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국 (1) >
‘얼어죽는 연애’의 리딩장.
배우들 스탭들 관계자들 기자들까지. 리딩장에 모인 사람만 수십 명임에도 뭐랄까 리딩장은 대체로 고요했다.
“···”
“···”
미리 도착한 배우들은 대본을 들여다봤으며 스탭들이나 관계자들은 각자 할 일을 한다. 기자들은 핸드폰을 내려다봤고.
다만 그들의 공통점은.
-스윽.
아닌척하며 몇 분 전에 도착한 신인 배우를 힐끔대고 있다는 것. 대본을 보면서 핸드폰을 보면서 슬쩍슬쩍 눈알을 굴린다. ㄷ자형 책상 거의 끝쪽에 앉은 강우진이었다.
-[옆집 묘한 남자 역/ 강우진님]
역할은 조·단역에 가깝기에 자리는 뒤쪽이었다. 어쨌든 이미 전체적으로 인사는 끝난 뒤였기에 자기 자리에 앉은 우진은 무심한 얼굴로 대본을 내려보고 있었다. 주변에 관해 일말의 신경도 안 쓴다는 냄새가 풀풀 풍겼다.
이내 배우들이나.
“우진씨 되게 무겁네요 뭔가 성격이. 소문을 듣긴 했는데 상상보다 더 시니컬하네.”
“내 말이. 아까 일일이 인사하는 걸 봐선 콧대가 높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지? 원래 좀 숫기가 없는 편인가?”
“좀- 친해지긴 어려운 타입인 건 확실해요.”
“근데 워낙 신인 때부터 블록버스터급 행보를 보여서 그런가? 긴장 뭐 그런 건 아예 느껴지지도 않네요?”
“그럴만하지. 자기 혼자 국내부터 일본까지 뒤집어 놨는데 이런 리딩장이 떨리겠어?”
기자들의 수군거림이 번진다.
“담담하네 저 친구. 한국이나 일본에 핵폭탄 터트려놓고.”
“희한해. 아우라만 보면 그냥 탑급 베테랑이야 신인 중에 저런 애는 또 처음이네.”
“쟤랑 관련된 건 대체로 최초잖어. 하도 차분해서 인터뷰도 못 땄네. 다가가기가 좀 쉽지가 않아 원래 신인하면 말랑한 맛이 좀 있어야 된디 쟤는 너무 딱딱해 나만 그런가?”
“나도. 과연 보통의 신인들이랑은 다르다 이건가? 저 봐봐 오자마자 올곧은 표정으로 대본부터 보는구만.”
“그 권기택 감독 현장도 넘나드는 놈인데 이 정도 사이즈 리딩이 뭐 떨리기야 하겠어?”
“응? 이봐 여기도 그 이월선 작가 현장이라고?”
“아니 그러니까 말이 그렇다고 말이.”
반면 강우진은 현재 홀로 심장 소리와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으- 진짜. 이 적막한 분위기는 적응이 힘들어. 다들 힐끔대는 거 티 난다고요 아 몰라. 무시하자 무시.’
긴장감보다는 어색함이 더 컸다. 이 리딩장엔 아는 사람이 진짜 1도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우진에게 아는 사람이 없는 대본리딩장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그나마 붙어 있던 최성건도 없고 이월선 작가도 보이지 않는다.
‘뭐 이월선 작가는 없는 게 더 편할지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렇기 때문일까? 강우진의 컨셉질이 더 짙어진다. 포커페이스가 가중 된다. 그러다 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선지.
-푹!
강우진이 ‘얼어죽는 연애’ 1화 대본에 붙은 검은 사각형을 찔렀다. 금세 우진은 끝없이 컴컴한 아공간으로 진입했다. 이때야 편함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는 그.
“푸후- 살겠네. 여기서 좀만 쉬자 리딩장 분위기 개텁텁하네.”
스트레칭을 해보는 강우진.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우진이 됐다 싶었는지 주르륵 나열된 흰 사각형 앞으로 움직였다. 리딩도 코 앞이고 직전에 리딩(경험)을 해볼 작정이었다.
