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 (5) >
‘실종의 섬’ 대형 세트단지 내부의 탈의실에서 강우진이 나왔다. 군복을 입은 모습. 그 위론 롱패딩을 걸쳤다. ‘실종의 섬’ 촬영에선 익숙한 모습이지만 조금 변한 게 있다면 그의 군복 상태였다.
많은 핏물이 묻었고 헤졌다.
이것만 봐도 ‘실종의 섬’ 촬영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알 수 있었다. 우진은 건물을 나가기 전 기지개를 쭉 켰다.
‘아으! 가보자고-’
꿈 같던 헐리웃과 마일리 카라 등 현실 같지 않던 것에서 빠져나와야 했으니까. 이젠 강우진의 본업인 연기만이 가득한 스케줄이었다. 곧 강우진이 포커페이스를 다시금 점검한 뒤 촬영 현장으로 움직였다.
-스윽.
금세 강우진의 눈에 현장이 담긴다. 세워진 반사판과 조명 여러 카메라들 붐마이크 각종 기기들 모니터를 보는 권기택 감독 그의 주변에 몰린 수십 스탭들.
촬영은 이미 진행 중이었고.
“하나둘- 큐.”
잠시간 현장을 보던 우진은 뭔가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촬영장이 제일 마음은 편하네. 응? 나 언제부터 촬영장이 편했더라?’
요상했다. 예전엔 촬영장에만 들어서면 긴장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워낙 주변 환경이 무지막지하게 변해서 그런가? 뭐 그런갑다 하며 강우진이 적당히 넘길 때였다.
-톡톡.
누군가 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조감독이 웃고 있었다.
“우진씨 저 씬 방금 시작했어요. 대기 천막 가 계시면 스탠바이 때 불러드릴게요.”
“아- 알겠습니다.”
답한 우진이 촘촘히 박힌 세트 건물들을 지나 퍽 커 보이는 천막 부스에 도착했다. 입구로 빠지는 삼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연달아 붙은 천막 부스 중 제일 큰 부스에 들어가는 강우진.
-스륵.
부스 내부엔 배우 대기실 겸 휴식 공간인지 책상과 의자들이 비치돼 있고 여기저기 외부용 히터가 틀어져 있었다. 입장한 우진을 반기는 것은 몇몇 스탭들과 전우창 하유라였다. 류정민 등 나머지 배우들은 지금 한창 촬영 중이니까.
곧 근육질 전우창이 우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진씨! 여기여기!”
그는 군복 위로 두터운 숏패딩을 걸쳤고 하유라는 베이지색 롱패딩이었다. 이어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는 둘에게 다가선 우진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배려 감사합니다.”
대답은 전우창이 빨랐고.
“응?? 뭐가요?”
단아한 이미지의 하유라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부른 게 단데 무슨 배려?”
의자를 빼내 앉던 우진이 낮게 답했다.
“제 스케줄 상 이탈로 인해 배우님들한테 불편함을 드린 것 같아서. 촬영 일정이나 연기적인 부분에서도요.”
틀린 소린 아니었다. 강우진이 ‘실종의 섬’에서 작은 역이면 모를까 현재 그는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우진이 맡은 ‘진선철 상병’과 배우들은 붙는 씬이 많고 초반엔 거의 떼샷이었다. 와중에 우진이 피치 못 하게 잠시 빠지게 된 것.
그렇게 되면 ‘실종의 섬’ 배우들은 강우진이 없는 씬 위주로만 당겨 찍게 된다.
뭐 애초에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는 건 아니고 중구난방 장면을 찍는 건 배우들에게 일상이긴 했다. 그래도 우진이 없는 씬을 몰아 찍다가 그가 복귀함과 동시에 다시 감정선을 되돌리는 작업은 쉬운 게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미 우진이 죽은 후의 촬영을 진행했어도 다시금 살아 있는 감정을 상기하며 연기를 펼쳐야 한다.
강우진은 그것에 관해 배우들에게 감사를 표한 것.
