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종 (2) >
강우진은 승합차 안이었다.
위치는 정신없는 헐리웃의 도로 위. 우진이 탄 승합차는 큰 편이었지만 의외로 타고 있는 인원은 조촐했다. 강우진과 최성건 고용한 운전사 그리고 통역을 포함한 bw 엔터 직원 두 명.
나머지는 전부 숙소에서 대기 중.
와중 창밖을 내다보는 강우진은 위아래 정장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없지만 구두는 신었다.
“···”
포커페이스가 절절한 얼굴.
‘워- 사람 개많네. 역시 헐리웃인가? 저 정도 인파는 처음 본다.’
다만 내면으로는 개미 떼처럼 몰린 외국인들을 보며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각종 인종의 저 어마무시한 사람들은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양쪽에 박힌 촘촘한 건물들도 신기했다.
아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다.
버스정류장 횡단보도 등등. 분명 모두 한국에도 있는 것들인데 느껴지는 건 달랐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
이때.
“우진아.”
조수석에 앉아 다이어리에 아까부터 뭔가를 적던 꽁지머리 최성건이 고개를 돌렸다.
“내비게이션 상으론 10분 뒤 도착인데 길이 겁나 막혀서 더 걸리겠다. 저어기 간판은 보이지? ‘위너 무비 픽쳐스’라고 박힌 거.”
강우진이 최성건의 검지를 따라 저 멀리 건물 옥상에 보이는 간판을 확인했다.
“예 보입니다.”
“저기야 저기. 어후- 뛰어가는 게 백 배는 빠르것네.”
확실히 간판이 눈에 보일 정도면 거의 다 온 듯하다. 그래도 길이 막히고 있으니 몇십 분은 더 소요될 것. 따라서 우진은.
“흠-”
천천히 다리를 꼬며 무릎 위에 있는 쪽대본을 들어 올렸다. 당연하겠지만 바로 옆에 회오리치는 검은 사각형이 붙었다. ‘위너 무비 픽쳐스’ 쪽에서 제공한 것이었고.
‘시작 전에 한 번 더?’
코앞으로 닥친 스크린 테스트를 대비할 생각인지 강우진은 대뜸.
-푹.
검은 사각형을 검지로 찔렀다. 삽시간에 그의 배경은 꽉 막힌 도로에서 한없이 컴컴한 아공간으로 교체됐다.
익숙한 아공간에 진입한 우진이 기지개를 쭉 켠다.
“아으-!!”
얼굴에 가득했던 컨셉질도 푼다. 퍽 편해진 우진이 여러 흰 사각형이 뜬 곳으로 걸었다. 그중 제일 마지막에 보이는 것에 시선을 맞췄다.
-[10/쪽대본(제목: 불명) F급(판단 불가)]
-[*완성도가 매우 낮습니다. 손상된 대본이나 시나리오입니다. 100% 리딩은 불가능합니다. (약 30% 구현가능)]
꽤 오랜만에 보는 문구. 강우진이 제일 처음 아공간에서 리딩(경험)했던 것도 쪽대본이었다. 이어 강우진이 별수롭지 않게 쪽대본 흰 사각형을 선택했다. 금세 눈에 보이는 글자들이 바뀐다.
나오는 배역은 단둘.
뭐 이미 리딩(경험)은 해봤지만 아공간의 특성상 반복할수록 좋다.
거기다.
“묘하게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단 말이지-”
몸이 유연해짐을 느끼는 우진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만 추측은 가능했다. 아마 습득한 ‘무술’이 성장하는 걸 테지. 당연히 아공간의 능력일게 빤했다.
어쨌든.
-스윽.
강우진이 쪽대본 속 배역을 선택했다. 곧 아공간 전체로 로봇 같은 여자 목소리가 퍼졌다.
[“···준비 완료. 손상된 대본이나 시나리오입니다. 구현도는 약 30%입니다. 리딩을 시작합니다.”]
