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4) >
꽁지머리 최성건을 보며 주름진 미소를 머금는 히데키 회장. 그러나 그가 보이는 여유는 늙지 않았다. 노장이긴 하나 맹수의 포스. 누가 뭐래도 히데키 회장 앞에 앉은 최성건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이 양반이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애초 예측 조자 불가능했다. 아니 그렇잖은가? 한국의 대기업도 아닌 일본의 대기업 총수가 돌연 bw 엔터에 투자한다니. 아무리 사고가 유연한 최성건이라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생각을 뻗어 나가야 했으나 불가능했다.
회로가 자꾸 막힌다.
그래 이럴 땐 시간을 끄는 게 제격이다. 최성건은 일단 5인 소파 상석에 앉은 히데키 회장에게 되물었다. 확답을 듣는 것도 포함됐다.
“투자. 개인적으로 투자를 하신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저희 bw 엔터에?”
이 물음은 통역 직원을 통해 히데키 회장에게 넘어갔고 그가 천천히 고개 끄덕이며 미소를 유지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개인적. 즉 카시히 그룹으로서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룹과는 상관없이 나 개인으로 투자를 제안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요시무라 히데키 회장의 독단이라는 소리. 다만 말은 이렇게 넘어갔어도 카시히 그룹은 히데키 회장의 것. 관련이 없을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 됐든 최성건은 소화가 힘들었다.
‘일단 우리 bw 엔터가 확장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 걸려. 왜지? 왜 히데키 회장이 인지하고 있는 거냐고.’
히데키 회장은 오늘 처음 봤다. 강우진의 ‘낯기생’이 아니었으면 평생 볼 일도 없을 다른 세상의 인물. 그런 히데키 회장이 한국의 구멍가게 수준인 bw 엔터의 사정을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됐다. 남이 들으면 개소리로 치부하겠지.
하지만 그 헛소리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앞뒤 사정을 캐내서 명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싶은 최성건이었으나 당장 히데키 회장한테 구구절절 설명을 요구하는 건 병신처럼 보일 뿐이었다. 최성건은 최대한 정신을 다잡았다. 상대의 신분은 확실했고 기회의 냄새가 짙었으니까.
허나.
‘여기서 히죽대면서 넙죽 받는 건 우스워질 수가 있다.’
최성건은 예의를 차리되 자세를 많이 낮추지는 않았다. 히데키 회장에게선 욕심이 보인다.
“너무나 감사한 제안입니다. 다만 이미 저희 bw 엔터는 한국의 여러 투자자들과 얘기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고민 중이기에 이 자리에서 덜컥 결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통역을 들은 히데키 회장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해하고 있어요.”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솔직히 저로서는 조금 황당한 상황이기도 해서요. 죄송합니다만 왜 저희 bw 엔터에 관심을 가지신 겁니까?”
여유 넘치는 히데키 회장의 대답은 빨랐다.
“강우진 배우 때문이지요.”
역시 그런가? 최성건 역시 어느 정도 눈치는 있었으나 물음을 추가했다.
“그의 가치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고 강우진 배우는 일본에선 아직 핫한 한국의 배우 정도가 답니다.”
“타국의 배우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의아하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물론 그룹의 문화 마케팅 부분으로는 이해가 되긴 하지만 개인적이라고 말씀하셨기에.”
“흠. 그렇겠지 아마 이런 경우는 과거나 미래에나 없겠지요.”
읊조린 히데키 회장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오늘 강우진씨를 직접 보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의 연기 매력 지닌 기세. 난 커다란 거목이 될 인물을 보면 참기가 힘들어서.”
찻잔을 내린 히데키 회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졌다.
“가까운 미래에 그의 이름은 세계로 뻗어 나갈 겁니다. 귀한 것을 지녔어요.”
전율이 흐르는 최성건이었다.
‘혀 현실이냐 이거?’
일본의 초대기업 총수가 강우진을 극찬하고 있다. 하도 난데없기에 그 느낌이 배가 된다. 거기에.
‘세계···과연 미래를 보는 눈이 확실하다 이건가?’
히데키 회장이 추측한 강우진의 미래는 거의 정확했다. 현재 우진의 영점은 아카데미상에 맞춰져 있고 그것을 위한 발판으로 칸 영화제 준비에 돌입했으니까.
이때.
-스윽.
등을 소파에 움푹 기대던 히데키 회장이 말을 추가했다.
“물론 내가 움직이는 건 그것만이 아니지요. 자세한 건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저 나의 과거에 관한 애착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늙은이의 방비책이라 봐주면 돼요. 그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1000억도 아깝지 않거든.”
“···”
“그리고 강우진씨에겐 은혜를 입은 게 있지요. 그는 모르겠지만. 시작은 그러했지.”
“!!!”
