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주 (2) >
메인 작가의 말에 약간 놀라는 윤병선 PD. 덕분에 주변에 몰렸던 PD들이 고개를 갸웃했고 윤병선 PD의 가까이에 있던 예능 국장이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왜 그래? 뭔 일 났냐??”
20% 시청률 달성에 축제 분위기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급작스레 윤병선 PD가 진중한 표정을 지으니 국장도 본부장도 혹시 모를 문제가 터졌나 싶어 당황했다. 워낙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예능판이었기에.
반면.
“···아니 아니요.”
메인 작가와 잠시간 시선을 맞추던 윤병선 PD는 다시금 미소를 머금은 채.
“별일 없고 그냥 좀 놀라서.”
국장과 본부장 등 간부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간부들은 쉬이 진중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뭔데 그래?”
물론 윤병선 PD는 바로 답하는 것 없이 메인작가와 팀들을 끌고는 예능국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나중에요-”
방금 메인 작가에게 들은 사안은 ‘우리네 식탁’과 관련이 깊지만 정작 급한 것은 예능국 쪽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스윽.
왁자지껄 예능국을 빠져나온 윤병선 PD가 ‘우리네 식탁’ 전용 미팅룸으로 이동하면서도 옆에 붙은 메인 작가에게 되물었다.
“식품 기업이 너한테 직통으로 전화 왔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메인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메일부터 왔고 확인하고 제가 전화했어요. 아마 우진씨 쪽에 연락하기 전에 저희한테 먼저 확인차 뿌린 것 같아요.”
“아- 그래? 어디 식품 기업인데.”
“농신이요.”
“농신? 겁나 큰 곳에서 걸었네.”
“속도 보면 팔릴만한 냄새 맡고 바로 움직인 것 같아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는 윤병선 PD. 확실히 기업이 냄새를 맡을 만했다. 일단 20%를 넘겨버린 ‘우리네 식탁’의 파급력과 미국인들도 반하게 한 강우진의 요리 실력. 그 강우진이 개발한 ‘김자반 막국수’. 이 세 가지만 놓고 봐도 군침이 돌 정도.
“···확실히 그 ‘김자반 막국수’ 말도 안 되게 맛있긴 해.”
격하게 동의한다는 듯 메인 작가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고.
“미쳤죠 ‘김자반 막국수’.”
주변 스탭들도 똑같이 반응했다.
“아- 인정이죠 그거는.”
“약간 고소하면서도 매콤하고. 김자반의 짭짤한 맛도 포함되면서···하 갑자기 또 먹고 싶다.”
“솔직히 우진씨가 만드는 만큼 똑같이 재연되진 않겠지만 시중에서 팔면 매주 한 번은 사 먹을 정도죠.”
팀 인원들이 침을 뚝뚝 흘리는 와중 윤병선 PD는 처음 ‘김자반 막국수’를 먹었을 때를 상기했다.
‘솔직히 충격이었지.’
강우진에게 개발 요리를 요청하긴 했지만 너무 제대로 된 걸 가지고 나타났었다. 맛은 어떤가? 천상의 맛이었다. 실제 셰프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선례가 있다뿐이지 극히 드문 일. 뭐 요즘 너튜브다 뭐다 비슷한 사례가 늘곤 있지만 대부분 실제 셰프거나 셰프였던 인물들이었다.
강우진처럼 배우인 건 처음이라 봐도 무방했다.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윤병선 PD가 현재의 강우진 기세를 상기했다. 이슈가 끊임없이 모든 작품이 초대박 행렬인 그 강우진이었다.
“나오면···분명 불티나게 팔릴 거야.”
이 건 역시 생소한 이슈로서 작용할 것은 덤.
“근데 완전 대박이다. 우진씨표 요리까지 나오면-”
“대중들한테 제대로 인정받는 거죠 진짜 우진씨는 천상계다 천상계.”
뭣보다 전국각지에 강우진의 이름이 달린 ‘김자반 막국수’가 깔리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다. 강우진의 브랜드 파워로 봐도 무조건 호재였다.
만약 대히트라도 치면 또다른 역사를 쓰는 것.
