없이 자료들만으로 진행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저- 이번엔 ‘K드라마 위크’로 잡으면 어떠십니까? 요즘 넷플렉스의 ‘프로파일러 한량’ 시끄럽던데. 대중들 사이로 입소문도 빠르고요.”
“아 그 드라마? 나도 기사 몇 개 보긴 했어요. 음 기세가 확 눈에 띄는 수준이긴 하지. 근데 거기 나온 탑들은 너무 비싼데?”
“주연들 말고 빌런들을 초대해보면 어떻습니까?”
나름 신박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한량의 빌런들만?”< 벚꽃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