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주 (6) >
어둠이 드리운 골목길의 끝. 강우진 또는 키요시가 손 위에 올려진 녹음기를 가만- 히 내려본다.
“···”
표정은 없다. 숨도 일정했다. 반면 우진을 보는 곱상한 에이시는 불안한 듯 자꾸만 뒤쪽을 힐끔댔다. 이 상태로 몇십 초. 고요하던 골목길에 쿄타로 감독의 사인이 던져졌다.
“···컷!!”
OK였다. 하지만 이 씬이 이대로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조명을 수정해서 한 번 카메라 구도와 인물의 앵글을 수정해서 또 한 번. 와중 무심한 얼굴인 강우진은 체력은 괜찮았으나 약간 민망함이 짙어졌다.
‘뭔가- 구경꾼들이 계속 늘어나지 않냐??’
보는 눈이 점차 불어나고 있었기 때문. 어쨌든 결과적으론 총 4번의 재촬영이 있었다.
그 사이 골목길을 마주한 수십 스탭들과 촬영팀에는 많은 배우들이 끼어들었다. 형사 모치오를 맡은 마나 코사쿠 흐트러진 분장인 아미에의 우라마츠 미후유는 물론 단역과 조·단역들. 그리고 배경의 볼륨을 채워줄 여러 보출(보조출연)들까지.
본인들의 씬이 아니지만 대기보단 구경을 택한 배우들이었다.
특히 보출들은 심지가 강했다.
“강우진 애니 성우도 한다던데.”
“아- 저도 봤어요. 근데 발음이나 뭐 딕션만 보면 전혀 문제될 게 없겠는데요?”
“맞아. 그나저나 진짜 궁금했는데 소원성취했어요. 강우진 연기를 눈앞에서 보다니.”
“···진짜 기대 이상이에요. 솔직히 하도 빵빵 터져서 거품 좀 있을 것 같았는데.”
“거품이 꼈던 어쨌든 한국 배우로 일본에서 저 정도로 터진 건 강우진이 처음이죠?”
연기라는 것이 꿈인 인원도 있었지만 그저 짧은 아르바이트로 나온 사람들도 꽤 있었기 때문. 어느 쪽이 됐든 저 촬영존 중심에 있는 강우진은 신기한 얼토당토않은 존재였다.
“요즘 우리 연극단 배우들 죄다 강우진 얘기만 해요.”
“아- 정말? 하긴 우리 쪽도 강우진 연기 연습하는 애들 늘었어요. 한량이나 ‘남사친’ 장면들 대사만 좀 바꿔서.”
무명 배우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나 우진은 그저 스타로 보였으니까. 심지어 한국에서 넘어와 타국인 일본을 뒤흔드는 중이니 오죽할까. 한국과 일본 연예계 역사를 되짚어봐도 강우진이 유일할 정도였다.
그렇게 몇 분 뒤.
촬영장이 정돈된 후 ‘낯기생’ 팀은 다음 씬 촬영에 돌입했다.
“액션!”
당연하겠지만 강우진은 현재 이요타 키요시 자체였고 그의 앞에 선 곱상한 단역 배우도 호료 에이시에 집중했다.
-스윽.
건조한 얼굴인 우진 또는 키요시가 손에 들린 녹음기를 만지작했다. 그리곤 천천히 들어 올려 녹음기를 귀에 붙였고 저장된 것을 재생시켰다.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음량이 크진 않다. 정신이 혼미한 술에 찌든 호리노치 아미에의 목소리였다.
자세히 들리는 건 아니다.
오디오기기에도 명확히 담기진 않았다. 의도한 연출이었다. 물론 녹음기엔 아미에의 자백 비스무리한 것이 저장된 상태였다. 과거 본인이 한 짓 같은 무리가 자행한 짓들 모두.
“···”
표정 없는 강우진은 잠시간 아미에의 음성을 들었다. 카메라 점잖은 우진을 바스트로. 그러다 만족했는지 손을 내린 그가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셨습니다.”
불안에 떨던 에이시가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도 돈을 주시는 게 확실한 거죠?”
우진이 감정 없는 투로 답했다.
“조용히.”
“아! 아-”
다시금 에이시가 뒤쪽을 힐끔했다. 동시에 강우진이 녹음기를 옆으로 맨 가방에 넣으면서도 그 가방에서 고무줄로 묶은 돈뭉치를 꺼냈다.
