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 (2)
강우진의 2월이 끝났다.
생각해보면 그저 일반인인 우진에겐 어마어마한 일들이 터졌던 2월이었다. 어쨌든 3월이 시작됐다. 많은 것이 진행될 3월이었고 어느덧 3월 7일 토요일이 다가왔다.
오늘은 ‘프로파일러 한량’의 MT 겸 대본리딩을 떠나는 날이었다. 현 시간은 새벽. 장소는 강우진의 원룸. 당연히 원룸은 컴컴했고 강우진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잠을 깨운 것은.
-♬♪
조용한 탓에 더욱더 우렁차게 들리는 핸드폰 벨소리였다. 그게 얼추 수십 초. 반쯤 잠에서 깬 우진이 부스스대다가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어렵사리 집었다.
몽롱한 탓에 발신자 확인 없이 대충 핸드폰을 귀에 올리는 그.
“···여보세요.”
목이 잠겨 걸걸한 음성이 나왔다. 반면 핸드폰 너머론 청명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잤나 봐.”
“···”
멈칫.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움찔한 강우진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눈이 멀듯 밝은 조명에 눈살을 찌푸리며.
-홍혜연씨.
상대는 탑여배우 홍혜연이었다.
“!!!”
바로 벌떡 일어나는 강우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는 새벽 4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뭐지? 꿈? 아니 이 새벽에 홍혜연님이 전화를 왜?? 여러 생각이 교차하다가도 우진은 일단 정신을 챙겼다.
‘아- 일단 컨셉컨셉.’
내려놨던 위엄을 가까스로 다시 들어 올린 것. 컨셉질에 좀 적응된 탓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준비 안 해요?”
준비? 아 MT 겸 대본리딩 갈 준비?
“9시까지 도착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요.”
“저는 스탭 미니버스 타기로 했습니다.”
“에이- 그럼 좀 없어 뵈잖아요. 무려 인기스타 ‘박대리’의 첫 등장인데. 말했잖아요 배우나 스탭들이나 우진씨 엄청 궁금해한다고.”
“···”
“우진씨 어디 살아요?”
“수지 쪽이요.”
“아아 잠깐만요.”
뒤로 뭔가 핸드폰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금 홍혜연이 말을 이었다.
“그럼 수지구청역? 여기로 2시간 뒤에 나와요.”
뭐지. 이 데이트 약속 잡는 뉘앙스는? 우진은 두 눈을 끔뻑이면서도 되물었고.
“왜요?”
핸드폰을 통해 홍혜연의 웃음 섞인 대답이 들렸다.
“왜긴. 데리러 간다는 거죠. 미니버스 말고 내 차 타고 가요.”
이어 약 2시간 뒤.
시간은 아침 6시를 향하고 있었고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중 후드 위로 항공점퍼를 입은 강우진이 걷고 있다.
그런 그가 한 가게의 유리로 비치는 자신을 보더니 멈춰섰다.
“아- 그래도 첫 대본리딩인데 좀 격식을 차릴 걸 그랬나?”
탑배우들부터 여러 배우들이 참석하는 대본리딩이었다. 그렇기에 우진도 고민하긴 했지만 송만우 PD는 그저 편하게 오라는 말이 다였다. 다들 자유롭게 하고 온다고.
그래서 우진은 최대한 쿨하게 입었다.
다만 너무 신경 안 쓴 티를 내다보니 현재 강우진의 행색은 그야말로 자유분방 그 자체.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 졌다. 다시 돌아가는 건 시간상 오바였다.
“쯧 몰라.”
덕분에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변한 강우진이 멈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어느새 보이는 역 주변. 바로 눈에 띄는 큰 차가 두 대. 역에 가까운 갓길에 검은 승합차와 고급진 흰색 벤이 정차해 있다.
저거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차들이었다.
직감한 강우진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쯤 단단한 포커페이스를 장착했다. 쎈척의 주문은 오면서 계속 외우고 왔으니 걱정 없었고. 다만 평소보다 과한 마음가짐은 필요했다.
무려 여신 홍혜연의 차를 타게 될 테니까.
