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국 (2) >
강우진이 처음 정장환의 애드립을 듣고 몸이 굳었을 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 씨 뭐든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판이 제대로 깔렸고 지켜보는 눈만 수십이었다. 여기서 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도 이상했고 아무 액션 없이 가만히 있거나 무시도 볼썽사나웠다. 뭐랄까 우진은 지금 포커페이스가 진했으나 위기였다.
어쩌냐? 어쩌지?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강우진. 그러다 문득.
‘···어. 그렇지. 나 대사가 없잖아?’
치솟는 긴장감에 멍했던 머리가 약간 돌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우진이 맡은 ‘옆집 묘한 남자’는 대사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옆집 묘한 남자’는 말을 못 했다.
즉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됐다.
어라? 이러면 해볼 만하지 않나? 그래도 위기가 깨끗하게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애초 ‘연기’라는 게 대사만 있는 건 또 아니니까.
거기다 수어는.
‘손 표정 몸짓이 평소보다는 더 강해야 하고.’
말이 없는 대신 나머지 부분들이 극대화돼야 했다. 즉 이 순간 그는 아공간의 힘이 아닌 수어를 습득한 ‘강우진’ 본연의 모습으로 애드립을 받아쳐야 했다.
재밌는 것은.
‘왠지- 음 뭐라 딱 정의할 순 없는데. 왠지 될 것 같은데? 응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막상 머릿속의 생각이 정리되니 강우진에겐 묘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저 탑배우 정장환의 애드립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허세? 아니면 감각이 무뎌져서? 객기? 모르겠다.
아는 건 개뿔 없지만 우진은 움직였다.
-스윽.
일단 강우진은 건너편 첫 자리의 정장환과 눈을 맞췄다. 표정관리. 그다음이 수어로서 어떤 대사를 칠 것인가를 생각했다. 답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반전 아무래도 통수를 치는 대사가 좋겠지?’
‘옆집 묘한 남자’는 결과적으론 정장환이 맡은 ‘송태형’에게 첫 변화를 주는 인물. 그러니 현 상황에서 ‘송태형’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애드립이 알맞다. 지금 송태형은 ‘옆집 묘한 남자’의 실체를 모르고 있다. 감정도 그닥 좋지 못하다.
곧 강우진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대사는 얼추 결정한 참이었다. 수어는 아공간의 은혜 덕분에 완벽할 것. 남은 것은 표정 연기와 몸짓. 이내 우진은 송태형에게 애드립을 던졌다. 그의 마지막 수어 동작은 오므린 주먹을 코에 붙이는 것.
‘난 당신이 좋다.’
표정은? 그래 웃자. ‘좋다’라는 수어는 웃어야 명확한 감정이 살아나는 동작이었다. 우진은 입꼬리를 서서히 올렸다. 어떤 것을 생각할까? 첫 취업? 아공간이 생겼을 때? 홍혜연을 처음 만났을 무렵? 한량의 촬영이 끝나는 날? 내 애마? 첫 키스씬?
무슨 기억이 됐든 강우진은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연기라는 뿌리가 밑바탕이지만 가히 오류를 찾을 수 없는 웃음. 지금 그의 표정과 표현엔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완벽했다.
그랬다 강우진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다.
아공간의 힘이 보태지지 않은 강우진 스스로 해낸 첫 연기라 봐도 무방했다. 됐다. 이게 되네? 근데 어떻게 될 수 있었지? 우진은 ‘옆집 묘한 남자’의 애드립 연기를 보이면서도 과정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워낙 정신없이 보인 터라 잘 기억이 안 났다.
‘컨셉질을 너무 오랫동안 해와서? 아니면 아공간을 통해 습득한 배역들이 쌓여서?’
우연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당장 답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뭐 어느 쪽이 됐든 나도 조금은 성장한 건가? 물론 아직 아공간이 없다면 배우로 살긴 무리였다. 소시민 알맹이의 강우진에겐 경험도 턱없이 부족하다. 권기택 감독이나 쿄타로 감독 등 거장의 작품에서 연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확실히 전이랑은 좀 달라진 걸지도.’
