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주 (7) >
노장 안가복 감독의 말라비틀어진 팔뚝에 자란 닭살. 99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이런 경우는 손에 꼽는 안가복 감독이었다. 이에 그는 늙은 미소를 머금었다.
‘20년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기억도 안 나는군.’
올라간 입꼬리엔 묘한 당황과 고양감이 섞였다. 지금껏 수많은 국적의 배우와 작업한 그였다. 한국을 넘어 헐리웃까지. 안가복 감독을 스쳐간 배우만 어마무시할 것. 그럼에도 배우의 연기에 소름이 돋은 것은 손에 꼽았다.
그런데.
‘신인의 연기에서 죽었던 감각이 되살아나다니.’
생뚱맞게도 1년 차 라이징한 배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는 한국 영화계가 전설로 칭하는 안가복 감독에게도 진귀한 경험. 그래 그랬구나. 이 정도나 되니까 저 강직한 권기택 감독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지.
-스윽.
안가복 감독이 촬영존 안 천천히 방탄모를 벗는 강우진에 시선을 맞춘다.
‘귀하다 흔하지 않아.’
요즘 같은 공장식의 배우판에선 나오기 힘든 배우였다. 최소 안가복 감독의 생각은 그랬다. 척박해진 배우판에 산삼이랄지.
어쨌든.
-타닷!
격정적인 떼샷의 첫 번째 OK가 푸근한 권기택 감독의 입에서 뱉어진 뒤 숨을 죽이고 있던 백여 명의 스탭 중 수십 명이 촬영존으로 뛰어갔다. 고요하던 현장이 단숨에 시끌벅적해진다.
“미술팀! 좀 도와주세요!”
“지금 갑니다!!”
OK가 떨어지긴 했지만 지금의 씬이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구도를 바꿔서 다시 인물의 솔로 컷 등등. 같은 씬을 여러 번 반복하는 건 기본이며 지금 달려간 스탭들은 재촬영을 위해 다시금 촬영존을 재정비해야 했다.
다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준비됐습니다!!”
“1분! 1분 뒤 스탠바이!!”
금세 재촬영의 시간이 도래했다. 숨을 고르던 배우들이 다시금 카메라의 앵글로 진입한다. 이번엔 같은 씬이지만 전체보다는 인물의 단독씬에 집중할 예정이었고.
“후우-”
시작은 강우진. 즉 ‘진선철 상병’부터였다. 따라서 권기택 감독이 보는 모니터엔 배우들의 전체 그림 상체 샷 단독으로 강우진의 얼굴이 걸렸다. 이어 총을 어깨에 천천히 견착하던 우진은.
‘나부터 스타트니까 집중.’
다시금 내면 어딘가에 각인된 ‘진선철 상병’을 끄집어냈다. 여유 있던 심지에 두 자아가 가득해지는 감각이 혈관을 타고 번진다. 그래서? 이번에도 좀 전과 똑같이 할 거야?
‘아니 단독이니까 더 진하게. 선명하게.’
지금껏 우진의 연기는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넘쳤다. 하지만 알맹이가 초심자인 그는 ‘정도’를 몰랐다. 상한선이 없다. 한계의 도달점이 어딘지 불명확했다.
‘몰라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선택지는 하나. 계속해서 미개척지를 걷는 것.
배우의 자세는 아니다.
어차피 여기 있는 내로라하는 탑배우들의 경험은 하루 이틀로 좁혀질 게 아니니까. 강우진은 그저 ‘진선철 상병’ 자체에 동화되는 것을 파고든다.
그러니 직진.
원래도 반복된 리딩(경험)을 하면 아공간의 힘으로서 인물은 더없이 생생해진다. 거기에 우진의 잦은 연기까지 포함되면 도를 넘는다. 이미 겪어봤었다. ‘박대리’ 때부터. 통제하고 절제하며 생각을 넓힌다. 어렵진 않았다.
평소의 컨셉질에선 늘상 하던 것이니.
이 작업을 다른 배우들은 탐구 또는 해석이라 명한다.
허나 보통의 배우들과 강우진의 과정은 판이했다. 결과 역시 그랬다. 물론 초심자 우진은 그런 심화된 정의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스윽.
어느새 강우진을 소심한 놈이 장악했다. 카메라는 우진의 바스트샷. 그런 ‘진선철 상병’에게 확성기를 통한 권기택 감독의 사인이 들렸다.
“하이- 액션.”