당연히 ‘실종의 섬’ 기획 초반에 얘기가 됐던 부분이고 배우들도 알고는 있었으나 가장 후배이면서 신인인 우진으로서는 선배들에게 다시금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지식을 전수해준 건 최성건이었다.
어쨌든 전우창이 별거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네! 됐어요 됐어. 일이잖아요 일. 거기다 우진씨 없을 때 뭐 엄청 진도 뺀 것도 아니고.”
작게 웃는 하유라가 거든다.
“응 별로 신경 쓰지 마요. 솔직히 우진씨 빠진 뒤로 이슈들 막 터지면서 ‘실종의 섬’ 홍보 엄청 됐잖아요? 그거면 할 건 다 한 거지.”
“인정! ‘마약상’ 크- 청불로 785만! 그 뒤로 ‘실종의 섬’ 엄청 언급되고 있잖아요 아니 저번에 정민이 형이 나는 뭐 없냐고 그러더라니까??”
“우창이 넌 진짜 좀 잠잠하네?”
“아! 누나 내가 평균이라고. 우진씨가 말이 안 되는 거고.”
대화 중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젓던 하유라가 묶은 머리를 풀며 우진에게 대뜸 물었다.
“이번 연말 시상식들 어디어디 가요?”
“청룡 대종상하고 연기대상은 SBC KBC 갑니다.”
“진짜 네 곳 다 가네. 우창이 넌?”
“나는 이번에 대종상은 패스. 연기대상은 MBS만요. 누나는?”
“난 청룡하고 대종상만. 연기대상은 갈 일이 없어.”
“아- 맞지. 누나는 작년부터 드라마 안 했구나 헐리웃 뺑뺑이 돈다고.”
“죽을래?”
하유라의 위협을 피하던 전우창이 강우진을 검지로 찍었다.
“왜- 맞잖아요 지금 우진씨가 헐리웃 가도 누나보다 빨리 데뷔할 듯. 혹시 또 모른다고? 우진씨 이미 헐리웃에서 컨택 받았을지도?”
“어?? 진짜요?”
속으로 움찔한 강우진.
‘전우창···얘는 은근히 감이 좋아.’
하지만 컨셉질이 짙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그럴 리가요.”
“하하하 지금은 그렇죠 지금은. 금방 헐리웃에서 우진씨 볼 수 있을걸? 내 감이 그래.”
“···우창아 너도 지금 배우인 건 알지?”
“아- 나는 헐리웃 포기. 일단 영어가 딸리잖아요. 그보다 우진씨 이번 연말 시상식 네 곳이나 가는 건가? 이야 그것도 처음 아닌가??”
“하긴 데뷔 1년 차에 시상식 가는 거 자체가 희박하지. 심지어 네 곳에 전부 수상 후보고.”
곧 미소가 짙은 전우창이 강우진에게 스윽 얼굴을 붙였다.
“데뷔 첫해에 트로피 5개 이상 쓸어 먹는 오지는 그림 볼 수 있는 건가??”
하유라가 한숨 쉰다.
“우창아 너도 배우라고.”
“알아요 근데 올해 나는 글렀어. 대신에 우진씨로 대리만족할라는 거지.”
“하···”
한숨이 깊어진 하유라가 강우진에게 시선을 맞췄다.
“근데 우진씨 준비할 건 다 했어요?”
준비할 거? 갑자기 무슨? 우진이 시니컬하게 침묵하자 전우창이 대신 답했다.
“뭘 준비해?”
“뭐긴 뭐야 턱시도나 아이템들이지. 아- 그리고.”
하유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상소감도.”
수상소감? 강우진이 속으로 되물었을 때 천막에 나타난 조감독이 외쳤다.
“강우진씨 스탠바이요!!!”
모르겠다 일단 강우진은 ‘진선철 상병’을 끄집어 올렸다.
한편 같은 시각.
신생 제작사 DM 프로덕션의 대형 회의실에 턱수염 송만우 PD가 보인다. 퍽 진중한 모습. 물론 그의 양옆엔 제작실장 등의 ‘이로운 악’ 키스탭들이 자리했다.
