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 (4) >
약 한 시간 후.
첫 번째 씬이 6번 만에 OK가 떨어졌다. 물론 야스타가 급작스레 발전한 5번째 씬도 충분히 OK의 퀄이었으나 쿄타로 감독은 확인차 6번째 그림도 시도했다.
결과적으론.
‘좋군 5번이나 6번으로 가야겠어.’
딱 쿄타로 감독이 원하는 씬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낯기생’의 꽤 험난했던 첫 씬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쿄타로 감독을 포함해 ‘낯기생’ 수십 스탭들은 더욱 분주해졌다.
이제 고작 첫 씬을 마무리 지은 게 다였으니까.
“해무!! 해무 조금 더 세게!!”
“옙!!”
“감독님이 조명 하나 더 붙이랍니다!!”
“지금 설치하고 있습니다!”
“소품팀!! 나무배 하나 더 어딨어요??! 카메라 하나 더 추가해야 됩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8시를 넘겼다. 현장의 기자들이나 영화사 배급사 인원들 배우들을 제외한 구경꾼 마을 사람들은 거의 빠졌다. 어촌마을 ‘이네후나야’가 전체적으로 더욱 음침해졌으니까.
촬영 협조로 인해 가로등 외의 마을의 빛을 더 빼냈기에 사실상 암흑에 가깝다.
촬영터인 부둣가 주변은 더더욱.
오직 촬영에 맞춘 은은한 조명이 다였다.
그때였다.
-탁!!
재차 들리는 슬레이트 소리. 이어 촬영터에 쿄타로 감독의 사인이 우렁차게 울렸다.
“하이- 큐!!”
동시에 나무배 위의 강우진은 이요타 키요시를 온몸에 퍼트렸다. 단숨에 그의 눈동자에선 생기가 소멸했다. 표정? 원래도 마네킹 같지만 지금은 몇 배 더 알아보기 힘들다. 우진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으니까.
물론 그의 반대편에서 굽실대는 긴조 역시 발전한 긴조를 끄집어냈다.
꽥꽥 소리만 지르던 초반과는 달리 현재의 긴조는 두려움을 억지로 누르는 어른 아이같은 느낌이 팽배했다.
강우진이 해무 가득한 바다 주변을 둘러보다 말라비틀어진 음성을 냈다.
“토카는 기억나? 미사키 토카.”
“···토카. 미사키 토카. 그 그래. 너! 너는 키요시. 이요타 키요시??”
“맞아. 이제야 기억하는구나.”
“저 정말 그 이요타 키요시가 맞아? 네가?”
“오랜만이야.”
표정도 감정도 없는 안부 인사. 반면 눈알이 튀어나올 듯 충격받은 긴조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대체···네가 날 왜.”
‘이렇게 만들었어?’가 완성형이지만 긴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차분히 숨을 쉬는 강우진은 입을 다물었다. 다만 가뭄으로 인해 척박해진 그의 가슴 속에선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분노? 역정? 그런 게 아니었다.
파악에 가깝다. 긴조는 나를 인지했고 생각을 달리했다. 그 증거로 그의 목소리에서 위기감이 조금 옅어졌다. 순간순간 상대가 보이는 모든 변화를 눈치채야 한다. 한 치의 주저함이 모든 것을 망친다. 강우진은 더없이 미지근해졌다.
차분했던 마음가짐의 온도를 더 내린다.
그랬더니 차가워졌다.
그런 강우진을 카메라가 가슴 위 바스트로 담았고 우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긴조. 여긴 치바 주변의 어촌 마을이야.”
실제 ‘이네후나야’는 교토에 있었지만 영화 설정상 치바로 바뀌었다.
“그리고 미사키 토카의 고향이기도 해.”
“키 키요시. 설마 그 옛날에 우리가 좀 괴롭혔던 거로 이러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하하 그래그래. 넌 대범했으니까. 역시 그냥 장난일 뿐인 거야. 그렇지?”
“하지만 토카는 죽었어.”
순간 긴조의 머릿속에 잊었던 과거가 모조리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토카와의 모든 것. 그리고 그녀의 죽음. 안도했던 자신까지.