전우들의 목소리가 어렴풋 들리지만 강우진에겐 옆에서 오들오들 떠는 일병의 움직임만이 보였다. 어떡하지? 선임으로서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말을 걸면 더 놀라 자빠지지 않을까? 아니 내 말을 듣기나 할까? 조금 두렵다.
이때.
‘병신아 뭘 고민해. 못 들을 것 같으면 강제로 들리게 하면 되잖아.’
거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꺼져 봐.’
금세 ‘진선철 상병’의 마인드가 뒤바뀐다. 즐거움 또는 환희. 이것은 실제로 강우진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현상과 대화였지만 그를 바로 앞에서 찍는 카메라에 담기는 건 아니었다. 안 된다 자아가 둘인 것을 자랑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진선철 상병’은. 강우진은 이곳의 군복 입은 장난감들엔 숨기지만 제3자들에겐 보란 듯이 뽐내고 싶었다. 지금의 게임을. 그러니 탐구했다. 무엇을 덧붙여야 너희들의 오금을 저리게 할 수 있을까?
여기서 그는 알아차렸다.
수어. 그래 수어가 있었구나.
말을 하지 않아도 딱히 입을 열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무한한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언어. 대사를 감정을 기분을 오감을 표현을 무음으로 펼칠 수 있는 기술.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진선철 상병’에게 수어가 융화되며 걸죽해진다.
이때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바싹 당겨 담는다.
다만 총을 파지한 ‘진선철 상병’은 두 손을 움직일 순 없다. 그러니 눈코입 얼굴과 몸의 근육 신경의 떨림 시선 호흡 등만 운용해야 했다.
괜찮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이어 일병을 힐끔한 그가 게임을 시작했다. 눈동자엔 소심함을 입가엔 미세한 떨림을 입꼬리엔 찰나의 희열을 담는다. 당연히 이 모든 건 모니터에 하나 빠짐없이 출력된다.
덕분에.
‘···뽐낸다 뽐내고 있어.’
눈동자에 진중함이 가득한 권기택 감독의 숨소리가 낮아졌다.
‘어처구니가 없어. 처음의 것보다 미묘한 감정선을 더 확장시킬 수 있었나? 이중인격의 비밀을 관객들에게 자랑하고 있잖아 지금.’
강우진의 연기에 눈을 떼지 못한다.
‘이 짧은 순간에도 성장하는 건가?’
닭살이 한없이 반복되는 안가복 감독은 이미 권기택 감독의 옆에 바싹 붙은 채였다. 그의 주름진 눈가가 벌어졌다. 두 눈이 디립다 커졌으니까.
‘알겠어 저 배역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보인다. 속살을 저 세상에선 철저히 숨기지만 외부인 우리에게는 당당히 보여주고 싶은 거야.’
그런데 왜인지 강우진의 섬세함이 점차 몸집을 불린다.
‘더 있었나? 보여 줄 게 아직도 많다고? 저건 마치···얼굴로 설명을 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왜 내가 원하는 수어의 냄새가 풍기는가.’
이 순간 들리는 한 발의 총성.
-타앙!
난입한 괴생명체의 길쭉한 것 썩어 문드러진 똥물처럼 쓰러지는 일병 난잡해진 병사들 흥분한 간부들.
끝없이 쏟아지는 총성.
-탕탕탕!!
지랄하는 병사들은 혼비백산 격전지에서 도망친다. 미친 듯이 긴박하지만 상황은 부드럽게 전개되며 죽어버린 일병을 감싼 강우진은 울었다.
“흐윽! 흐흐흑!”
속으론 웃었다.
‘크큭! 흐흐흐흐 하나 뒤졌고.’
내가 미안해 미안해 정말. 다음엔 꼭 거친 놈을 막아 볼게. 잘 못 했어. 뭐래? 아가리 닥쳐. 네 놈도 즐겁잖아? 즐기라니까?
“진선철!! 너 이 새끼 뭐해!! 뛰라는 소리 못 들었어?!!”
그래 시발아 그만 처 울고 너도 뛰어.
“정신 차려! 죽었어! 이미 죽었다고!! 닥치고 일어나!! 빨리!!”
아직 할 게 많아.
초마다 분마다 카메라에 비추는 강우진의 얼굴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흐르는 눈물도 진심이거나와 활처럼 휜 미소도 진짜였다.
이어.
“···컷 오케이.”