당연히 그가 선택한 것은 ‘옆집 묘한 남자’.
평범치는 않은 역이었다. 더더욱 선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에 리딩(경험)을 반복하는 것은 당연한 조건이었다.
이내.
-스으.
[“‘P:옆집 묘한 남자’ 리딩 준비 중···”]
익숙한 로봇 같은 여자 음성을 끝으로 우진이 ‘옆집 묘한 남자’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로.
다시 강우진이 현실. 즉 ‘얼어죽는 연애’의 대본리딩장으로 돌아왔을 땐.
“···”
왜인지 입을 열기가 힘든 감각이었다. 아니 입을 열 순 있겠지만 음성을 뱉기가 어렵다. 뇌에서 지시는 내리지만 몸이 거부하고 있다. 이미 각인된 ‘옆집 묘한 남자’의 모든 것이 부피를 키웠기 때문이었다.
‘···처연하다.’
잠시 눈을 감은 강우진은 혈관을 타고 번지는 지금의 감정을 소화한다. 이해하고 생각한다. ‘옆집 묘한 남자’의 세상이 넓어진다. 그리고.
‘수어 수어가 잘 보여.’
머릿속에 수어(수화)가 가득해졌다. 이미 통달한 수어지만 반복된 리딩(경험)에 더욱이 심화된다. 더불어 강우진은 느꼈다.
얼굴 근육이 매우 유연해졌다는 것을.
목소리는 봉쇄됐지만 촉각과 후각이 예민해졌고 온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아니다. 가벼운 것이 아니라 부드럽다. 마치 몸 전체가 딱딱한 고체에서 말랑한 액체가 된 기분이었다.
당연했다 ‘옆집 묘한 남자’는 수어를 위해 몸을 자주 써야 했으니까.
이때였다.
“안녕하세요-”
리딩의 시작이 도래함에 따라 주·조연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들 평범하게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띠며 인사해댄다.
그러다가도.
“이야- 우진씨? 반가워요. 하하 이번 일본 쪽 쿄타로 감독님 건은 진짜 놀랐어요.”
입구 쪽 자리의 강우진에게 달라붙는다. 거의 모든 배우가 그랬다. 눈들은 죄다 웃고 있다. 허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각양각색의 감정이 내포돼있었다. 감탄 또는 질투 시기 경외 의아 신기함 의문 기쁨 등등등.
그중.
‘얘가 그···강우진. 확실히 신인 재질은 아닌 듯한데 대체 얘한테 뭐가 있기에?’
방금 강우진과 악수한 뒤 첫 번째 자리로 이동하는 배우는 ‘의아함’이 짙었다. ‘얼어죽는 연애’의 남주 ‘송태형’역을 맡은 탑배우 정장환이었다. 모자 쓴 정장환은 키가 매우 컸다. 그리고 선이 짙어서 남자답게 생긴 비주얼.
이미지는 강우진과 흡사했다. 허나 나이는 우진보다 10살이나 많다.
정장환은 일명 ‘영화에서 안 먹히는’ 배우였다. 그런 배우가 있다. 드라마에선 빵빵 터지는데 영화만 가면 죽 쓰는. 정장환이 딱 그랬다. 그래도 드라마 판에서는 전설급으로 훨훨 나는 건 확실했다. 탑급 배우인 것도 모두 인정한다. 물론 연기도 수준급이고.
그러니 이월선 작가가 캐스팅했겠지.
어쨌든 정장환은 대본을 펼친 뒤 도착한 주변 배우들과 스스럼없는 대화를 하는 척하며.
-슥.
강우진에게 눈길을 던졌다. 어느새 리딩장은 많은 배우들이 도착해 시끌벅적해졌지만 우진은 처음 모습 그대로 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배우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축하나 질문이 던져졌지만 의연함을 유지했다. 민망해한다거나 기뻐한다거나 건방진 것조차 존재치 않았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애가 물결이 없어.’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슬슬 정장환은 심히 강우진이 궁금했다.