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어떻게든 숨겨야 한다.
“···그 그건!”
“맞아. 스스로 몸을 던졌지. 하지만 여럿이 등을 떠민 것과 다르지 않아.”
긴조가 입술을 떨며 앞의 강우진을 봤다가 옆 배의 노숙자 모습의 사내를 번갈아 본다. 표정 없는 강우진은 긴조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건조하게 물었다.
“그 떠민 힘 중 너의 것은 얼마나 될까.”
“···”
잠시 퍼지는 침묵. 여기서 쿄타로 감독의 컷. OK지만 구도를 바꿔서 다시 액션. 뒤로 촬영 콘티 한 장이 넘어갔다.
다음 씬.
이요타의 물음에 긴조가 고개를 천천히 내리는 것부터. 그는 눈알을 쉴 새 없이 굴렸다. 와중에 계산하는 것이었다.
정신 나간 새끼.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씨불이고 있는 거야? 설마 복수? 그 미사키 토카에 대한?
‘그딴 걸 왜 이제와서?!!’
그보다 이 망할 놈이 전부 알고 있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그 년의 약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고 걔는 함부로 얘기할 용기가 없었어.’
자신의 맨발을 내려보던 긴조가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강우진의 메마른 얼굴이 보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탓에 조금 더 선명하다.
긴조는 마음을 먹었다.
“키요시. 넌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어!”
발뺌하기로.
“난! 나는 토카에게 오히려 잘 해줬다고! 무 물론 애들이 좀 괴롭힌 건 사실이야. 아니! 심했어. 그래 맞아. 하지만 난 그녀가 측은했어. 그래서 오히려 말리기도 했다고.”
“···”
“억울해. 토카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살려주라고 말했을 거라고.”
“그래.”
“마 맞아. 아! 이러는 건 어때? 내가 도와줄게.”
“아니 토카라면 너에 관한 증오보단 용서를 선택했을 거야.”
“···어?”
심심한 한숨을 뱉는 강우진.
“긴조. 넌 역시 머리가 좋아.”
“무슨 말이야.”
“이 순간에도 계산하고 있으니까. 내가 전부 아는지 모르는지. 응 계속 발뺌해도 돼.”
“자 잠깐. 키요시.”
“넌 네 생각대로 해. 괜찮아.”
괜찮다. 이 한마디가 긴조에겐. 아니 역할에 충실한 야스타에겐 너무도 공포스러웠다. 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저 건조한 말투일 뿐인데 죽음이 보인다. 강우진의 흐리멍텅한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저런 연기를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은연중에 시기를 느낀 야스타는 긴조의 마음으로 돌아왔다. 앞과 뒤가 없다. 바다뿐이다. 해무 가득한 바다 깊이는 어떨까? 깊나? 두렵다. 살고 싶다. 그러나 키요시 저놈의 모습에선 일말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 불안이 가중된 야스타를 옆에서 찍었다. 그가 대뜸 몸을 뒤로 휙 돌려 음침한 마을에 대고 고함쳤다.
“살려줘!!! 여기!! 여기!! 사람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자신의 목소리가 마을을 넘어 저 뒤의 산에서 메아리친다.
“···”
하지만 본인의 음성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뿐 어떠한 반응은 없다. 대신에 표정 없는 우진의 대답은 있었다.
“너만 힘들 뿐이야 긴조. 여긴 아무도 없어. 수십 년 전 버블 사태는 기억해?”
“···뭐?”
“여긴 그 시절 관광지로서 확장을 노렸어. 숙소 음식점 등 무분별하게 늘렸지. 하지만 거품이 꺼지고 망해버렸어. 이젠 아무도 찾지 않아.”
버려진 마을과 같았다.
“내일 조사해보면 금방 찾겠지만 네가 여기 있는 것은 아직까진 아무도 몰라.”
“어 어떻게 왔지?”
“차를 타고.”
강우진이 옆 배의 노숙자 남자를 가리켰다.
“운전은 저분이. 긴조 네 아내분에게는 너의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놨어.”
“이봐.”
