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 (1) >
키가 190은 넘어 보이는 장신의 흑인 프로듀서 조셉 펠튼이 강우진 앞에 섰다. 심지어 명함까지 건네고 있다. 워낙 조셉의 덩치가 좋아선지 우진이나 조셉의 뒤쪽 프로듀서 팀 외국인들이 작게 느껴질 정도.
곧 강우진이 속으로 살짝 움찔했다.
‘어우- 씨 놀래라. 바로 앞에서 보니까 진짜 개크네. 김대영은 어깨도 못 펼 듯.’
아까 전 스튜디오에서도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막상 눈앞에서 보니 조셉의 몸집이 너무도 어마무시했기에. 그래도 이미 짙은 컨셉질이 장착된 우진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조셉이 내민 명함을 받았다.
“네 강우진입니다.”
조셉이 뜬금 우진과 경쾌한 악수를 나눈다.
“하하. 위의 테스트는 대단했어요 나름대로 프로듀서로서 경력을 꽤 쌓았는데 그런 신선한 광경은 처음입니다.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뭐지. 칭찬인가? 일단 우진은 적당히 그의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때 뒤쪽에 섰던 꽁지머리 최성건이 미소를 장착한 채 우진에게 속삭였다.
“누구야? 가드?”
“아니요 스크린 테스트때도 있던 프로듀서분이요.”
“아! 프로듀서?? 허- 이분이?”
최성건의 움직임을 파악한 조셉이 명함을 재차 꺼냈다.
“프로듀서 조셉 펠튼이라고 합니다. 강우진씨의 매니저신가요?”
명함을 받은 최성건이 자신의 것도 꺼낸다. 약간 어색한 영어지만 목소리에 힘은 가득하다.
“예 매니저 겸 강우진씨의 소속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오! 그런가요? 에이전트 대표시군요! 반갑습니다 환상적인 배우를 케어하고 계시는군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하 대표님도 테스트 과정을 보셨어야 했는데. 여기 배우님이 현장을 발칵 뒤집으셨어요!”
장난기가 있는 건지 텐션이 높은 건지 조셉 펠튼은 인도에서 시원시원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 그를 보며 최성건은 웃음을 보였으나 속으로는 진지했다.
‘과연 헐리웃의 프로듀서라 이건가? 거리낌이 없고 호탕하네. 뭐 이 거대한 시장의 프로듀서라면 그럴 만하지.’
최성건은 조셉 펠튼의 힘을 어렴풋 눈치챘다. 모든 파트가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헐리웃에선 프로듀서가 실세 중의 실세였다. 더군다나 헐리웃의 프로듀서들은 한 번에 한 작품만 관리하지 않는다. 능력이 좋을수록 덩치 큰 작품 여러 개에 관여한다.
‘‘라스트 킬’ 시리즈의 프로듀서라면 이 헐리웃 바닥에서 알아주는 프로듀서 중 하나겠지.’
빠르게 추측하는 최성건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현재 조셉 펠튼이 핸들링하는 헐리웃 작품은 총 3개였고 이 헐리웃 판에서 조셉이라는 프로듀서를 모르는 인물은 없다 봐도 무방했다.
그런 장신의 조셉이 미소 띤 얼굴로 강우진에게 다시금 말했다.
“음- 나는 캐스팅 디렉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배우의 텐션과 에너지를 볼 줄 알아요. 당신이 테스트에서 보인 에너지와 확고함은 희소합니다.”
강우진이 덤덤하게 답했고.
“그렇습니까?”
조셉 펠튼이 우진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는 목소리를 죽였다.
“저 테스트에서 본 중국 배우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뽑힌 대표였고 감독을 포함해 영화사 간부들의 생각은 같았습니다. 중국 배우가 맡게 되는 건 거의 확정이었어요. 당신은 엑스트라였죠.”
“···”
“그것을 뒤집은 겁니다. 단 한 번 딱 하나의 씬으로. 우진씨는 그 중국 배우들에게 배역을 ‘쟁취’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양보’한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승리가 아닌 승낙을 한 거죠. 감독이 아닌 우진씨가 말이죠.”
속삭이던 조셉이 엄지를 추켜 올렸다.
“결코 자주 볼 수 없는 장면이었어요. 당신의 무술도 당신의 에너지도.”