여기서 최성건의 머릿속 전구가 띵 켜졌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곧 그의 뇌가 방금 불현듯 떠오른 것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과거 그리고 은혜. 소중한 건 뭘 말하는진 모르겠다만···우진이와 히데키 회장은 아주 예전부터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거야.’
명백한 오답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지. ‘낯기생’ 위기 당시 우진이의 그 확고함과 여유 황당하기 그지없는 히데키 회장의 등장 투자금까지. 쿄타로 감독이나 아카리 작가와 연관성이 있는 줄 알았는데···우진이와 실이 연결됐을 줄이야.‘
최성건은 오답노트를 신명나게 휘갈긴다. 참고로 비슷한 인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쿄타로 감독이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최성건은.
‘우진이의 일본어 일본 수어 실력. 무조건 그것과 관련이 있어. 지금 이 양반이 투자를 제안하는 것도 그래. 아무 연이 없다면 일어날 수 없는 그림이라고. 은혜가 있댔나? 우진이와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히데키 회장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몰라 모르겠다. 사이즈가 너무 커서 솔직히 미치도록 궁금한데 손을 대기가 껄끄럽다. 어쨌든 이 양반이 bw 엔터가 아니라 우진이한테 돈을 쏟겠다는 건 확실해.’
착오가 착각으로 변질됐고 확답으로 결론 난다.
‘어떤 거물을 만나도 늘 별수롭지 않던 우진이의 모습- 그럴 만했네. 히데키 회장 정도와 연이 있다면 어지간한 거물들도 잔챙이로 보이지.’
이때.
-스윽.
자세를 고친 히데키 회장의 까끌한 음성이 던져졌고.
“그렇다 해도 이 건을 대충할 생각은 없어요. 대표님에게 제대로 사업 계획서나 제안서를 받을 생각이고.”
“···물론입니다.”
“긍정적으로 갈 수 있겠어요?”
최성건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것들은 최대한 빨리 전달 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다시금 미소를 띤 히데키 회장이 말을 추가했다.
“이 대화는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이 시각 호텔의 화장실에선.
“···”
덤덤한 얼굴인 자기도 모르는 사이 더욱 존재감이 거대해진 강우진이 볼일을 본 뒤 손을 씻고 있었다.
-솨아.
당연히.
‘와 씨. 최고급 호텔은 화장실도 지리네. 뭐냐 여기? 이거 수도가 금색인데 진짜 금인가?? 아니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후.
‘낯기생’의 대본리딩은 늦은 오후가 돼서야 마무리됐다. 열기는 뜨거웠다. 쿄타로 감독과 아카리 작가 포함 제작진의 표정이 그랬고 참여한 수십 배우들 역시 진중하기 짝이 없었다. 덩달아 기자나 관계자 외 백여 명 참석자들도 마찬가지.
뭐가됐든.
-짝짝짝짝짝짝짝짝!
리딩이 끝난 뒤 홀엔 강렬한 박수가 번졌다. 당연히 포커페이스인 강우진 역시.
‘하- 끝났다 개빡셌네.’
속내와 달리 묵묵하게 박수에 동참했다. 그 사이 일본의 탑배우들은 강우진을 힐끔대기 바빴다. 모두의 억측 생각 추측 걱정 등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대본리딩이었으니까.
‘···이대로 촬영까지 가도 되는 건가? 아니 그럴 순 없어. 강우진과 같은 씬에 잡힌다면 단박에 티가 날 거야.’
‘반할 뻔했어! 아니 반했어! 강우진 내 생각보다 몇 배는 더 멋있잖아??!’
‘우린 부족하지 않았다. 그저 강우진만 두드러졌을 뿐이야. 그런데 왜 패배감이 드는 건가.’
제각각 배우들의 고뇌가 깊어질 쯤 대본리딩을 진행하던 홀 내부는 급격하게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뒷정리를 위해 수십 제작진들이 움직였고 기자들은 사진을 찍었고 백여 명인 관계자와 스탭들은 홀을 빠져나가거나 서로 대화를 시작했다. 히데키 회장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중반부에 빠진 모양.
여기서 제작진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리던 새치 가득한 쿄타로 감독은.
-스윽.
강우진을 제외한 주연 배우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나같이 충격이 점철된 표정이었다. 이에 쿄타로 감독은 만족했고.
‘제대로 채찍질이 된 건가?’
코끝 안경을 추켜 올리던 아카리 작가가 거들었다.
“역시 우진씨의 캐스팅은 정답이었군요. 배우분들 전부 느낀 바가 많은 얼굴이에요.”
“강우진씨가 신인이기에 한국 배우라서 느낀 바가 가중됐을 겁니다. 거친 방법이지만 저들에게 분명 자양분이 되겠죠.”