몇 달 전인 ‘프로파일러 한량’ 때의 강우진과 지금은 같다고 보기 힘들었다. 실수나 우연으로 보인 애드립이 아닌 자의적으로 애드립을 보였고 그 급작스레 나온 연기는.
‘잘하네 표정이 휙휙 바뀌는 건 좀 소름인데?’
‘나도 수어는 개뿔 모른다만 어색한 감은 없어. 자연스러운 게 계속해오던 느낌도 나고. 얼마나 연습한 거야 대체?’
‘저 웃음. 클로즈업으로 바싹 당기고 밑에 음향 깔고 필터좀 추가하면 그냥 영화 한 컷 뚝딱이겠네.’
‘괜히 괴물 신인 괴물 신인 난리 치는 게 아니었어. 연기 기깔난다 진짜.’
모인 배우들에게 거대한 긴장감을 불어 넣었다.
‘···분량이 짧은 조·단역 혼자만 난이도 높은 수어 연기 파급력이야 오진다만 어쨌든 신인 연기 대충 했다간 바로 티 나고 욕 처먹는다. 무조건.’
강우진의 존재 자체가 배우들에게 위기로 다가왔으니까. 특히 우진과 유일하게 붙는 정장환이 몇 배는 심했다.
‘호기심이고 나발이고. 내 코가 석 자였어 저런 놈이랑 같은 씬에서 비비려면···잠깐만. 내 대사. 나 다음 대사가 뭐였지?’
그리고 지금 리딩장 전체를 훑던 이월선 작가는 알아차렸다.
‘아하 그래 이거구나. 이 분위기.’
왜 박은미 작가가 강우진을 무조건 리딩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는지 말이다. 방금 전체 배우들의 의지가 변했다. 자세와 태도가 고쳐졌다. 표정에 진중함이 가득했다.
‘비교당할 순 없는 거야.’
저 조·단역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수어를 해대는 신인과 비교 선상에 올랐다간 삽시간에 단두대에 오를 테니.
‘그야말로 씬스틸러가 따로 없네.’
이월선 작가는 우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어떤 역 무슨 작품이든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 저런 게 진짜 탑이지.’
오른쪽 자리 수어 전문가에게 작게 물었다.
“우진씨 수어 보시기에 어때요? 전문가의 눈으로만 평가해주세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대단하세요. 흠잡을 데가 없어요. 제가 연기는 잘 몰라서 처음 우진씨를 봤을 땐 무던한 표정이 좀 걱정이었는데- 연기 시작하시니까 180도 달라지시네요.”
그건 이월선 작가 역시 절절히 느끼고 있었고 수어 전문가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약간 흥분했다.
“아까 난감함 고뇌가 서린 눈빛 보셨죠? 거기에 우진씨 몸동작도 상당히 부드러워요. 손동작에 따라 표정도 다채롭고. 감정이 바로바로 느껴질 정도예요. 저보다 수어를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평가를 들은 이월선 작가는 여전히 연기 중인 끝쪽 자리 우진에게 시선을 맞췄다. 눈빛에 오묘함이 실렸다.
‘···쟤 뭐지? 수어 전문가가 끝없이 극찬할 정도의 수어를 대체 언제.’
뭐랄까 강우진은 작품 연출자나 작가가 원하는 조건을 늘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것들을 습득하는 게 거의 극악의 난이도라는 것.
‘딱히 습득에 목숨을 거는 모양새도 아니야. 그냥 일상처럼 툭툭.’
이어 이월선 작가가 다시금 수어 전문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만약 방금의 씬을 시청자들이 본다면 어떨까요.”
“제가 순수하게 시청자라면 우진씨의 수어 실력에 너무 놀라서 충격 그다음은 고마울 것 같아요. 짧은 역임에도 대단히 노력한 걸 아니까.”
“그래요. 짧죠 그것도 상당히. 그럼에도 저런 임팩트.”
당연하겠지 더불어 이월선 작가는 일반 시청자들의 마음도 추측했다.
‘매 작품마다 형형색색으로 바뀌는 우진씨의 마스크에 혀를 내두를 거야.’