이어 뒤쪽 프로듀서 팀 인원이 시간을 보이며 액션을 취하자 바쁜 모양인지 조셉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었다.
“이 기분이라면 같이 맥주라도 나눠야 하는데 안타깝네요. 강우진씨 언제고 다시 헐리웃에 왔을 때 제가 준 명함을 떠올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시나요?”
“아- 비행기 시간이 남아서 잠시 주변을 구경할까 합니다.”
단숨에 미소가 짙어진 조셉이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헐리웃의 명소 중 하나인 놀이동산처럼 꾸며진 초대형 영화사가 위치해 있었다.
“내부를 더 꼼꼼히 구경할 수 있게 제가 연락을 해둘게요 제 이름을 말하면 입구에서 직원의 안내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즐거운 헐리웃이 되시길.”
재차 우진과 악수를 한 조셉 펠튼이 몸을 돌려 다시금 건물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멀어진다. 아마 ‘라스트 킬3’ 관련 할일이 남은 모양. 와중 그와 함께 왔던 무리 중 외국인 스탭 몇몇이 강우진을 보며 수군댔다.
“저 한국 배우가 지금 조셉의 명함을 받은 거야?”
“그러게 놀랐어. 헐리웃 탑배우들이면 몰라도.”
“심지어 오늘 처음 본 한국 배우에게?”
반면 정장의 강우진은 받은 명함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그리곤 최성건에게 시선을 맞췄다.
“저 사람이 말한 곳으로 가볼까요?”
“다 당연하지 임마. 어후 숙소에 애들도 데려가야겠다. 행여나 촬영이라도 하고 있으면 대박인데.”
이쯤 강우진과 최성건이 기다리던 승합차가 갓길에 세워졌다.
한편.
-스르륵.
방금 엘리베이터에 오른 조셉 펠튼은 같이 움직이는 무리 중 바로 옆에 선 민머리 남자 외국인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로버트 저 강우진이란 배우. 세세하게 조사 좀 해봐. 지금까지의 발자취부터 한국에서의 유명세 소문 작품들 주변의 인물들까지. 확실히 파악해 둬야 오늘 같은 실패가 반복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시는지? 물론 테스트땐 대단하긴 했는데···번지는 한류 때문입니까? 아니면 마케팅을 생각하시는?”
“한류- 그래 그 부분도 무시할 순 없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현재는 직감이라고 밖엔 설명하지 못하겠군.”
“직감이요?”
“저 배우가 한류의 규모를 수 배로 폭발시킬 것 같아 빠른 시일 내에.”
픽 웃은 장신의 흑인 조셉이 작게 답했다.
“오늘 준 명함은 그때를 위한 거지.”
이후.
17일 점심쯤 꽤 길었던 촬영을 마친 ‘우리네 식탁’팀이 한국에 도착했다. 공항에 몰린 기자들이나 팬들만 수백이 넘어갔다. 어마어마한 인파. ‘우리네 식탁’의 출연진이 LA에서 한식을 알리고 있을 때도 한국에서는 나름 ‘우리네 식탁’ 소식이 속속 퍼졌었기에 기자들은 더욱 과열됐다.
“윤 PD님!! LA의 지역신문에 실렸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다른 소식은 또 없나요??!”
“LA의 현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이쪽!! 이쪽이요!! 이쪽 좀 봐주세요!!”
“화린씨!! 괴한을 제압해준 강우진씨와는 LA에서 어떠셨나요!!”
“LA의 셰프가 우진씨의 음식을 극찬했다는 기사를 봤는데요!! 홍혜연씨!! 그 셰프를 직접 봤습니까?!”
가드들에 막히긴 했으나 수백 기자들은 쉴새없이 질문들을 던졌고 몰린 팬들 역시 선물이나 환영을 정신없이 뱉어댔다. 공항 입국장은 단숨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덕분에 ‘우리네 식탁’ 팀은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이때 몰린 인파 중 몇몇이 이상함을 인지했다.
“어??! 우진 오빠! 우진 오빠가 없어!”
“헐! 진짜네??”
“강우진! 강우진만 없는데??”
분위기는 금세 기자들에게도 전염됐다.
“강우진이 없어!”
“윤 PD님! 강우진씨는 어딨습니까??!”