곧.
“‘김자반 막국수’ 상품화 광고는 ‘우리네 식탁’이 처음으로 해줘야지.”
미소가 짙어진 윤병선 PD가 메인 작가에게 바로 말했다.
“일단 우진씨 쪽에 바로 콜 때려.”
이 시각.
여러 이슈들로 가득한 특히 ‘거머리’의 기사가 많이 보이는 인터넷에 새로 파생된 소식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슈픽]LA 현지인들 입맛 홀린 ‘우리네 식탁’ 앞으로 없을 것 같던 20% 시청률 돌파!』
『‘전세계 런칭’ 확정한 ‘이로운 악’ 넷플렉스 측 “후회없는 작품 만들 것” 』
첫 20%를 돌파한 ‘우리네 식탁’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공식 발표를 터트린 ‘이로운 악’이었다. 여기서 ‘이로운 악’은 꽤나 자극적인 키워드가 많아서인지 금세 불티나게 팔렸다.
최초였으니까.
『‘강우진’ 앞세운 ‘이로운 악’ 누리꾼들 “액션인가?” 궁금증 폭발』
도전의 색깔이 강했지만 선수로 출전하는 인물들이 워낙에 짱짱했다. 대중들의 기대감이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
-헐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넷플 오리지널로 전세계 노리는 건 처음아님??
-정보:송만우 PD는 한량 연출한 PD임
-박대리…아니 이상만…아니다 걍 강우진 폼 미쳤네….
-ㅋㅋㅋㅋㅋㅋ에바싸고 있네 K드라마 해외에서 절대 안 먹힘
-먹히던 안 먹히던 시도하는 거에 의미를 둬야지 ㅂㅅ아
-이로운악! 뭔가 제목이 꼴리는데? 액션인가?
-근데 강우진 쌍둥이설 유력하지 않냐?? 어젠가 거머리 기사도 본 것같은데???? 싹다 가능한 스케줄임??
-오!!! 한량에선 우진 오빠 조단역이었는데! 이번에는 단독 주연!! 것도 해외진출!!
-액션? 강우진 액션 가능??
-↑강우진이 화린 구하는 거 못 봤음? 거의 특수부대 급이었음
-역시 대세는 넷플인감?? 일단 강우진이니까 연기는 걱정없는데 제발…촌스럽게만 안 뽑혔으면….
반면 쏟아지는 기사에 반기를 드는 쪽도 존재했다.
『‘한량’의 대성공 후 글로벌로 눈 돌린 ‘송만우 PD’ 과연 옳은 결정인가?』
이번 ‘이로운 악’ 경매에 참여했던 몇몇 방송국이었다.
“보셨습니까 국장님? 송 PD 국내 방송국들 재끼고 넷플렉스 선택했습니다.”
“알어 봤다. 후- 아깝다 아까워.”
“뭐 이렇게 된 거 포기해야죠. 근데 송 PD님 좀 오래 연출하셔서 그런가? 감이 좀 약해지신 거 아닙니까? 갑자기 무턱대고 글로벌 도전이라니.”
“욕심이 난 거지.”
“이해는 되는데- 솔직히 아직 해외로 K드라마가 힘을 못쓰는 상황이잖습니까? 그 강우진을 업었으면 국내 티켓파워는 어느 정도 확보한 상황인데 그냥 먼저 국내부터 풀고 2차로 넷플을 나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나도 성공 확률은 희박하다고 본다. 도전이고 뭐고 망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작품이 되는 건데.”
자신들을 밀어낸 것에 약간의 불편함 그리고 어느 정도의 현실감이 깔린 평가였다.
“넷플렉스 타고 전세계 런칭이라- 시기상조네.”
“그렇죠···강우진이 아무리 핵폭탄 루키라도 이제 1년 조금 넘었고 한국 일본 빼고 해외로 인지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저번 그 헐리웃 스크린 테스트 건도 딱히 팩트라고 뜬 건 없었지?”
“네네. 조용합니다.”
“흠 아쉽게 됐어.”
사실 거절당한 방송국뿐 아니라 업계 전체가 비슷한 시선으로 보긴 했다. 각종 제작사나 언론들 등등.