금세 무언가가 우진을 덮쳤다. 다시금 그의 시야에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금방이었다. 아공간은 아니다. 온도는 애매했다. 아니 없다고 얘기해야 하나? 강우진은 분명 어떠한 공간에 있었지만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대체로 전부 흐릿했기 때문.
그런 곳에 우진이 서 있다. 특이하게도 그가 입은 복장은 선명했다. 정장. 그런 그의 주변은 사람 몸집만 한 거울들이 곳곳에 박혔다. 흐릿한 탓에 거울에 비친 건 알 수 없다. 바닥은 갈색. 천장은 검은색. 넓이는 가늠이 어렵다.
그리고.
-스윽.
순간 거울과 거울 사이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키는 강우진과 비슷할까? 마찬가지로 정장인데 얼굴엔 실루엣 빼곤 전부가 회색이다. 눈코잎 따위 애초부터 없다는 듯. 인물을 보자마자 공간에 선 강우진에겐 몇 가지가 명확해졌다.
좀 더 정확하게는 감정이 때려 박힌다.
시작은 인지. 중간은 살기. 끝은 제거.
그 세 가지가 멈췄던 강우진을 움직이게 했다. 다른 부수적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직 하나.
제거.
지금 강우진의 머릿속엔 목적만이 가득 찼다.
따라서.
-스윽.
구두 신은 강우진의 발이 움직였고 그의 눈동자엔 은은한 살의가 담긴다. 점차 진해진다.
기민해져라. 곤두세워라. 호흡을 느껴라. 작디작은 근육의 뒤틀림을 파악해라. 목을 꺾어라. 상대는 쉽지 않다. 그러니 찰나일 것이다.
각오를 다져라.
이 순간.
-팍!
상대와 가까워진 강우진은 오른손으로 목을 노렸고 회색 얼굴인 인물은 손을 막고는 비어있는 우진의 옆구리에 무릎을 쳐올렸다. 여기서부터 묘한 공간에는
-팍! 퍽! 탁!
짧은 타격음만이 울려 퍼졌다.
‘위너 무비 픽쳐스’가 가진 흰색 건물.
전체가 내부 세트장과 스튜디오 이루어진 건물. 그중 곧 ‘라스트 킬3’의 스크린 테스트가 진행될 4층은 얼추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넓은 공간 바닥엔 빈틈없이 매트가 깔렸으며 밖에서 들어오는 강한 빛을 반쯤 차단하게끔 창문이 가려졌다. 스튜디오 동서남북엔 삼각대에 올려진 카메라가 세워졌고 중간을 기점으로 여기저기 모형 칸막이가 설치됐다.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거울을 대체한 것.
스튜디오의 입구 쪽 정면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놓였고 그 위론 몇 대의 모니터가 올려졌다. 이쪽에도 세팅된 두 대의 카메라가 보인다.
턱 봐도 규모가 상당했다.
카메라만 5대 이상이 투입됐고 스튜디오 전체로 바삐 움직이는 외국인 스탭들만 30명이 넘는다. 공들인 소품들은 또 어떤가? 과연 일반적인 오디션과는 느낌이 판이했다.
뭐가 됐든 남녀와 각 인종이 섞인 수십 외국인 스탭들은.
“솔직히 거울까지 설치할 줄은 몰랐어.”
“스크린 테스트잖아. 진짜 거울을 세팅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하하하 그런가? 그런데 카메라가 저번보다 많지 않아?”
“액션이 포함된 테스트라 그럴 거야.”
각자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세팅을 마무리한다.
“오늘 참가하는 배우 중에 한국 배우가 추가됐다며?”
“그렇다고 들었어. 갑작스럽긴 한데 조지 멘데스 감독이 워낙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하니까.”
“그래도 조금 갑작스럽네. 애초 시나리오엔 중국계 인물로 나와 있잖아. 심지어 얘기도 없던 한국 배우라니.”
“난 한국이 친근해. 작년에 서울에 다녀왔거든. 하지만 한국 배우가 무술을 잘한다는 인상은 없어. 헐리웃에서 보기 힘들기도 하고 데이터도 없으니까.”
“하긴 중국 배우야 자주 보이지만 한국 배우는 드물지. 구색 맞추기일까?”