“···”
“···”
모두 표정이 굳었다. 그런 그들은 모두 건너편에 혼자 앉은 남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검은색 코트를 걸친 꽁지머리 최성건이었다.
“흠.”
다만 최성건은 현재 강우진의 매니저로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bw 엔터 대표로서 와 있는 것. 이유야 간단했다.
-팔락.
그는 현재 ‘이로운 악’ 측이 제안한 정식 계약서를 검토 중이었으니까. 물론 이 미팅 자체는 방금 시작된 게 아니었다. 벌써 1시간 정도 협의가 이루어진 상태. 이어 계약서를 훑던 최성건이 앞쪽 송만우 PD에게 물었다.
“PD님 이 ‘이로운 악’의 총제작비가 어느 정도 됩니까?”
단단한 얼굴의 송만우 PD의 대답은 빨랐다.
“200억 정도에서 왔다 갔다 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천천히 고개 끄덕이던 최성건이 속으로 읊조렸다.
‘200억이라- 말만 200억이고 아마 300억 가까이 되겠지. 제작진은 초반에 자금을 밝히는 걸 꺼리니까.’
요즘 수많은 기술이 포함되는 한국 드라마의 평균 제작비는 100억은 기본이었다. 거기에 탑배우들이 참여하고 해외라도 가면 200억은 가뿐히 넘는다.
‘‘이로운 악’에도 해외로케 촬영이 있어. 거기다 이건 16화가 아니라 총 12화. 그런데도 300억 정도면 꽤 어마어마하다는 거지.’
심지어 ‘프로파일러 한량’으로 초대박을 친 거물 송만우 PD의 연출.
‘이런 대작에 우리 우진이가 주연.’
‘박대리’였던 강우진이 이번엔 단독 남주. 충분히 만족스러운지 최성건이 강우진의 대리로서 송만우 PD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PD님.”
“오오 그럼?”
“예. 이대로 도장 찍으시죠.”
일어난 최성건의 아래 그가 보던 계약서의 항목이 눈에 띈다. 강우진의 몸값이었고.
-회당 8000만.
총 12화 기준 10억에 육박했다.
이틀 뒤 23일. 부여 쪽 호텔.
시간은 9시를 조금 넘겼다. 강우진은 ‘실종의 섬’ 팀이 이용하는 숙소인 고급 호텔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욱!! 크- 개꿀잠 잤네.”
기지개를 쭉 켜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 머리가 촉촉한 걸 보니 샤워를 마친 참인 듯 보였다. 일어난 지는 꽤 된 모양. 혼자 쓰는 방이라 컨셉질도 내려놨다. 곧 머리를 말리기 위해 드라이기를 든 우진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늘 그렇듯 많은 연락이 쌓여 있다.
그중에서 우진은 현재 서울에 있을 최성건의 톡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내용으로는 오늘 스케줄에 관해 변동이 생긴 것과 기자 몇 개를 같이 보냈다. 오늘 우진의 스케줄은 나름 간단하면서도 빡빡했다.
일단 ‘실종의 섬’ 오전 촬영을 해야 했다.
이탈한 만큼 틈새마다 최대한 분량을 쳐내야 했으니까. 이후 점심 무렵 서울로 복귀 그대로 소속사인 bw 엔터에 도착해 몇 가지 점검과 미팅을 거쳐야 했다.
오늘 매우 상당히 중요한 행사가 있으니까.
뒤로 스타일을 점검할 피팅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낸 뒤 예약된 샵에 도착해 멋을 부려야 했다. 이 모든 걸 오후 7시 전엔 마쳐야 한다.
그 이유는 최성건이 보내온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식]청룡영화제 오늘(23일) 열려···시상식장 앞은 이미 인산인해』
『청룡영화제 레드카펫 주변으로 자리 잡는 수십 기자들 팬들은 아침부터 오픈런/ 사진』
오늘은 청룡영화제의 개막날.
즉 오늘 밤 우진은 난생처음인 죽을 때까지 연이 없을 것 같던 한국 최대 규모의 영화제에 참석한다. 그것도 수상이 유력한 배우로서.
“어우- 씨 돌겠네.”