『[기획]넷플과 손잡고 전세계 노린다는 ‘이로운 악’ 업계 관계자들은 “시기상조”』
대부분 힘들지 않겠냐는 반응. PD 작가 배우의 퀄리티가 아무리 높다 한들 해외로 치면 무명과 다름없으니까.
이쯤 되면 송만우 PD의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다.
허나 한창 바쁜 송만우 PD는.
“오지랖들은.”
대수롭지 않았다. 한 치의 흔들림 따윈 없었다. 그딴 것들을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이로운 악’이 사전 제작으로 바뀐 만큼 라이브보다 두 배 이상의 퀄리티를 만들어야 했으니.
그렇게 같은 날 오후쯤.
“수고하셨습니다 우진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중에 시청자님 신청곡 라이브로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솔직히 바로 불러주실 줄 몰랐어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보라(보이는 라디오)를 마친 뒤 다음 스케줄을 위해 복도를 걷는 우진에게.
“우진아.”
뭔가 미약한 미소를 머금은 꽁지머리 최성건이 읊조렸다.
“농신이랑 미팅 잡혔다.”
농신? 강우진에게도 매우 익숙한 기업이었다. 왜? 우진이 제일 좋아하는 라면도 농신 거니까.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라면의 기업에서 접촉한 것에 살짝 기분이 좋아진 강우진. 허나 시니컬함을 놓지 않은 그가 되물었다.
“광고입니까?”
“비슷한데 아니야. 네가 하는 요리 레시피로 상품을 내놓고 싶단다.”
“···”
그게 뭔 소리지. 우진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침묵을 선택한 것이었고 이를 알 턱이 없던 최성건이 밴에 타기 전 설명을 이었다.
“‘김자반 막국수’ 그거 말이다. 농신에서 상품으로 빼보잖다. 가뜩이나 시청자들 반응 좋다 싶어서 살짝 기대는 했는데 이렇게 빨리 푸시가 올 줄이야.”
뒤로 최성건은 전달받은 설명을 주르륵 읊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약간 흥분한 최성건의 브리핑을 길었으나 얼추 핵심만 파악하자면 이랬다. 농신과의 미팅은 내일 아침. 그리고 농신이 노리는 건 ‘김자반 막국수’를 컵라면으로 만드는 것.
묵묵한 얼굴인 강우진은 바로 속으로 읊조렸다.
‘미친 개신기.’
상상도 못 해본 상황이었으니까. 뭐 요리 실력이야 아공간의 선물이니 확실하다만 이게 진짜 상품으로서 결실을 맺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처먹을 줄이나 알았지 내 이름 박힌 컵라면이 나온다고? 진심?’
현재 우진의 집에도 쌓인 라면들. 그 사이 자신이 창조한 라면이 추가되는 것이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드는 우진이었다.
이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오히려 최대한 빨리 실물을 보고 싶었다.
따라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강우진은 피어오르는 흥분을 최대한 죽인 채 차갑게 OK 사인을 뱉었다.
뒤로 하루가 지난 9일 아침이 당도하는 건 금방이었다.
화요일 10시쯤.
우진은 대기업인 농신의 커다란 회의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옆엔 최성건 포함 bw 엔터 측 마케팅팀 등 대여섯. 직원들까지. 반대편에 자리한 농신의 인원들 역시 대여섯.
퍽 규모가 큰 미팅이었다.
미팅의 시작은 당연하겠지만 농신 쪽 인원들의 강우진 극찬부터였다. 뭐 사실 이 회의실 밖 복도엔 이미.
“와- 강우진 실물 진짜 미쳤네요??”
우진을 보기 위해 몰린 농신 직원들이 쫙 깔린 상태.
“아까 들어가는 거 잠깐 봤는데 피지컬도 좋아요.”
“대존멋이다 진짜 저 배우상이 있다는 말 솔직히 잘 몰랐는데 강우진 보니까 알겠어요.”
“아우라가 다르다 확실히···롱코트 소화력도 돌았고. 얼굴은 또 왜 저렇게 작대요??”