“넌 출장을 핑계로 여자를 자주 만나잖아. 외박이 잦고. 아내분은 아무 의심을 안 하고 있을 거야. 내일 아침까지 우리 셋은 계속 같이 있을 거란 얘기지.”
“···”
“혹시 배고파?”
“키 키요시. 나는.”
“그게 아니라면-”
말을 마친 우진이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것. 긴조의 것이었다.
“전화해.”
“···뭐? 누구에게?”
“‘호리노치 아미에’. 네가 여기 오기 직전에 있던 가라오케의 주인이며 우리의 동창 9명 중 한 명인 그녀에게.”
시나리오상 이 바다에 오기 전 긴조는 동창이기도 한 ‘호리노치 아미에’가 운영하는 가라오케에서 술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요타 키요시가 가진 꾸깃꾸깃한 종이에 적힌 숙제의 9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대사는 내가 알려줄 거야. 그대로만 전하고 끊으면 돼.”
“아미에···자 잠깐만. 키요시 너 정말 미사키 토카의 복수를 하고있는 거야?”
고개를 잠잠히 젓던 우진이 결백하다는 듯 드라이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냥 할 일인데.”
“할···일이라니.”
“숙제.”
몸의 떨림이 심해진 긴조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이봐 장난치는 거라면 그만둬. 대체 왜? 왜 키요시 네가 미사키 토카의 복수를···넌 토카에게 아무것도 아니잖아?”
“맞아. 난 ‘낯선 이’일 뿐이야.”
이쯤.
“컷! OK!”
다시금 쿄타로 감독의 사인이 퍼졌다. 이번엔 두 번 촬영 없이 한 번에 OK였다. 어찌나 다들 집중했는지 수십 스탭들이 침을 꿀떡 삼키고 둘의 연기를 바라볼 정도였다.
이어 다시 재정비가 끝났다.
첫 촬영과 비교해서 지금의 촬영 호흡은 매우 빠른 편이었다. 강우진은 물론 야스타 그리고 노숙자 역의 조·단역 배우의 퀄이 급상승했기 때문. 와중 야스타는 배우가 된 후 처음으로 배역에서 ‘빠져나온다’라는 과정을 느꼈다.
‘긴조’일 때와 지금의 차이가 판이했다.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며 유지해야 했다. 아니 온몸에 선명한 긴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적이 있던가?’
배우로서 이렇게까지 배역에 몰입된 건 야스타에겐 처음이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린다. 연기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이후 쿄타로 감독의 액션 사인이 울렸을 때 앞의 시니컬하던 강우진은 단숨에 수분기를 빼냈다. 사라졌던 키요시가 1초 만에 나타난다. 입이 쩍 벌어진 정도의 속도였다.
그런 우진이 뱉은 건조한 대사에서 야스타는 현재 자기의 연기 실력이.
“전화해 긴조.”
순수한 본인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요타 키요시. 그래 강우진. 이 한국의 배우가 있기에···할 수 있었어.’
강우진에게 물들었다. 그가 단단한 대들보처럼 이 드넓은 촬영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야스타의 연기력은 우진에게서 버프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사실적이라서. 키요시 그 자체이기에 내가 낯기생의 세상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들어.’
‘낯기생’이 강우진이었고 강우진이 ‘낯기생’이었다. 우진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야스타는 그리 느꼈다. 그리고 모니터로 보는 쿄타로 감독도 원작자인 아카리 작가도 마찬가지일 터.
마치 뭐랄까 ‘낯기생’의 촬영장이 강우진의 손 위에 펼쳐진 것 같다.
보통 상대역이 연기를 못 하면 배우는 어떻게든 홀로 배역의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카메라엔 둘의 모습이 판이하게 잡힌다. 그것을 씬이 튄다고도 얘기한다. 일본의 배우 야스타는 지금껏 그런 경험을 수도 없이 해왔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내 것만 치중하면 됐으니까.’
정해진 대사를 틀리지 않게 치고 조금만 과하게 연기를 하면 OK였다. 배우 간의 합보다 연기적인 퀄리티보다 무조건 눈에 띄는 그림이 중요했다. 현재 일본의 시장이 그랬다. 그러나 ‘낯기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강우진이 구심점이 된 이곳에서 야스타는 ‘긴조’가 아니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크크 강우진. 이 배우의 존재감이 너무 거대하다고.’