“LA에 남아있는 겁니까?!”
“입국 절차에서 문제가 있었나??”
하지만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우리네 식탁’ 팀은 공항을 빠져나갔다. 사고를 우려해서였다.
이 부분은 금세 기사로서 인터넷에 퍼졌다.
『[이슈픽]LA에서 돌아온 ‘우리네 식탁’팀들/ 사진』
『기자들에게 손 흔드는 ‘우리네 식탁’ 출연진들 다들 피곤한 표정』
‘우리네 식탁’ 출연자들이 돌아왔다는 거나 공항에서 찍힌 사진이 주를 이뤘지만 그중 강우진이 없다는 것도 퍽 시끄럽게 다뤄졌다.
『오늘 한국에 복귀한 ‘우리네 식탁’팀···그런데 강우진은 없다?』
『[스타포토]강우진 혼자만 LA에 남았다?』
당연하겠지만 삽시간에 유언비어와 찌라시가 돈다. 뭐 기자들로서는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순 있었다. 강우진만 복귀하지 않았으니.
『‘우리네 식탁’팀 전원 돌아왔지만 강우진만 없는 이유···혹시 LA 쪽에 스케줄이 생겼을지도』
가뜩이나 LA에 있을 무렵 불타올랐던 강우진의 이슈들이 다시금 몸집을 불린다.
『괴한의 습격에서 구해낸 영웅은 어디가고···화린만 한국에 돌아온 이유는?/ 사진』
『강우진 한국 안 왔다 글로벌 슈퍼스타 ‘마일리 카라’와 ‘강우진 부캐’ 채널의 촬영 불발 가능성↑』
한창 우진의 얘기가 시끄럽게 번지던 차에 bw 엔터가 공식입장을 내놨다.
『[공식] bw 엔터 측 “강우진 입국하지 않은 건 LA에서 잠시간의 휴식을 취한 것”』
실제 있었던 일에서 ‘라스크 킬3’에 관한 얘기만 빠졌다.
이 시각 서울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대형 승합차 안의 인원들도 강우진 소식을 얘기하고 있었다. 내일인 18일 늦은 오후에 한국 일정을 마무리할 마일리 카라와 그녀의 팀들이었다.
금발의 카라는 다리를 꼰 채 태블릿을 보는 중이었다. 정확하게는 출력되는 기사.
“강우진 확실히 내일 전에 한국에 들어오는 게 맞아?”
그녀의 약간은 냉랭한 물음에 옆에 앉은 반삭 머리 매니저가 영어로 답했다.
“그래. 그의 에이전트와 통화했어. 오늘 밤에는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고 우리와 내일 아침에 예정됐던 촬영은 문제없을 거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금발을 쓸어 넘기면서도 강우진을 상기했다. 그의 터무니없는 필모와 각종 이슈들 그리고 연기력까지.
“흠- 실제로 보면 어떨지 궁금하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보다 ‘강우진 부캐’ 채널이 제안한 건 확인해본 거야?”
“촬영 컨텐츠 말이지?”
답한 카라가 보던 태블릿의 화면을 바꿨다. ‘강우진 부캐’ 측이 보내온 촬영 컨텐츠들의 설명이었다. 그런 것을 내려보던 카라가 꼰 다리 방향을 바꿨다.
“내 곡을 듀엣으로 불러는 것. 이건 원래도 예상했던 거고. 토크를 한 뒤에 요리를 해준다는 것. 여기에서 영화 홍보 같은 걸 하면 되는 거잖아. 요리를 해준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 LA의 지역신문에 소개될 정도면 실력이 좋다는 거잖아?”
“기사 내용만 보면 미슐랭 1스타 셰프가 극찬을 했다고 해.”
“그러니까. 그런데 내가 원하는 요리를 해준다는데 정말 아무거나 말해도 괜찮을 거야?”
“글쎄. 전부는 힘들겠지. 강우진은 본업이 셰프가 아닌 배우니까.”
“···그런데 이 ‘아바타 요리’는 뭐야? 설명으론 내가 요리를 하고 강우진이 알려준다는데 상상이 안 돼.”
“말 그대로야. 재미를 위한 컨텐츠 같은데 강우진의 말대로 네가 움직이며 요리를 하는 거야. 불편하면 우리 쪽에서 거절해도 되는 거고.”