“아마도? 내 생각엔 메인은 원래 오기로 한 중국 배우들일 거야. 한국 배우는 실험 삼아?”
한창 스탭들이 스튜디오를 거닐고 있을 쯤 유리문이 열리며 외국인들이 재차 입장했다. 얼추 열댓 명. 다만 이번 무리는 나이가 퍽 들어 보인다. 그중 선두는 산타 닮은 남자.
즉 이번 스크린 테스트의 총괄인 조지 멘데스 감독이었다.
조지 감독의 주변 인물들은 대충 영화사 간부나 촬영팀의 키스탭들. 그 뒤로 눈에 익은 여자 캐디(캐스팅 디렉터) 메건 스톤과 그녀의 팀 영화 제작에 전체를 조율하는 프로듀서 팀이 따랐다. 이 두 팀은 한국과 비교해 헐리웃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퍽 대단했다.
특히 프로듀서 팀의 입김은 태풍 수준.
애초 헐리웃의 시스템 자체가 한국과는 전혀 다르며 투자금의 규모 역시 상상 초월. 그렇기에 영화사 투자사 감독 배우 등 제작 전반적인 것을 도맡는 프로듀서 팀의 힘이 막강할 수밖에 없다. 추가로 헐리웃은 한 프로듀서 팀이 여러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번 ‘라스트 킬3’의 프로듀서 팀 역시 동시에 몇 작품을 진행하는 중.
곧 캐디 팀 리더인 갈색 단발 메건 스톤이 세팅된 스튜디오를 보다가 팔짱 낀다. 그리곤 옆쪽에 선 프로듀서 팀의 리더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조촐한데?”
그러자 프로듀서 팀의 리더가 픽 웃는다. 키가 190이 넘는 장신에 흑인인 남자였다. 이름은 조셉 펠튼.
“스크린 테스트 한 번을 위해 거울 48개를 준비하라는 거야? 낭비야 그건.”
“그래도 인물 주변만이라도 설치하지 그랬어.”
“준비에서 돈을 아끼면 촬영의 퀄리티가 높아질 거야. 그보다 갑자기 낀 한국 배우. 메건 네가 추천했다면서?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있는 거지?”
“글쎄. 난 그저 조지 감독이 인상 깊게 본 배우를 컨택했을 뿐이야.”
“···감독이 한국 배우에 관심을 가졌다고? 실력이 좋은 거야? 아니면 마케팅용이야?”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 네 일이나 신경 써. ‘라스트 킬3’ 말고도 굴리는 작품이 많잖아?”
장신의 조셉이 어깨를 으쓱였다.
“진정해. 그저 요즘 한국의 배우에게 관심이 생겼을 뿐이야. 당연히 중국에서 나오는 자금을 무시할 순 없지만 요즘 배우 쪽은 한국 쪽이 퀄리티가 좋다고 느껴지거든. 커지는 한류를 보면 한국의 문화 역시 무시할 수 없고.”
“흐름은 그렇지.”
“이번에 마일리 카라도 신작 홍보를 위해 한국에 갔잖아? 점차 대중들 사이로 한류의 니즈가 높아지고 있어. 그래서 이번에 부른 한국 배우는 유명한가? 헐리웃에서 경력은 있어?”
약간 귀찮았는지 단발의 메건이 직원들에게서 투명 파일을 받아 건넸다.
“유명한 편이지만 경력은 짧아 필모가 특이해. 조셉 네가 직접 봐.”
피식한 흑인 조셉이 받은 파일을 펼쳤다. 순간 그의 두 눈이 커진다. 내용이 퍽 신선했으니까.
“···1년? 올해 데뷔했다는 건가? 뭐야 신인이잖아? 이런 배우를 불렀어?”
그때였다.
“스탠바이!!”
한 남자 스탭이 스튜디오 전체로 외쳤다. 그러자 마무리하던 수십 인원들이 주르륵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결과적으론 수십 명이던 스탭들이 반 정도로 줄었고 그들의 자리는 정면 기다란 책상 뒤쪽이었다.