쿄타로 감독이 우진을 캐스팅한 이유의 일부분. 그는 퇴화하는 일본 연예계와 배우들의 현 모습을 꼬집고 싶어했었다. 그렇기에 이미 배우들에겐 강우진의 간단한 소개는 마친 상태였다.
‘강우진은 십수 년 숨겨져 있다가 최근 돼서야 단편을 찍었고 그로 인해 빛을 보고 있다. 대본리딩때 그와의 연기 허들을 느껴보기 바란다.’
덕분에 ‘낯기생’의 일본 탑배우들은 우진의 연기를 더욱 심도깊게 봤다. 결과적으론 본인들의 실력을 실감했다.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나 배우들을 훑는 쿄타로 감독은 상관없었다.
‘삐뚤어진다면 그 배우의 그릇이 작다는 거겠지.’
배우 몇 명 빠져나가도 한둘 배우가 각성한다면 몇 배가 더 이득이니까. 다행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배우는 없다. 곧 쿄타로 감독의 시선이 최성건과 얘기 중인 강우진에게 닿았다.
‘···감독으로서 욕심이 안 날 수 없는 배우다. 그가 현장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해결돼.’
신뢰감이 폭발한다.
이 순간.
“자자! 감독님 작가님! 배우님들! 여기 앞으로 모여주세요!!”
조감독이 일본어로 크게 외쳤다. ‘낯기생’의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함이었고 중간의 쿄타로 감독을 시작으로 수십 인원들이 뭉쳤다.
그리고 ‘낯기생’의 대들보인 ‘이요타 키요시’ 강우진이
“우진씨 이쪽으로.”
쿄타로 감독의 바로 옆에 섰다.
그렇게 단체 사진을 찍은 뒤 배우들은 하나 둘 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감독과 작가에게 인사를 한 뒤 강우진까지 스친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날 뵙죠.”
“예 고생하셨습니다.”
대부분이 심각했다. 하지만 딱 한 명.
“강우진씨!”
계속해서 텐션이 높던 계속해서 우진에게 극진한 애정을 보이는 여배우만 달랐다.
“혹시 라인 하세요?”
“아니요. 안 합니다.”
“그럼 인스타로 연락해요! 친해져야죠 우리!”
일본에서도 단연 탑여배우로 꼽히는 우라마츠 미후유였다. ‘낯기생’에선 또라이급의 ‘호리노치 아미에’ 역을 맡았다. 한국으로 치면 홍혜연쯤 되려나? 그녀는 눈이 컸으며 피부가 하얗고 입술이 도톰했다. 보기엔 청아한 느낌이지만 말투에는 거침이 없었다.
“저 사실 꽤 예전부터 우진씨 좋아했어요 아아 같은 배우로서요. DM 보낼게요!”
눈웃음과 함께 양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그녀. 강우진은 무심하게 인사를 받았지만 속으로는 뭐지? 싶었다.
‘어우 심장이야 깜짝 놀랐네. 되게 시원시원한데? 나야 땡큐지만.’
금세 진정되긴 했다. 일본 탑배우가 생소해서겠지. 곧 우진의 옆으로 최성건이 붙었다.
“우진아 감독님이나 작가님한테 인사는 했냐?”
“예 대표님.”
“우리도 가자. 근데 쟤 우라마츠 미후유가 뭐래?”
“친해지잡니다. DM 보낸다고.”
픽 웃은 최성건이 엄지를 세웠다.
“알지? 미후유 저 여배우 인기로 치면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에 껴. 그런 애가 먼저 연락처를 따? 크- 인기 좋네? 친해지고 뭐고 다 좋은데 스캔들 관리만 좀 하자. 너 알아서 잘 하겠다만.”
스캔들? 그럴 리가. 어쨌든 생각 보니 신기하긴 한 강우진이었다. 몇 달 전엔 해봤자 시커먼 불알친구들의 연락이나 오가던 핸드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의 탑배우들을 넘어 일본의 탑들까지 저장됐으니까.
‘겁나 글로벌해졌네.’
그의 인맥도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일본 도쿄에서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한 강우진은 한 대기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의상은 흰 셔츠 위로 초록색 계열의 조끼 니트를 입었다. 풀메이크업에 헤어도 힘을 줬다.
대기실에 있는 그는 혼자였고.
“흠-”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 출력되는 글자 중 눈에 띄는 한 줄.
-[팬 사인회 순서]
예정된 팬 사인회를 온 것.
이때였다.
-덜컥!
대기실 문이 열리며 단발의 한예정이 얼굴을 빼꼼 내민다.
“오빠 초대된 일본 팬들 300명 풀이래요.”
이미 들은 바가 있기에 우진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알았어.”
“근데요.”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강우진과 시선을 맞춘 한예정이 약간 의미심장하게 말을 추가했다.
“외부 광장엔 700명 넘게 몰렸다는데요?”< 낯선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