“10% 먼저 드립니다.”
카메라가 당황한 에이시의 얼굴을 담았다.
“야 약속과 다르잖아요.”
“돈은 달마다 드릴 겁니다.”
“···달마다?”
“불편하시면 녹음기 돌려드릴게요. 거래는 없던 거로 해도 됩니다.”
“주 주세요!”
에이시가 우진의 손에서 돈뭉치를 낚아챘고 강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사라지시면 됩니다 약 반년 정도.”
호료 에이시. 아미에의 숨겨진 애인인 그를 강우진 또는 키요시가 발견한 것은 꽤 오래전. 쥐죽은 듯 아미에의 뒤를 털고 있을 때였다. 재밌는 건 에이시는 곱상한 얼굴과는 다르게 행실이 구렸다. 아미에의 앞에선 건실한 척하지만 뒤로는 도박과 게임장을 전전했고 이 가부키초 야쿠자에게 상당한 빚도 지고 있었다.
마약에도 손을 댔다.
가부키초는 화려한 만큼 환락의 거리였다. 에이시 정도의 양아치는 이 거리에서 흔했다. 그런 그의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은 강우진에게 일도 아니었다.
일단은 돈으로 목줄을 채운다.
‘하지만 갈증을 해소시키면 안 돼.’
에이시는 이미 선을 넘었다. 이대로면 아미에든 야쿠자든 어느 쪽이 됐든 버림받는다. 특히 야쿠자 쪽에 넘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즉 에이시에게 지금 키요시는 거래의 상대임과 동시에 희망이었다.
그 희망이 에이시에게 키와 쪽지를 건넸다.
“치바에 있는 어촌마을에 집을 구해놨어요. 종이엔 약도가.”
에이시가 떠는 손으로 키와 쪽지를 받았다. 그리곤 다시금 우진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본다. 강우진은 검지로 그의 뒤쪽을 가볍게 가리켰다.
“뭐해요 사라지라니까.”
“여 연락은.”
“제가 합니다.”
“···”
곧 돈과 키를 주머니에 쑤신 에이시가 뛰어서 골목을 벗어났다. 그런 에이시의 뒷모습을 무던하게 보는 강우진. 카메라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가득 담았고 우진이 작게 읊조렸다.
“몇 달은 괜찮을 거야.”
하지만 저 남자는 언젠가 발광한다. 상관없다. 그건 그것대로 방법이 있다. 어차피 에이시는 야쿠자에게 넘어갈 운명이니까. 원하는 것을 얻었고 시간늘 벌었으면 됐다.
뚜벅뚜벅.
눈이 죽은 우진이 차분하게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가방 속의 녹음기를 상기한다. 물론 경찰에 넘길 생각은 없는 그였다.
이 녹음기는 아미에가 아닌 다른 ‘숙제’를 조종할 구실일 뿐.
가만히 서서 머릿속 설계를 정리하던 강우진 또는 키요시가 시선을 움직였다. 시나리오상 화려한 가부키초 거리를 보는 것이지만 지금 우진이 응시하는 건 바로 앞의 카메라였다.
“···”
모니터에 담기는 ‘낯선 이’의 눈은 죽었고 앞으로 몇몇이 더 죽어 나갈 것이다. 하지만 강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간다.
“라멘이나 먹을까.”
허기짐이었다.
이후.
일본 ‘낯기생’ 촬영에 복귀한 강우진은 다른 스케줄 없이 촬영에만 몰두했다. 약 일주의 공백이 있기도 했고 ‘낯기생’ 팀 자체의 속력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컷컷! 다시 갑니다!”
“예! 감독님!”
가부키초에 뿌리를 내렸던 ‘낯기생’ 팀은 하루가 지난 13일에도 비슷한 곳에서 야외 촬영을 이어야 했다.
그사이 어제쯤 난리법석이던 ‘남사친: 리메이크’ 소식은 이미 팽창할 대로 팽창했다. 일본 대중들은 물론이며 어느 업계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낯기생 이어 ‘남사친: 리메이크’까지? 애니 성우까지 영역 넓힌「강우진」팬들은 들썩 성우 업계는 걱정』
새로이 접한 신문물에 이슈왕인 강우진이 얹어지니 막을 존재가 없었다. 과연 A10 스튜디오가 당초 예상했던 핵폭탄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남사친: 리메이크’의 관심을 끝없이 커졌다.