아니 박대리에서 갑자기 수어를? 따위의 그림이 아닐까. 거기다 강우진은 이 ‘얼어죽는 연애’ 말고도 예정된 작품이 많았다. 스타작가 이월선 작가는 팔뚝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쟤가 활개 치기엔 국내는 좁아 일본으로 무대가 넓혀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네.’
배역의 노출도가 몇 초든 몇 시간이든 저 괴물 신인은 늘 최고의 조건으로 비칠 것이며 시청자를 현혹할 테니까.
그리고.
‘천의 얼굴.’
배우로서 연기의 스펙트럼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
뒤로 이월선 작가는.
-스윽.
몸을 왼쪽으로 움직여 연출 PD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PD가 작게 헛기침하며.
“크흠! 잠시만요.”
진행되던 리딩을 끊었다. 덕분에 강우진을 포함한 수십 배우들부터 스탭들 등의 시선 모두가 집중됐다. 허나 PD는 이월선 작가를 보며 집중을 토스했다. 곧 펜을 휘휘 돌리던 이월선 작가가 입을 열었다. 표정은 다소 딱딱하다.
“직접 경험하신 배우님도 소문으로 듣기만 한 분들도 계실 텐데. 나는 리딩 초반은 그냥 보는 편이에요. 배우들이 어떻게 내 대본을 분석해왔나 궁금해서. 애드립도 뭐 오케이.”
읊조리던 그녀가 바로 지척에 앉은 탑배우 정장환과 눈을 맞췄다.
“장환씨.”
“···아 예 작가님.”
“방금 상황에 따른 애드립은 나쁘지 않았어요. 분석도 이해되고.”
차분히 읊조리는 이월선 작가의 디렉팅은 차분하지만 무겁다. 다분히 압박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호기심은 이해하겠는데 지금의 애드립은 선배답지 않은데요?”
“···”
“방금 그거 진짜 ‘송태형’으로서 나온 대사야? 난 배우 정장환이 뱉은 실험같이 들렸는데.”
리딩장이 한없이 고요해진다. 요상해진 분위기에 우진은 일단.
‘뭐지 갑자기 혼나는 분위기?’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를 모르던 이월선 작가가 눈은 정장환을 손짓은 우진을 가리켰다.
“‘송태형’으로서가 아니라 장환씨의 순전한 호기심으로 나온 애드립이 아니냐고 물은 거예요.”
올곧은 팩트가 정장환의 귓가에 꽂혔다. 금세 인정하는 투로 읊조리는 정장환.
“죄송···합니다 제가 좀 오바했습니다.”
“그래요. 한참 선배면서 왜 줄타기를 해?”
여기서 이월선 작가가.
“다들 들어요 우진씨는 거의 봉사 수준으로 이 작품에 참여한 거예요. 리딩도 솔직히 안 와도 되는데 와준 거고. 이해는 해. 파악하기엔 우진씨 분량이 짧고. 궁금도 하겠지. 대체 어느 정도기에 국내 연예계를 뒤집나- 싶잖아?”
전체 배우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적당히들 해요 적당히. 배우로서의 호기심이 독기로 바뀌는 건 좋아요. 근데 그게 질투 시샘 뭐 그런 거로 가면 별로야.”
이쯤 턱을 슬슬 긁던 정장환이 좀 전의 자신을 되돌아봤다.
‘궁금함과 동시에 질투가 있었어.’
강우진의 연기를 길게 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악의적인 부분도 섞였다. 이를 알아챈 정장환이 건너편 끝쪽의 강우진에게 순수하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우진씨. 내가 좀 어려모로 오바했어요. 호기심이 과했어.”
“아닙니다 재밌었고.”
재미? 우진의 대답에 정장환이 속으로 피식했고.
‘여유가 넉넉하네 그만큼 방금의 애드립 연기가 가벼운 수준이었던 거지.’
억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우진은 두쿵대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어우- 뭐가 뭔진 몰라도 어쨌든 다행. 애드립 더 나왔으면 뇌정지 왔을 거야.’
그런 우진을 이월선 작가가 불렀다.
“우진씨 근데 방금의 애드립있죠?”
“예.”