그가 본 강우진의 연기는 딱 두 가지였다. ‘김류진’과 ‘박대리’. 정장환 말고도 이 리딩장에 있는 모두는 비슷할 것이었다. 두 작품 모두 대박이 났고 거기서 우진이 보여준 연기는 터무니없는 건 맞다. 신인이 넘나들 사이즈가 아니다.
‘연기를 잘하는 건 알아 그래도 권감독님이나 쿄타로 감독이 반할 정돈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얼어죽는 연애’의 이월선 작가나 송만우 PD 그리고 박은미 작가 등. 왜? 어째서 저 신인 주변엔 이리도 거물들이 부대끼는가? 정장환은 묘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저 단단한 모습에 충격을 주면 어떻게 되려나? 그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떤 연기가 나올까.’
이유야 간단했다. ‘얼어죽는 연애’에서 강우진이 유일하게 붙는 배우는 정장환뿐이었으니까.
‘···리딩 또는 현장에서 애드립을 받아 봤으려나?’
우진이 맡은 ‘옆집 묘한 남자’ 역은 분량은 짧지만 연기적인 농도는 ‘얼어죽는 연애’에서 가장 짙었다.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높다. 최소 남주인 정장환의 생각에선 그랬다.
‘수어는 보통의 언어가 아니야 배운다고 한들 부자연스럽지 않게 해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할 거고.’
즉 잘해야 본전이며 애매하면 무조건 욕을 들어먹을 배역. 심지어 와중에 표현까지 들어가야 했다. 대사는 없지만 없어도 대사처럼 보여야 하는 중압감. 그 빌어먹게 어려운 존재를 저 신인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한창 정장환의 관심이 강우진에게 쏠려 있을 때였다.
-끼이.
닫혔던 유리문이 열리며 배우들로 꽉 찬 리딩장으로 연출 PD와 이월선 작가가 들어섰다. 이월선 작가 옆엔 정장 차림의 여자도 함께였다. 곧 배우들부터 스탭들 등이 자리서 일어났다.
PD와 이월선 작가가 여유로운 인사를 뱉는다.
그러다.
“우진씨 오랜만에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번쩍이는 귀걸이가 눈에 띄는 이월선 작가가 강우진 앞에서 멈췄다.
“안 본 사이에 큰일을 냈던데?”
“어쩌다 보니.”
“응 축하는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 이분은 수어 전문가분.”
이월선 작가가 같이 온 정장 차림의 여자를 소개했다. 아마 수어 통역가인 모양. 현장에 전문가가 참관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는 일은 오류를 확인하여 조언하는 것. 이에 강우진의 심장이 약간 두근댔다.
‘전문가- 와 씨 약간 떨리네? 그래도 뭐 아공간은 개사기니까.’
이어 수어 전문가와 우진의 간단한 인사.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한량 되게 재미있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그 뒤를 이월선 작가가 붙잡았다. 미소지은 그녀가 우진에게 물은 것.
“박은미 작가가 그러던데요? 우진씨가 대본리딩에 참석하면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음 뭐 직접 보면 알게 되려나?”
여기서 배우들의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월선 작가는 수어 전문가와 함께 책상 상석으로 움직였고.
-드륵.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연출 PD가.
“자- 그럼 리딩 시작해봅시다.”
‘얼어죽는 연애’의 대본리딩의 진행을 맡았다. 와중 이월선 작가가 오른쪽 자리 수어 전문가에게 작게 질문했다.
“강우진씨 보니까 어때요? 그냥 인상만 보고 말씀해주셔도 돼요. 괴리가 있을까?”
“···당장은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네요. 다만 수어라는 건 손 표정 몸짓 전부가 합쳐진 언어거든요? 감정을 보여야 하니까. 근데 우진씨는···뭐랄까 포커페이스가 심해서 표정이 없는 느낌이 있어요.”
“얼굴부터가 오류라는?”
수어 전문가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근데 지금 상태로 하시면 문제긴 해요.”
잠시 뒤.
‘얼어죽는 연애’의 배우들 소개가 시작됐다. 여주에 이어 남주 정장환이 일어났다.
“‘송태형’역을 맡은 정장환입니다 다들 열심히 준비한 만큼 만족할 작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쏟아지는 박수. 뒤로 계속되는 소개. 그리고.