하루가 지난 14일에도 그다음 날 15일에도.
SNS 장악을 이어 애니메이션의 어마무시한 팬들에게 깊숙이 자리 잡았다. 역시나 애니 강국이라 그런지 팬들의 화력 자체가 남달랐다.
한편 월요일이 밝은 한국에서는 전날에 있었던 ‘우리네 식탁’ 얘기와 함께.
『또 올랐다! ‘우리네 식탁’ 20.7%로 다시 시청률 경신』
최근에 확정된 떡밥이 풀린 참이었다.
『[공식]강우진이 ‘우리네 식탁’에서 선보인 창작 요리 ‘김자반 막국수’ 농신과 손잡고 컵라면 나온다』
20%대 시청률 유지와 함께 겹겹사였다. 계약을 확정한 식품 기업 ‘농신’에서 최대한 빨리 이슈를 터트린 것. 덕분에 ‘우리네 식탁’을 보는 시청자들은 물론 많은 네티즌들이 과도한 관심을 쏟아냈다.
-ㅋㅋㅋㅋㅋㅋㅋㅋ와 진심 김자반 막국수 상품으로 나오는거냐??ㅋㅋㅋㅋ
-강우진….진짜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 개쩌는거 같음ㅋㅋㅋㅋㅋㅋㅋ
-시바 우리네 그거 볼때마다 침흘렸는데 김자반 막국수 나오자마자 사먹는다
-강셰프 폼 지리네
-예전에도 이런 거 있지 않았음?? 근데 이번 강우진 거는 왠지 오픈런도 뜰 거같음ㅋㅋㅋㅋ
-농신 일 잘하네
-ㅠㅜㅠㅜㅠㅜ허허허헝 컵라면 말고 찐으로 먹게 해주세요…..우진 오빠….
-강우진이 대단한 점은 너튜브나 요리나 예능이나 부수적인 걸 진행하면서도 작품 찍는 거에 소홀함이 없다는 거임 진짜 난놈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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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이 심화되던 점심쯤 윤병선 PD 측이 공식 발표 하나를 추가로 내놨다.
『윤병선 PD 측 “우리네 식탁 2차 촬영은 2월 말 출발 예정”』
‘우리네 식탁’ 2차 촬영 관련이었다. 물론 기사들이 꽤 힘을 받긴 했다. 허나 어째선지 국내 각종 커뮤니티에선 다른 건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일본 진출한 강우진 근황….애니메이션 성우 확정.jpg
일본 전체를 뒤흔드는 ‘남사친: 리메이크’의 이슈가 넘어오기 시작한 것.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이 아닌 강우진은 항상 반전을 터트리는 배우였고 이번 성우 관련 이슈도 일반적이기 않았기에 많은 커뮤니티는 단숨에 불타올랐다.
-강우진이 일본서 애니 성우를 한다고???
-강우진 애니 성우 확정됐다는 거 팩트임?
-(렉카)강우진좌 성우 확정된 애니 제작사 피드 퍼옴
-와…미친 제작사 A10 스튜디오넼ㅋㅋㅋㅋ? 여기 애니 퀄 지리게 뽑는 곳 아니냐??
-현재 A10 스튜디오 SNS 상황ㅋㅋㅋㅋ일본 애들 ㅈㄴ미쳤음
-A10은 일본 애니 제작사 1등 2등 하는 곳임
-강우진 성우한다는 애니 찾아보니까 넷플 남사친이 원작인 듯
-애니 제목 남사친: 리메이크임
-강우진만 하는 거냐?? 화린은?
한국에도 일본 애니의 팬들은 퍽 많았다. 거기에 강우진이 겹치니 혀를 내두를 속도로 번져갔다. 약 1시간도 안 돼 커뮤니티를 넘어 너튜브 각종 포털사이트에 기사가 걸렸다.
-근데 진짜 강우진 쌍둥이 확실한 듯 이게 전부 혼자 가능한 스케줄임???
배우나 개그맨 등이 국내서 더빙을 맡는 일은 꽤 흔했다. 하지만 이번 강우진의 ‘남사친: 리메이크’ 건은 최초였다. 여기에 아사미 사야와 피아노 연주 등의 스토리까지 섞이며 스노우볼이 격하게 굴러간다.