곧 두 대의 차 앞에 도착한 강우진이 눈을 굴렸다. 차의 썬팅이 짙어서 어느 쪽인지 확신이 안 선다. 그때였다.
-드르륵!
고급진 흰색 벤의 뒤쪽 문이 옆으로 열렸다. 동시에 강우진은 좋은 향기를 맡았다. 모자 쓴 홍혜연이 손을 흔들며 등장한 건 그다음이었다.
“왔어요?”
흰색 벤 안에서 웃고 있는 그녀. 아침이고 나발이고 저 여자는 계속 예쁘구나. 우진은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냉담한 목소리를 냈고.
“네 안녕하세요.”
“근데···우진씨.”
차 안에 탄 홍혜연이 멀뚱히 선 강우진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그의 행색이 신경 쓰이는 모양.
“와- 진짜 긴장 1도 안 되나 봐요?”
“됩니다 긴장.”
“믿으라구요? 아니 아무리 대본리딩이라지만 가면 배우들 줄줄에 스탭들 그리고 기자들 등등. 최소 5~60명은 넘게 있을 건데 의상 완전 편하네?”
“적당히 입었습니다.”
“너무 적당힌데요?”
아 이런. 역시 너무 대충 입었나? 우진이 아뿔싸할 때 홍혜연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우진씨는 너무 남 시선을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요. 이제 배우잖아?”
“···”
“우리한텐 현장이 전쟁터고 치장이 갑옷 연기가 무기라구요.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으면 이미지 관리도 해야죠.”
급작스레 잔소리를 뱉어내는 홍혜연. 등짝 스매싱이 동반된 엄마의 날 선 잔소리였다면 도망쳤겠지만.
‘잔소리가 달다. 왜지?’
상대가 홍혜연이다보니 이마저도 달콤하게 들리는 우진이었다. 뭣보다 잘 보니 홍혜연은 안 꾸민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치장한 티가 났다. 풀메이컵하며 전체적인 패션의 밸런스 등등. 요즘 말론 ‘꾸안꾸’의 정석이랄까?
이즈음 작게 한숨 뱉은 홍혜연이.
“일단 타요. 사람들 보겠네.”
자신의 벤에 타라는 손짓을 던졌다. 강우진이 벤에 타자마자 승합차와 벤은 바로 출발했다. 와중에 반대편에 앉은 우진을 보며 홍혜연이 팔짱 꼈다.
“알려줄 게 너무 많네. 그 괜찮은 비주얼 왜 그렇게 써요? 연기 쪽으론 깔 게 없는데 이쪽으론 완전 하얀 도화지야.”
다시금 시작되는 잔소리였지만 모든 건 우진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줄줄 새어나갔다. 집중될 턱이 없었다.
강우진에겐 지금의 상황 자체가 너무 자극적이었으므로.
여긴 한 달 전만 해도 꿈조차 못 꿨던 탑여배우 홍혜연의 차 안. 그녀와의 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 홍혜연은 좋은 향을 풍기며 우진에게 잔소리해대고 있다. 뭔가 허물없는 사이처럼 오해할 분위기는 또 어떤가? 현실감이 동떨어진 느낌이 들만했다.
그래서 우진은.
“···”
그냥 침묵을 택했다. 지금은 컨셉질을 유지만 하자. 그저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 순간.
-스윽.
창밖을 보는 우진의 얼굴로 홍혜연이 손을 뻗었다. 그것에 흠칫한 우진이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툭.
“아.”
“어?”
강우진이 홍혜연의 손을 살짝 쳐낸 것이었다. 보니 그녀의 손엔 화장품 파우더가 들려 있었다. 이어 잠시간의 정적. 그게 얼추 10초는 유지됐다.
그러다.
“···기본 메이크업 시켜준댔잖아요. 못 들었어?”
홍혜연이 약간 뾰루퉁하게 읊조렸고 당황함을 최대한 숨긴 강우진이 일단 급하게 둘러댔다.
“죄송합니다 누가 얼굴 만지는 걸 싫어해서.”
그딴 건 없었다. 덕분에 우진은 속으로 한탄을 뱉어댔다.
‘아- 엿됐다. 망했어 이미지 조졌다. 나 개싫어하겠네.’