“전후 상황은 좀 수정한다 치고. ‘송태형’은 ‘옆집 묘한 남자’가 수어밖에 못 하는 걸 모른다 ‘옆집 묘한 남자’는 ‘송태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명확히 표현한 수어. ‘난 당신이 좋다’ 이건 꼭 쓰고 싶은데. 어때요?”
대본에 없던 방금 우진이 즉석으로 꺼낸 수어를 정식으로 대본에 추가시키겠다는 얘기였다. 이에 강우진은 그저 덤덤히 답할 뿐이었다.
“작가님이 원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
담날 아침 22일. bw 엔터.
장소는 대표실. 방의 주인인 최성건과 여러 직원들 그리고 강우진이 마주 앉아 있다. 스케줄을 시작하기 전 앞으로의 일정을 브리핑하는 자리였다. 며칠 뒤 있을 일본 스케줄도 포함.
도중 최성건은 건너편 모자 쓴 강우진을 보면서도 어제 ‘마약상’ 김도희 감독과의 통화를 상기했다. ‘마약상’의 개봉이 도래했다는 부분부터.
시작은 핸드폰에 대고 되물은 최성건이었고.
“블라인드 시사회면 벌써 ‘마약상’ 편집이 끝났다는 말씀입니까?”
핸드폰 반대편 김도희 감독의 대답.
“아니요. 아직 다 마무리된 건 아니에요. 근데 90%는 끝났다 봐야죠. 원래 계획은 9월 중순에 편집 끝나고 블라인드 시사회를 열까 했는데 배우들 스케줄이 중구난방이라 그나마 시간을 맞춘 게 다음 주예요.”
“아- 그래서 90% 진행한 영화로 블라인드 시사회를 여신다는?”
“네. 말이 90%지 본편 편집은 보는 데에 지장은 없을 정도예요. 효과음이나 엔딩크레딧 등 자잘한 것만 남았고.”
‘마약상’의 크랭크업은 6월이었다. 9월 중순이면 약 4달 정도의 작업 기간을 거친 것과 같다. 뭐가 됐든 빠른 속도인 것은 확실했다.
“이야- 그래도 엄청 빨랐네요? 애초 올해 초겨울 개봉 목표였잖습니까?”
“맞아요. 편집팀이 많기도 했고 나부터 뼈를 갈았죠 뭐. 거의 매일을 밤새다시피 했고. 물론 개봉도 초겨울보단 빠를 것 같아요. 잘하면 10월 중순이나 말쯤? 늦어도 11월 초엔 갑니다.”
답한 김도희 감독이 뜬금없는 타이밍에 축하를 던졌다.
“아아! 그렇지! 우진씨요! 메시지를 보내긴 했는데 정말정말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벌써 일본 진출이라니···심지어 쿄타로 감독에 주연?? 내가 기사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잘 전할게요.”
“꼭이요. 우리 ‘마약상’ 팀 전부가 난리였어요. 우진씨가 역사 쓰고 있다 뭐 레전드다 어후- 우진씨 덕분에 우리도 얻어걸린 것도 있어요.”
“네네. 작품들 언급이 잦은 편인 건 봤습니다.”
“그뿐이게요? 이대로면 ‘마약상’ 개봉했을 때 대중들 기대감이 몇 배는 뛰죠!”
“아 근데 감독님. ‘마약상’ 개봉이 10월 중순이나 말이라고 하셨죠? 또는 11월 초.”
“네. 일단은요. 변동 가능성도 있고.”
여기서 다시금 현실. 대표실로 돌아온 최성건이 우진을 보며 왜인지 비죽 웃었다.
‘···‘남사친’도 촬영이 끝났어. 대충 편집을 한 달로 잡는다 치자고. 홍보하고 뭐 자질구레한 거 포함. 그럼 ‘남사친’ 런칭도 얼추 10월 근방이 될 텐데-’
그리곤 건너편 강우진을 부르는 최성건.
“우진아.”
“예 대표님.”
답한 우진에게 최성건이 마무리 멘트를 쳤다.
“어쩌면 ‘남사친’하고 ‘마약상’ 거의 동시에 오픈될지도 모르겠다.”
냉탕 ‘이상만’과 온탕 ‘한인호’의 얘기였다.< 출국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