그러거나 말거나 농신 우진과의 미팅은 퍽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진씨 미리 몇 가지는 전달 드렸지만 저희는 최대한 빨리 ‘김자반 막국수’ 상품화를 노리고 있습니다.”
물론 휘뚜루마뚜루는 아니었다. 매우 세세하며 복잡한 얘기들이 오간다. 단단한 얼굴인 우진은 쎈척을 가미하며 알아듣는 척을 시전했지만.
‘가시방석- 탈출하고 싶다.’
솔직히 골이 아팠다. 뭐가 됐든 길고 긴 미팅의 핵심은 얼추 이거였다. ‘우리가 알아서 만들어 줄 테니 강우진 너는 때가 되면 홍보 쪽 모두를 맡아달라.’
“물론 디자인 예상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진씨 이미지가 상품에 포함될 겁니다.”
대신에 레시피는 농신에 제공해야 했다. 우진은 홍보와 레시피 제공. 이 두 가지만 기억했다. 어차피 돈 관련은 최성건이 전적으로 맡을 것이며 계약서 부분은 bw 엔터에서 도맡아 할 일이었다.
강우진은 그저 근엄하게 한마디만 하면 됐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한마디가 ‘김자반 막국수’ 상품화의 시발탄이었다.
다음 날 10일 수요일. 일본 도쿄.
여전히 강우진의 미담을 넘는 영웅담이 질펀한 일본의 도쿄역 근방. 층수가 10층은 가뿐히 넘는 입구에 유명 애니메이션 캐릭터 동상이 세워진 회색 건물 쪽.
-‘A10 스튜디오’
애니 제작사로 TOP3에 드는 A10 스튜디오 건물이었다. 그런 ‘A10 스튜디오’ 내부의 중형 녹음실. 초대형 애니 제작사치곤 녹음실은 보통의 느낌이 강했다. 부스 곳곳에 캐릭터 등신대가 놓인 게 전부.
그리고.
“···”
녹음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내려보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 짙은 갈색을 묶은 선한 인상의 그녀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최근 피아노 연주로 강우진과 연을 맺게 된 유명 성우 아사미 사야였으니까.
홀로 있는 사야는 자신의 SNS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난감한 표정으로 일본어를 뱉었다.
“하- 일이 너무 커졌어. 괜히 우진님에게 피해 준 건 아니겠지?”
딸인 아사미 유사코는 방방 뛰며 좋아했지만 사야는 신경이 쓰였다. 뭣보다 강우진 쪽에서 아무 액션이 없으니 더 그랬다.
‘DM이라도 보내봐야 하나?’
그때.
-스윽.
녹음실 두터운 문이 열리며 ‘A10 스튜디오’ 직원들 3명 정도가 입장했다. 그중 선두엔 애니 ‘남사친: 리메이크’ 기획부 여자 팀장이었다. 이어 사야와 직원들은 간단한 근황과 인사를 나눴고 여자 팀장이 사야에게 태블릿을 건네며 본론을 꺼냈다.
“사야님 저희가 이번에 새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외부로 발표한 건 없지만 한창 성우 캐스팅 중이고 사야님이 꼭 맡아 주셨으면 하는 역이 있어요.”
성우 제안. 이미 많은 히트작에 참여한 사야였기에 ‘A10 스튜디오’ 미팅 요청이 왔을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작품 하나를 마무리한 상태라 쉬는 기간이었고 뭣보다 사야는 진작에 섭외 온 다른 애니 작품을 할 생각이었다.
“음- 죄송합니다. 지금은 짬이 안 날 것 같아요.”
“아 그렇습니까? 아쉽네요. 사실 이번 작품 남주 성우를 강우진씨가 맡아 주시기로 하셨거든요.”
순간 표정이 돌변하는 사야.
“누구요? 강우진님?”
“네. 사야님과 시너지가 날 거로 생각했는데- 그런데 역시 짬이 안 나신다면.”
“아니요.”
그런 사야가 뒤도 안 돌아보고 급작스레 태도를 바꿨다.
“할게요 그 작품. 꼭 하고 싶네요.”< 질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