-드륵.
“‘옆집 묘한 남자’ 역을 맡은 강우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우진의 임팩트 있는 소개. 박수는 똑같이 나오지만 배우들의 시선엔 오묘함이 붙었다. 배우 소개로 한 바퀴를 돈 뒤엔 키스탭들의 인사가 이어졌고.
“오케이 그럼 작가님?”
PD가 이월선 작가에게 할 말이 있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이월선 작가가 어깨를 으쓱이며 간단히 답했다.
“즐거운 리딩이 되자구요.”
말은 가볍지만 속뜻은 무거웠다. 이월선 작가는 스타작가 중에서도 리딩에 관여가 많은 작가로 유명했다. 연출과 힘을 합치는 박은미 작가와는 전혀 반대로 이월선 작가는 본인의 의견을 배우에게 가감 없이 표출했다.
특이한 것은.
“그럼 리딩 들어가 봅시다.”
-팔락 팔락.
이월선 작가는 리딩 초반부엔 배우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는 것. 대사가 틀려도 부족함이 보여도 의도와 다른 연기가 나와도 감정이 상이 해도 일단 리딩 초반엔 배우들이 해온 분석과 연기를 잠자코 두고 보는 편.
하지만 중반 정도가 되면 그 모습이 180도 달라진다.
비유하자면 초식동물에서 급작스레 육식동물이 된달까? 그래서 그녀의 작품 리딩 현장에선 눈물을 흘리는 신인이 많았다. 워낙 날카로운 지적이 나오니까. 디렉팅은 탑배우고 원로배우고 신인이고 모두 동일하게 박힌다.
뭐가 됐든.
“S#1 암막 커튼이 쳐진 집 대체로 검은색 톤이 많다. 이때 침대에서 송태형이 번뜩 눈을 뜬다.”
PD의 지문으로 ‘얼어죽는 연애’의 리딩이 시작됐다. ‘얼어죽는 연애’는 전체적으로 보면 남주 정장환이 맡은 ‘송태형’의 성장물이었다. 나이는 30대를 넘겼고 능력도 있지만 심각한 결벽증으로 세상 속 사람들과의 소통이 일절 없는 남자.
‘송태형’은 혼자만의 새장에 갇혔지만 그게 좋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나도 받을 이유는 없고 굳이 관계가 깊지 않아도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살아가는 데에 불편함은 없다. ‘송태형’은 흐트러지는 것을 극도로 역겨워했다.
그것이 사물이든 자신의 마음이든.
‘얼어죽는 연애’는 ‘어른아이’인 ‘송태형’의 성장과 사랑 변화를 약간 가볍게 또는 무겁게 담고 있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 ‘송태형’의 첫 변화를 주는 것이.
“S#3 송태형 손 세정제를 챙기곤 집을 나선다. 때마침 옆집에서도 문이 열리며 ‘옆집 묘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송태형. 이미 몇 번은 마주친 터라 송태형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강우진이 맡은 ‘옆집 묘한 남자’였다. 곧 정장환이 건너편 끝에 앉은 강우진을 힐끔했다. 미간을 좁힌다.
“···”
미간을 찡그린 정장환은 우진과 짧은 아이컨택을 할 뿐. 마찬가지로 그를 보는 강우진 역시 대사는 없다. 아니 ‘옆집 묘한 남자’는 대사를 할 수 없다는 게 정확했다. 이를 아직 모르는 정장환. 아니 ‘송태형’은 ‘옆집 묘한 남자’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저 묘한 눈빛이 ‘송태형’의 마음을 흐트러트린다.
대체 무슨 의도가 숨어 있는가? 왜 자꾸 나만 보면 저리 쳐다보는 거지? 기분이 나빠진 ‘송태형’이 ‘옆집 묘한 남자’에게 첫 마디를 뱉는다.
“이봐요 저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 겁니까?”
그러나 ‘옆집 묘한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
“됐습니다. 혹시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실 겁니까? 그럼 전 잠시 후에 타죠.”
“···”
“긍정으로 듣겠습니다.”