다시금 권기택 감독의 신호가 현장에 울렸을 쯤 백여 명의 스탭들 등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
“···”
“···”
안가복 감독만이 아닌 모두에게 닭살이 전염됐으니까. 무더운 날씨가 그것을 부추겼다. 방금 내가 본 것이 무엇인가?
‘대사에 단 한마디 언질도 없는데···진선철 상병이 이중인격인 게 보인다. 와- 미친.’
이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재촬영이 진행될수록 팽배해졌다. 분명 강우진은 그 짧은 사이 발전하고 있었다. 곧 안가복 감독의 뒤쪽에 섰던 영화사 대표나 직원들이 판단을 포기했다.
‘연기? 연기라 말할 수 있나??’
‘이 이게 영화관에 걸리고 관람객들이 본다면···이건 연기를 잘한다는 정도를 넘어섰잖아?!!’
특히 얼굴이 탄 영화사 대표가 퍽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경이롭다 지금껏 본적 없는 연기법. 저런 것을 눈앞에서 맞닥뜨리는 상대 배우들이 불쌍할 지경이야. 심지어 컷마다 크고 있어 성장의 한도가 안 보인다.’
그 역시 이 바닥에선 베테랑. 숱한 배우들을 봐왔다. 하지만 현재의 경험은 무지함에 가깝다. 그런 영화사 대표가 시선을 살짝 내려 안가복 감독의 뒤통수를 응시했다가 양옆의 입을 작게 벌린 직원들을 봤다. 그리곤 입을 다문 백여 명의 스탭들까지 훑었다. 넓다. 광활하다. 그런데 좁다.
저 강우진의 얘기였다.
영화사 대표의 시선이 재차 배우들과 부대끼는 우진에게로 닿았다. 그에게 보이는 강우진은 뭐랄까 민물에 섞인 고래를 연상케 했다. 영화사 대표는 순수하게 헛웃음이 나왔다.
‘감독할 게 아니라 감당해야 될 괴물이었어.’
곧 저도 모르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는 영화사 대표. 세계적 무대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는 저 ‘고래’의 뒷모습.
‘민물이 아닌 바다에서도 모두를 짓누를 수 있을까?’
왜인지 아득하지는 않았다.
이후.
‘실종의 섬’ 촬영은 호흡 빠르게 진행됐다. 무더웠던 아침과 점심을 지나 오후까지.
“컷 OK 10분 쉬었다가 가자.”
“옙! 10분 쉬었다가 갑니다!!”
권기택 감독을 포함한 백여 명 스탭들이나 배우들의 집중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안가복 감독이 현장에 있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어후- 오늘 촬영 좀 빡쎄네. 죽어난다 죽어나.”
“별수 있나. 가뜩이나 중요한 떼샷이고 오늘 촬영 지나면 이 거지 같은 수풀을 벗어나는 거잖어.”
“하긴. 이제 대부분 ‘실종의 섬’ 마을 쪽 컷이 많지. 크 이제야 끝이 보이는구만.”
“끝은 개뿔 해외로케만 쳐낸 거고 한국 가면 또 촬영에 촬영에.”
콘티로 보면 이 떼샷 뒤부터는 숲속보단 마을의 촬영이 많을 예정이었다. 즉 괴생명체를 뒤로하고 ‘실종의 섬’의 기이한 마을 사람들과 조우하게 된다는 뜻.
지옥 같은 베트남 다낭의 해외로케 촬영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 복귀하면 그린스크린에서의 촬영이나 부여 세트장 촬영 등 남은 게 많지만 해외로케 촬영을 쳐낸 것만으로도 약 30%는 정리된 셈이었다.
그렇게 해가 지는 오후쯤.
삼삼오오 몰린 배우들은 티 안 나게 감독석을 힐끔댔다. 권기택 감독을 본 것도 있겠으나 무게가 실리는 건 안가복 감독 쪽이었다. 사실 ‘실종의 섬’ 전체 배우들은 촬영 전부터 안가복 감독이 신경 쓰였다.
방탄모를 천천히 벗던 류정민이나.
‘내 연기를 어떻게 보셨나. 부족했을까?’
군복을 터는 하유라 김이원 전우창 외의 조연들 모두 안가복 감독을 연신 힐끔댄다.
‘이번 컷에서 뛰는 타이밍이 좀 늦었어. 하- 씨 하필이면 오늘! 후 괜찮아 다음 컷에서 실수 없이 하면 돼. 침착하자 하유라.’