설명을 들은 카라가 파란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게 얼추 5초쯤. 뭔가 입꼬리를 씰룩인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재미있을 것 같은데?”
“카라 진지하게 생각해. 넌 요리를 못 하잖아.”
“그걸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거 아니야?”
“고생은 그 강우진이 하겠지. 잘 생각해 한국의 수많은 팬들이나 언론이 집중하고 있어.”
참고로 마일리 카라는 한국에서의 일정동안 각종 행사나 명품 브랜드의 파티 인터뷰 등등은 모두 참석했지만 너튜브 채널은 출연하지 않았다. 내일 ‘강우진 부캐’ 채널을 출연하는 게 최초.
“그래 알고 있어. 어쨌든 모두 하겠다고 전해줘. 기대하고 있다고.”
반삭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알았어. 토크에 쓰일 멘트와 요리 등을 생각해 둬.”
“응.”
이때였다.
-♬♪
그녀의 핸드폰이 짧은 신호음을 뱉었다. 메시지였고 상대를 확인한 카라가 파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조셉??’
메시지를 보낸 것은 헐리웃의 유명 프로듀서 조셉 펠튼이었다. 금세 장신의 흑인 조셉 얼굴이 떠오른 카라가 내용을 확인했다.
-조셉 펠튼: 카라 한국에서의 시간은 어때? 네 SNS를 보다가 어떤가 싶어서 연락했어. 한국의 배우가 가진 너튜브 채널에 출연한다면서? 내가 요즘 한국에 관심이 좀 생겼는데 기대할게.
고개를 갸웃한 카라가 알겠다는 식의 답장을 보내자 조셉의 메시지가 재차 도착했다.
-조셉 펠튼: 나중에 돌아오면 연락해 한국이 어땠는지 맥주나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메시지를 본 카라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곤 옆자리 반삭 매니저에게 물었다.
“···조셉 말이야. 최근 한국에 관심 가졌다는 얘기 들은 적 있어?”
핸드폰을 보고있던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이번에 추가로 ‘라스트 킬3’에 프로듀싱을 맡았다곤 들었어 작품만 몇 개를 굴리는데 한국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잖아.”
“그렇지?”
카라가 금발을 작게 긁었다.
“무슨 꿍꿍이지?”
같은 날 밤.
여전히 북적북적한 공항을 빠져나온 남자가 눈에 띈다. 모자를 푹 눌러썼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기자들이나 팬들이 몰릴 것을 대비해 도둑 입국한 강우진이었고.
‘스읍- 하 그래 이 공기지. 아오 진짜 역시 집이 최고다!’
티 안 나게 감격하던 강우진이 준비된 승합차에 올랐다. 왁자지껄한 수십 기자들의 모습은 안 보였으나 우진은 이쪽이 편했다.
‘길었다 진짜.’
지금은 그저 한국에 돌아왔다는 기분을 혼자서 만끽하고 싶었다. 이때 조수석에 앉은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최성건이 몸을 돌리며 강우진에게 핸드폰을 보였다.
“아아- 우진아 청룡에서 전체 후보 발표했네.”
그의 핸드폰 화면엔 청룡영화제 측이 공식적으로 쏘아 올린 올해 수상 후보 배우들이 기사로 출력되고 있었다. 물론 금세 영화계 언론이 따라붙었다.
『[영화제]청룡영화제 사무국 측 올해 영화제의 핵심 후보들 공개···신인상 후보에 눈에 띄는 ‘강우진’의 이름』
『데뷔 1년 만에 청룡 신인상 후보에 오른 강우진 그런데 다른 상 후보에도 그가 보인다』
이에 질세라 몇십 분 후 대종상도 후보를 공개했다. 두 영화제 모두 열흘 정도 남은 상태였으니까.
『[무비톡]청룡에 이어 대종상까지···두 대형 영화제 신인상 후보 모두에 보이는 ‘강우진’』
특이한 것은 강우진의 언급이 매우 폭발적이라는 것.
마치 강우진이 올해 연예계의 연말을 장식하는.
『청룡 대종상만 벌써 2관왕 기대↑ 방송사 연기대상들까지 합치면···강우진 데뷔 첫해에 사고 치나?』
메인 간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연말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