-스윽.
이어 배 나온 조지 멘데스 감독과 같이 온 키스탭들은 스튜디오에 세팅된 카메라 주변에 섰고 조지 감독과 몇몇은 배치된 기다란 책상에 앉았다. 그가 앉으니 산타클로스가 나타난 것 같다.
그런 조지 감독이.
“음- 그럼 시작합시다.”
몰린 스탭들을 돌아보며 영어로 읊조렸다.
“스턴트 코디네이터 팀 세트 확인부터 해요.”
곧 그의 앞에 배치된 몇 대의 모니터가 켜지며 스튜디오 곳곳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한편.
강우진이 처음 이 4층짜리 건물에 도착했을 땐 크게 떨리거나 하진 않았었다.
‘오- 여기가 스크린 테스튼지 뭔지 보는 곳인가? 평범한디?’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1층에 들어서서 건물의 내부를 보자마자 입을 쩍 벌리는 강우진. 이 건물 전체가 세트장이며 스튜디오일지는 몰랐으니까. 심지어 들락이는 스탭들 전부가 외국인이다 보니 서서히 우진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역시 현장은 천지 차이였다.
덕분에 강우진이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쯤엔 적당한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이건 스크린 테스트에 관한 긴장이 아니었다. 첫 경험에 따른 떨림이었다. 익숙지 않은 나라 언어가 다른 스탭들 규모가 하늘과 땅 차이인 현장 익숙지 않은 긴박한 분위기 등등.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허당으로 보일 순 없다.
‘아오- 씨 마인드 컨트롤 겁나 해. 몰라 그냥 여긴 강남이야. 어 강남.’
엘리베이터 안 우진은 티 안 나게 심호흡을 하면서도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켰고 시니컬함을 극도로 끌어 올린다. 그랬더니 평소보다 더 진한 냉정함 냉철함이 온몸에 퍼졌다.
오케이 컨셉질은 완료.
곧 강우진은 안내받은 대기실에 당도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대기실 안에 있던 다른 배우들이었다. 합쳐서 3명. 전부 강우진과 같은 정장을 입었다.
‘엥? 뭔가- 일본인은 아닌 것 같고. 중국 쪽인가.?’
같은 아시아지만 일본은 아니었다. 뭐랄까 묘하게 중국스러운 얼굴들. 어차피 한국 배우는 강우진 혼자인 건 확실했기에 우진은 먼저 도착해 있는 배우들은 중국인으로 확정 지었다.
‘유명한가? 난 일단 모르겠는데. 근데 표정들 더럽게 살벌하네.’
중국 배우들의 얼굴은 굳은 상태. 서로는 잘 아는 모양이라 모여 있지만 3명의 배우들 모두 방금 문을 연 한국 배우 강우진을 쳐다본다. 아니 노려보는 것에 가깝다. 그들 뒤쪽 배우들의 스탭들은 뭐라뭐라 자기들끼리 수군대기도 한다.
그때.
“왕방씨부터 시작할게요.”
외국인 남자 스탭의 외침으로 중국 배우 중 한 명이 대기실을 나선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우진의 마음속엔.
‘스읍- 이것들 봐라.’
뭔가 짜증이 치솟았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국가 대항전에 대표로서 나온. 뭐 국가대표로 말하긴 판이 그리 크진 않지만 그래도 지는 건 좀 빡치잖아? 이내 강우진은 표정을 더욱 단단하게 하면서도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더불어.
‘몰라 일단 전부 재낀다.’
결과는 나중 일이고 현재는 저 중국 배우들을 이길 생각만이 가득해졌다. 승부욕 또는 호승심. 혼자만의 전쟁 또는 전투. 단어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 이는 작품에 합류하겠다는 욕심이 아니었다. 순전히 본능에 따른 욕망일 뿐. 뭐 이 상황을 아는 건 최성건과 강우진 둘 뿐이긴 하다만.
‘지면 한국 가서 발 뻗고 못 잘 듯.’
우진은 이 현장에서 단연 돋보일 것을 결심했다.< 별종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