‘어우 긴장돼서 대사도 잘 생각 안 나네.’
‘안 감독님···표정을 읽기가 힘들어. 잘 좀 봐주셨으면 좋겠구만.’
하다못해 우정 출연 대기로 스탭들과 촬영을 구경하던 홍혜연마저 그랬다.
‘오늘 어디까지 보고 가시는 거지? 휴- 최소한 지적하신 건 어떻게든 만회해야 해.’
욕심 또는 욕망이 없지 않아 있겠지. 구경을 왔다지만 안가복 감독의 눈에 들어 그의 작품에 참여한다면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단숨에 격상하니까. 배우들에겐 미약한 기회와도 같았다.
다만 배우 중 단 한 명.
‘오늘은 종일 뛰기만 하네 쯧. 아- 허기진다 타이밍 봐서 수환이한테 초코바 몇 개 달라고 해야겠다.’
묵직함이 최대치인 강우진만이 안가복 감독을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애써 무시에 가까웠다. 관심단절. 이어 여러대의 모니터 앞에 앉았던 권기택 감독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노장 안가복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만 표정은 굳었다. 그런 안가복 감독에게 권기택 감독이 나긋나긋 물었고.
“어떠셨습니까 감독님.”
천천히 시선을 돌린 안가복 감독이 낮고 늙은 톤으로 답했다.
“좋군. 고마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촬영을 본 느낌이야. 뭐 자네 연출이야 언제나 기대 이상이지.”
“과찬이십니다.”
“그럴 리가.”
사람 좋게 미소짓던 권기택 감독이 안가복 감독에게 붙어 속삭였다. 주제를 바꾼 것.
“우진씨의 배역은 느낌이 오셨습니까?”
“이중인격 저 연기를 보고 모르면 연출 그만둬야지.”
답한 안가복 감독이 다시금 시선을 옮긴다. 분장 수정이 한창인 군복 입은 배우들에게로. 그중에서 무심한 얼굴의 강우진을 보는 안가복 감독.
“계급이 있으며 명령을 받는 집단. 비교적 딴딴한 응집력 속에 숨어든 미꾸라지. 하지만 목표 의식은 보이지 않아 그래서 더 눈길이 가고 씬의 색깔을 채워주지. 관객들이 보기에 다분히 즐길 수 있는 캐릭터야.”
물론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해석을 읊조리고 싶은 안가복 감독이었으나 말을 아꼈다. 본인은 그저 구경꾼에 불과하니까. 이에 동의한다는 듯 미소가 짙어진 권기택 감독이 스륵 일어났다.
“우진씨의 개인 능력입니다.”
“흠?”
“제 시나리오 분위기 아시잖습니까. ‘진선철 상병’의 서술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것을 살린 것은 오로지 우진씨의 기술입니다.”
잠시간 권기택 감독을 올려보던 안가복 감독이 주름진 웃음을 보였다.
“그래 왜 저 친구를 아끼는지 알겠어.”
“‘실종의 섬’ 시나리오를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실 때 한 번 읽어보시면 좀 더 명확히 아시겠지요.”
“고맙네.”
작게 고개 숙인 권기택 감독이 부산스런 현장 속으로 차분히 걸어갔고 안가복 감독의 시선이 그의 뒤를 따른다.
재밌는 건.
“음?”
잠시 잠깐 눈이 마주친 강우진이 안가복 감독의 시선을 피한다는 것. 이에 픽 웃은 안가복 감독이 팔짱 끼며 혼잣말을 뱉었다.
“어째 미움을 받아버린 모양이야.”
뒤로 이틀.
11월 3일 베트남 다낭에 있는 ‘실종의 섬’ 촬영터에 권기택 감독의 사인이 던져졌다.
“스탠바이- 큐.”
집중된 배우는 강우진과 하유라 그리고 류정민. 군복 입은 그들의 열연. 얼추 3시간쯤.
이내.
“컷 OK. 다들 고생했어요.”
3일 점심 무렵에 선언된 OK에 백여 명 스탭들이 쓰고 있던 사파리 모자를 던져댔다.
“으아!! 드디어 탈출!!”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배우님들도!!”
“와- 진짜 한 10년은 베트남 생각도 안 나겠네!”
“누가 보면 촬영 다 끝난 줄 알겠어?! 하하하.”
‘실종의 섬’의 해외로케 촬영이 끝났으니까.< 독주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