대본상 ‘송태형’은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닫힌 현관을 잠시간 보던 ‘옆집 묘한 남자’는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여기서 PD가 다시 지문.
“송태형 신발장에서 투덜대며 손 세정제를 비벼댄다. 마치 기분 나쁜 것을 씻어내겠다는 듯.”
송태형의 대사.
“볼 때마다 아주 기분이 더러워. 할 말이 있으면 하던가. 후- 안 되겠어. 이사를 하든지 해야지.”
그렇게 하루를 보낸 송태형은 다시금 집으로 돌아오고 옆집의 현관문을 힐끔한 그가 조용히 도어락 비밀번호를 풀 때.
-덜컥!
‘옆집 묘한 남자’가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도 말은 없고 그저 송태형을 바라보기만 한다. 대본엔 ‘옆집 묘한 남자’의 한 손엔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는 표현이 있다. 씬은 여기서 끝나야 했다. 송태형이 짧게 혀를 차고 집으로 휙 들어가는 것까지.
카메라 덤덤한 ‘옆집 묘한 남자’를 클로즈업.
따라서 강우진은 저 앞에 앉은 송태형을 그저 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끝나고. 음- 다음이.’
그런데.
“이거 봐요 당신.”
‘옆집 묘한 남자’에게 송태형이 뜬금 말을 걸었다. 대본에 없는 대사였다.
“왜 자꾸 불편하게 그러는 겁니까? 말을 하든지 아니면 무시하라고요. 몇 번쨉니까 이거. 자꾸 그러면 신고합니다?”
리딩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옆집 묘한 남자’. 아니 강우진에게 붙었다. 우진은 정장환을 보곤 있지만 속으론 명백히 당황했다.
‘엉? 뭐지. 저 대사 대본에 없는 거 아닌가? 있나? 아니 없어 없는 대사야.’
듣도 보도 못한 대사였으니까. 하지만 그를 제외한 리딩장의 배우들은 초연했다.
‘애드립? 하긴 장환이 형은 인물 분석할 때 대사를 만들어 오기도 하지.’
‘이번에도 애드립 준비해 왔네 저렇게 해서 채택된 대사도 꽤 있지 아마?’
그리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기에. 물론 펜을 휘휘 돌리는 이월선 작가도 딱히 끼어들 마음은 없었다.
‘껄끄러움을 증폭시킨다 뭐 그런 식으로 분석을 해왔나? 나쁘진 않네.’
딱히 씬과 튀지 않았으니까.
뭣보다.
‘쟤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궁금하고. 뭐 가볍게 받아치긴 할 테지만.’
애드립을 강우진이 어떻게 받을지도 보고 싶었다. 의심은 없다. 그 ‘괴물 신인’으로 추앙받는 강우진이었다. 이런 흔한 애드립 따위에 흔들리진 않겠지.
그러나.
‘와- 미친. 이거 그냥 가는 거냐? 왜 아무도 안 끊어?’
‘옆집 묘한 남자’는. 우진은 사고가 멈췄다.
‘잠깐잠깐. 어쩌라고 이거? 예?’
애써 덤덤함을 얼굴에 장착한 그였지만 저 앞에 앉은 탑배우 정장환을 보는 우진의 눈엔 어쩔 수 없이 당황이 옅게 담겼다.
이때.
“어?”
이월선 작가 오른쪽의 수어 전문가가 우진의 얼굴에서 뭔가를 느꼈다.
“···난감? 아니면 그 비슷한 게 보여요. 확실해 저 눈. 대화가 어려울 때 수어 쓰는 분들이 보이는 거거든요.”
속삭임에 이월선 작가가 우진에게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지금의 강우진에게서 난감이나 당황을 찾을 순 없었다.
다만.
‘전문가 눈에만 보이는 게 있긴 할 거야.’
여기에선 수어 전문가가 더 확실할 것이었다. 지금 강우진은 ‘옆집 묘한 남자’를 연기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이월선 작가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그래도···수어 전문가만 알아차릴 정도의 미세한 눈빛 표현을 할 수 있다라-’
강우진의 연기였다.