-삐걱.
곧 약간 흔들리는 나무배에서 강우진의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호리노치 아미에’에게 긴조 네가 할 말은 간단해.”
“···뭐 뭐지?”
“‘미사키 토카가 돌아왔어’라고 하면 돼.”
“토카가 돌아왔다?”
“그래 그거면 끝이야. 그럼 널 집에 보내 줄 거고.”
“정말이야?!”
“물론이야. 정말 집에 보내 줄게.”
표정 없는 우진이 긴조에게 그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혹시나 말하지만. 실수는.”
“아니! 실수라니 안 해. 절대로.”
“괜찮아 긴조. 실수해도 괜찮아.”
“해도 된다고?”
“‘아미에’에게 현 상태를 말한다거나 하는 거. 살려달라고 하던가. 그래도 된다고.”
“아 아니! 난 그럴 생각이 전혀!”
“그건 그것대로 괜찮아. 시나리오가 조금 바뀔 뿐이고. 다만 넌 겁탈당하고 내일 아침 나체로 발견되겠지.”
감정 없이 읊조리는 우진의 말에 긴조의 양팔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어떻게든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곤 리스트에 있는 ‘호리노치 아미에’에게 전화를 건다. 핸드폰을 귀에 붙인 긴조의 양손은 공손했다.
“···아 아미에.”
시선은 건너편 키요시에게.
“미사키 토카가 돌아왔어.”
핸드폰 너머로 시끄러운 여자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긴조는 천천히 핸드폰을 내렸다. 그것을 우진이 받았다. 이어 그가 옆에 붙은 노숙자 모습인 사내의 나무배로 옮겨탔고.
“잘했어 긴조.”
노숙자 모습인 사내가 강우진이 앉았던 나무배로 움직였다. 자리교체. 긴조의 눈이 불안하게 끔뻑였고 우진의 잠잠한 대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제 집에 보내 줄게. 살려서는 힘들겠지만.”
잠시 뒤.
강우진은 어촌 마을 중 제일 높은 건물 옥상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를 찍는 두 대의 카메라는 등 뒤에 있다. 그리고 옥상 난간엔 아까부터 같이 있던 노숙자 모습의 사내가 서 있다. 뭔가 장소만 다를 뿐 익숙한 구도였다.
그래 미사키 토카와 키요시의 마지막과 같다.
곧 60대는 넘어 보이는 노숙자 사내가 건물 아래쪽을 내려본다. 부둣가와 달빛이 드리운 바다가 보였다. 그 위에 뜬 나무배 두 대. 그중 하나의 배엔 나체의 남자가 누워 있다. 코나카야마 긴조였다.
왜인지 그는 미동도 없다. 잠이 든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노숙자 사내의 시선이 저 멀리 달로 향했다.
“이제 내일이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거야. 기세등등한 형사들이 자네를 미친 듯이 쫓을 거고. 안개 속에 숨어 있다고 방심하진 말게나.”
강우진. 아니 이요타 키요시가 표정 없는 얼굴로 답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미사키 슈토쿠씨.”
사내의 이름이 미사키 슈토쿠인 모양. 미사키 토카와 성이 같다. 그런 그가 주름지게 웃었다.
“그렇지. 하지만 난 이제 딸을 보고 싶네.”
“죽음은 죽음입니다. 그런 뒤에 본다는 건 미신이고.”
“하하. 자네는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만. 이요타 키요시 자네에게 무거운 짐을 맡겨서 미안해.”
“짐이 아닙니다.”
“그래그래 숙제. 자네가 말했잖아? 내가 입을 다물어야 형사들이 크게 혼동할 거라고. 난 정신이 있는데도 입을 닫을 용기가 없어. 부탁하네 딸의 ‘낯선’ 친구.”
더이상 강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 못 한’ 것이었다. 난간에 섰던 노숙자 사내는 이미 사라졌으니까. 미사키 토카와 같았다.
“···”
노숙자. 아니 그는 미사키 토카의 아버지였으니.< 희생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