반면 단단한 얼굴의 우진을 유심히 보던 홍혜연은 생각했다.
‘얼굴 만지는 걸 싫어해? 무슨 사연이 있나? 자기 과거랑 관련된···근데 이렇게 대놓고 거절당한 건 또 처음이네.’
난생처음 받는 취급이었다.
‘하 씨. 이거 은근 자존심 상하는데.’
아침 9시쯤 경기도 가평.
위치는 가평에 있는 한 콘도였다. 총 다섯 동이 모인 대형 콘도였고 그중 1동 앞 야외 주차장에 수많은 차들이 주차되기 시작했다. 승합차 미니버스 대형 벤들 등등. 얼추 30대는 넘어 보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이 콘도가 ‘프로파일러 한량’의 MT 겸 대본리딩의 장소였으니까. ‘프로파일러 한량’ 측은 콘도 1동을 1박 2일 동안 통으로 빌렸다.
그 덕에 야외 주차장은 인산인해였다.
“아니아니!! 그건 이쪽! 이쪽으로 가져와요!”
“야! 막내! 누가 장비 그렇게 대충 내려 놓으랬냐! 조명 장비들 비싼 거 몰라?!!”
“자자! 일단 다들 짐부터 빨리 옮기고 리딩장 세팅할게요!!”
“저희 무전기 부족해요!”
수십 스탭들이 버스에서 짐을 내리고 속속 도착하는 난다긴다하는 배우들은 서로 인사하기 바빴다.
“이야- 얼굴 좋아졌네? 너 광고하는 화장품 진짜 쓸 만한 거냐?”
“그럼 뭐? 오빠가 쓰려구요? 그나저나 오빠 예능 한다고 하더라?”
기자들과 배우들의 매니저들도 많이 보였다. 사람 수만 따지면 백여 명은 되지 않을까?
전체적인 그림은 대학 MT를 방불케 했다.
이들 전부는 일단 정해진 방에 짐을 푸는 것이 먼저였고 ‘프로파일러 한량’ 스탭들은 여러 세팅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서서히 모이는 곳은 1층에 있는 커다란 홀이었다.
대본리딩은 이 홀에서 아침 10시에 시작된다.
원래는 텅텅 빈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홀의 넓이는 학교 강당만 했는데 중간에 ㅁ자로 책상이 깔렸다. 그 위론 적당한 다과와 음료수가 올려졌고 ㅁ자 책상 주변을 감싸듯 40개 이상의 의자가 비치된 상태. 홀 입구에도 수십 개의 간이 의자가 보였다.
대충 봐도 스케일이 큰 대본리딩장.
곳곳에 올려진 소형 카메라와 홀의 사방팔방에 놓인 커다란 카메라도 많다. 심지어 이 거대한 리딩장 곳곳을 찍는 대여섯 명 촬영팀도 있었다. 바로 ‘프로파일러 한량’의 메이킹 팀이었다.
메이킹 팀은 배우가 등장할 때마다 달려가 인터뷰를 따기 바빴다.
“‘프로파일러 한량’을 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셨나요??”
“하하하 이거 뭐야? 지금 진짜 찍는 거예요?”
아무 그림이나 일단 찍으면 차후 메이킹 예고 티저로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 어쨌든 거대한 홀로 배우들이 서서히 도착했다. 주연 주·조연 조연 등등. 그들의 매니저 팀은 ㅁ자 책상을 둘러싼 의자에 자리했다.
그렇게 몇십 분 후.
어느새 빈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사람들이 가득 찼다.
여기서 재밌는 건.
“박대리 맡은 배우 찾았어?”
“아니? 아직. 오늘 리딩에는 오겠지?”
“해외파란 소리가 있던데 진짜 외국인 나오는 거 아니여?”
모인 배우들은 거의 대부분 ‘박대리’ 역에 관한 얘기를 한다는 것.
“아 오늘은 볼 수 있겠네. 그간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 진짜.”
“나도. 대체 얼마나 신박한 배우길래 오늘까지 함구했는지 밝혀지겠네.”
“소문은 죄다 헛소리였나 봐 언급되던 배우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걸 보면.”
“왜 근데 안 오냐?”