‘급작스레 던져진 애드립이었는데 저렇게 디테일한 부분을 한순간에 끌어낸다? 역시 기술은 탑급 저리 가라네.’
그때 정장환의 애드립 대사가 추가로 던져졌다.
“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소름 돋으니까. 부탁 좀 드립니다.”
“···”
하지만 우진은 여전히 무던한 표정으로 입을 열진 않았다. 그래도 변화는 있다. 약간씩 입을 뻐끔거린다는 것. 오물거리는 것과도 비슷했다. 입술이 살짝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수어 전문가가 바로 속삭였고.
“괴뇌. 뭔가 고민하고 있어요.”
정장환이 미간을 팍 구기며 건너편 끝 강우진에게 핸드폰 꺼내는 시늉을 보인다.
“그래요 알겠어요. 왜 저한테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그러실 것 같으니 지금 신고하겠습니다.”
여기서 뻐끔거리던 입을 뚝 멈춘 강우진. 그가 작게 고개를 꺾었다가 끄덕였다. 왜인지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스윽.
처음으로 강우진의 양손이 움직였다. 그리 대단한 행동은 아니었다. 명료하지만 짧다. 길어야 몇 초. 이내 우진이 두 눈을 끔뻑이는 정장환을 보며 마지막 손동작을 보인다. 오른손 주먹을 말아 쥔 것. 그 주먹을 코에 닿게 붙였다. 방향은 엄지가 코 쪽.
이를 지켜본 배우들은.
‘수어다. 잘해 당장 보기엔 전혀 부자연스럽지도 않고. 연습···아니 잠깐만. 연습? 지금은 대본에 없는 애드립인데? 뭐지?’
저마다 속으로 옅은 감탄 또는 의문을 뱉었다.
‘헷갈릴 정도로 부드럽게 수어를 해. 대체 얼마나 연습을 한 거야? 대단하네. 근데 저 동작은 따로 짜온 건가?’
‘애드립을 던졌는데 수어가 바로 나와?’
그러거나 말거나 강우진은 ‘옆집 묘한 남자’는 주먹을 코에 댄 채.
“···”
웃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너무나도 화사한 웃음이었다. 이빨이 드러날 정도의 따사로운 햇볕이 얼굴에 비췄을 때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미소. 뻣뻣한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드리운 순간.
이에 정장환은.
‘첫 수어 하지만 대본엔 없는 거야.’
‘옆집 묘한 남자’의 애드립으로 나온 수어를 알 길이 없었고 ‘송태형’으로서 당장 느껴지는 것을 대사로 뱉었다.
“뭐 뭐야? 왜 웃어요? 코에 주먹을 붙이는 건-날 조롱하는 겁니까?”
허나 코에 주먹을 붙인 강우진의 웃음은 더없이 짙어졌다. 이월선 작가는 우진의 미소에 살짝 신경을 빼앗겼다가.
‘저 아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도 있었네.’
문득 오른쪽에 앉은 수어 전문가에게 물었고.
“수어 같은데. 무슨 뜻인가요 저거.”
작게 입 벌린 수어 전문가가 질문으로 답했다.
“수어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강우진씨. 솔직히 저 정도로 예쁜 웃음이 나올 줄은. 혹시 이 씬이 두 인물 입장의 간극을 알리는 건가요?”
“그렇다고 봐도 돼요. 단절된 대화에서 오는 입장차이 같은.”
천천히 고개 끄덕인 수어 전문가가 방금 우진이 한 애드립 수어를 똑같이 따라 했다. 끝은 역시나 주먹을 코에 붙이는 것. 물론 강우진이 보인 것보단 작은 몸짓이었다.
“이 수어에서 마지막 주먹을 코에 붙이는 부분이 ‘좋다’거든요. 얼마나 짙게 웃는지에 따라 기분을 나타낼 수 있겠죠. 방금 우진씨는 정말 예쁘게 웃으셨죠? 저 수어의 전체 뜻은.”
이어 수어 전문가가 뜻을 읊었다.
“‘난 당신이 좋다’ 였어요.”< 출국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