어젯밤에도 미친 듯이 긴장됐던 강우진의 심장이 재차 요동친다. 그러다 우진이 떨림을 희석시키고자 다른 톡들을 확인했다.
곧.
“응?”
하나의 톡에서 멈추는 강우진. 화린이 보내온 톡이었다. 내용으로는 ‘보면 전화 좀 주세요.’가 다였다. 고개를 갸웃한 우진이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은 뒤 화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 신호음은 짧았고.
“아- 다행이다.”
핸드폰 너머로 약간 상기된 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진씨랑 연락 안 되면 어쩌나 했어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요? 무슨 일이라기보다는···우진씨 지금 어디세요?”
“저 지금 부여요.”
“왜 아직도 거기 계세요?? 청룡 준비 안 하세요?”
“합니다 오전 촬영 마치고 서울로 넘어가요.”
“아아 그렇구나.”
잠시 뜸 들이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서울 오셔서 저 잠깐 볼 수 있어요?”
뭐지? 싶은 우진이 목소리를 깔며 있는 그대로로 대답했다.
“따로 시간 빼긴 힘들 것 같습니다. 소속사 들렸다가 피팅 스튜디오 샵으로 움직일 것 같아서.”
“전 오늘 쉬거든요? 제가 피팅 스튜디오나 샵으로 잠깐 가도 될까요?”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죠?”
“그- 우진씨 청룡 가시기 전에 뭐 좀 드리고 싶어서요.”
“어떤 걸?”
“그냥 작은 거요. 선물. 고마워서요 일전에 그 사건도 그렇고.”
사건은 송곳 괴한을 말하는 거겠지? 어쨌든 강우진이 작게 고개를 갸웃했고.
“선물요?”
핸드폰 너머 화린이 담담하게 답했다.
“네 선물. 시계요.”
이 시각 화린은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방금 일어났는지 파자마를 입은 채였고 긴 머리가 약간 산발처럼 흐트러졌다. 당연히 생얼. 다만 눈 밑에 찍힌 점은 선명했다. 재밌는 건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에 긴장이 역력하다는 것.
“괜찮나요?”
곧 핸드폰 너머로 강우진의 답변이 들려왔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단숨에 미소를 띤 화린이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아 그러면 시간만 알려주세요. 제가 알아서 맞춰서 갈게요.”
“알겠습니다.”
“네- 조금 있다 봬요.”
-뚝.
통화가 끊기자마자 핸드폰을 내리던 화린이 뜬금 벌떡 일어났다.
“됐다!”
참고로 화린은 오늘 청룡에 참석하지 않는다. 다른 방송사 시상식에는 가겠지만 오늘은 쉬는 날로 잡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번졌던 웃음이 점차 사그라든다. 이어 파자마 입은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돈다.
방향은 거실 중앙의 탁자 위.
거기엔 턱 봐도 매우 고급스러운 종이가방이 놓였다. 안엔 우진에게 선물로 줄 시계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종이가방이고 케이스고 둘 다 초록색.
그것을 빤- 히 보던 화린이 작게 혼잣말을 뱉는다.
“자 작은 거라고 말하는 건 실수였나?”
뒤늦게 얼굴을 감싸며 후회하는 그녀.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최최최애의 은혜와 그의 첫 영화제를 첫 레드카펫을 쉽게 넘기는 건 화린으로선 죄악이었다.
하지만 유난을 떨 순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선물용 시계였다. 턱시도에 잘 어울리는 시계를 골랐다. 심지어 요 며칠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했다. 그렇게 구매한 시계였다. 당연히 그녀는 만족했다.
이제 이 선물을 강우진에게 주기만 하면 됐다.
“오 오반가? 아니야. 괜찮아 이 정도는 감사의 의미 선물로 충분하잖아? 맞아. 우진님 턱시도랑 진짜 잘 어울릴 거라구···스샷 100장 찍을 거야.”
그런데 어째선지 화린이 시계를 내려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선물의 가격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진님이 부담되면 어쩌지? 하- 작은 거라는 멘트는 하지 말걸.”
3000만이 넘는 데 작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연말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