배우들은 연신 쑥덕이면서도 비어있는 박대리 역 자리를 힐끔댔다.
모자 쓴 홍혜연이 등장한 건 이때였다.
“안녕하세요오-”
스탭 대여섯 명을 달고 나타난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인사들이 던져졌다. 와중 배우들과 인사하는 홍혜연 뒤로 장신의 남자가 끼었다.
“홍혜연 너 오늘 리딩 끝나고 뒤풀이 할 거냐?”
‘프로파일러 한량’의 남주를 맡은 탑배우 류정민이었다. 아직 헤어 스타일이 정해지지 않았는지 장발을 유지하는 그였고 홍혜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답했다.
“몰라 컨디션 보고? 근데 여기까지 왔는데 초반엔 좀 끼어야 되지 않아?”
“아- 그래야 되나. 아 맞아 야 너 박대리 역 배우 봤어?”
되물음에 천연덕스럽게 웃는 홍혜연.
“글쎄?”
“아 언제 오는 거여. 궁금해 미치겠구만. 오늘도 안 오는 거 아니냐?”
류정민이 주변을 훑다가 홍혜연의 매니저 중 항공점퍼를 입은 남자와 눈이 맞았고.
“오- 이분 매니저하긴 좀 마스크가 좋은데? 잘생기셨네요. 피지컬도 괜찮고. 야 홍혜연 이분은 매니저론 아까운데?”
홍혜연이 항공점퍼 매니저를 보며 눈웃음쳤다.
“그래? 배우 시켜볼까 봐.”
“하하하 좋네. 뒷배가 홍혜연이면 신인 때 고속도로지.”
시원하게 웃던 류정민이 항공점퍼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뭔가 시간 때우기와 같은 뉘앙스였다.
“진짜 배우 한 번 해봐요. 얼굴이 아까워서 그래.”
“···”
하지만 매니저는 대답이 없다. 거기다 무심한 표정. 이에 장발을 긁던 류정민이 홍혜연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분 시크하시네. 분위기가 있어. 아니 긴장하신 건가? 신입이셔?”
그때였다.
-스윽.
큰 홀에 입구로 턱수염 송만우 PD가 나타났다. 물론 긴 파마머리를 늘어트린 박은미 작가도 함께였다. 덕분에 홀에 가득 찬 수십 인원들이 각자 자리로 움직였다.
곧 ㅁ자 책상 상석에 나란히 선 송만우 PD와 박은미 작가.
이때 모든 배우들은 송만우 PD에게 시선이 쏠려 있었고 그의 바로 옆자리인 남주 류정민이 대뜸 입을 열었다.
“PD님 아- 대체 뭡니까. 박대리 배우분 없잖아요. 설마 안 오시는 거예요?”
수십 배우들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러자 턱수염 송만우 PD나 박은미 작가가 작게 웃었다. 입을 연 것은 송만우 PD였다.
“왔는데?”
“···예?”
“???”
곧 배우들이 고개 갸웃하며 두 눈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송만우 PD는 고개를 돌려 ㅁ자 책상 중간쯤을 바라봤다.
바로 보이는 건 책상에 올려진 배역표.
-[박대리 역]
그리고 왜인지 그쪽을 바라보며 송만우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누구에게 끄덕인 건가? 순간 배우들의 모든 시선이 박대리 역 자리로 쏠렸다. 배우들만이 아닌 그들의 매니저들부터 제작진들 등등도 전부. 저긴 분명 비어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언제 왔는지 항공점퍼를 입은 남자가 자리에 서 있었다.
남주 류정민이 홍혜연의 매니저라 칭했던 남자였다. 그 덕에 장발의 류정민이 남자를 보며 두 눈을 끔뻑였다. 다만 어마무시한 시선이 쏠림에도 항공점퍼 남자는 무던했고 냉소적인 무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커다란 홀에 모인 배우들 전체를 잠시간 훑었다.
곧 ‘박대리’ 역 자리 의자를 빼낸 남자가 모두에게 읊조렸다. 음성이 차갑다.
“안녕하세요 ‘박대리’ 역을 맡은 강우진입니다.”
순간.
“···”
“···”
“···”
웅성대던 거대한 홀이 일순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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