정말 끝없이 새로운 것을 내놓는 강우진이었다.
그래서일까? 의외로 한국 연예계서 우진을 아는 감독 PD 배우들 여러 관계자들은 생각보다 놀라진 않았다.
“강우진이 일본 애니메이션 성우로 남주를 맡는다네요?”
“허- 그래? 근데 충분히 어이없는 소식인데 왜 놀랍지가 않냐? 강우진이라서 그런가?”
괴물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배우라면 황당하겠지만 그 강우진이니까 이해가 된다는 반응.
뒤로 또 하루가 지나고.
“하이- 액션!”
한국에선 포격이 줄을 잇고 있지만 강우진은 별수롭지 않게 ‘낯기생’ 촬영을 속행했다. 현재는 야외가 아닌 세트장 촬영이었다.
메인 배우는 ‘호리노치 아미에’를 맡은 우라마츠 미후유였다.
애인인 호료 에이시가 사라진 뒤의 이야기.
급작스레 사라진 유일하던 버팀목인 에이시가 없어지자 미후유의 정신은 끝없이 무너져갔다.
“에이시···에이시 어디 있어?”
뇌가 망가져 간다. 환각과 환청 증세도 심각해져 갔다. 그런 아미에를 절절하게 표현하는 미후유.
“토카! 사라져!! 꺼지라고!! 왜 자꾸 나타나는 거야!! 쳐다보지 마!!”
모두 이요타 키요시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키요시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정신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아미에의 집 앞에 졸업사진을 배달시킨다던가 긴조의 사망 사진 또는 번호 없는 문자를 보냈다.
1주일 2주일 3주일.
피폐해져 가는 아미에는 결국 마약에도 손을 댔다. 애인인 에이시가 남겨둔 것이었다. 참고 참았지만 결국 그녀는 현실을 기피했고 있지도 않은 추악한 비상구로 몸을 던졌다.
그쯤이었다.
-♬♪
아미에의 또 다른 핸드폰이 벨소리를 뱉은 것은. 그 상대는 남자였으며.
“어이 아미에. 괜찮아? 왜 요즘 가게를 안 여는 거야.”
강우진 또는 키요시의 ‘숙제’ 중 한 명이었다.
이쯤에서 촬영 장소가 변했다.
고급 세단의 안 정장 차려입은 남자와 피폐해진 아미에가 운전석 조수석에 나란히 앉았다. 카메라는 정면 창문 밖에 비치됐다.
정장 차려입은 남자가 아메에에게 전화 건 인물.
안경을 꼈으며 턱 봐도 스마트한 얼굴이었다. 능력도 좋아 보였다. 이름은 츠즈키 이츠마. 고등학교 때 무리 중 브레인으로 통했으며 중견기업 오너 집안으로 뒷배가 빵빵한 인물이었다.
이츠마는 학교 때의 멤버들을 관리했다.
현재 중견기업 후계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었으니 괜한 문제가 터지면 골치 아프니까. 그런데 최근 긴조의 사망 사건이 터졌다. 더불어 미쳐버린 아미에의 연락도 잦았다. 따로 준 핸드폰이지만 그래도 너무 많은 문자는 뒤를 밟힐 수 있다.
그렇기에 이츠마는 일단 아미에를 만나야 했다.
문제는.
“살려줘 이츠마···토카가 살아 있어. 매일매일 나를 찾아와. 더는 못 버티겠어···경찰에 가서 모두 말할 거야. 자백하면 토카가 봐줄 거야.”
“아미에. 진정해 토카는 죽었어.”
“아니라고! 살아 있어! 어제도 오늘도! 나는 걔를 봤어!! 며칠 전 형사가 왔었어 그들에게 전부를 말하고 보호를 받을 거야. 이츠마 너도 멀리 도망가. 토카가 금방 너도 찾을 거야.”
아미에는 이미 반쯤. 아니 완전히 미쳐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하- 알았어 혹시 모르니 학교에 가보자.”
이츠마는 뭔가 결심한 듯 차 시동을 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미에는 계속해서 ‘미사키 토카’를 주절거렸다. 이츠마는 그녀를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그냥 둘 수는 없다.
이츠마가 액셀을 밟으면서도 한 손을 주머니에 넣어 뭔가를 만졌다.
녹음기.
며칠 전 누군지도 모를 상대가 보내온 것이었다.< 질주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