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풍 (6) >
잠시간 멍- 하게 천장을 올려보던 둥그런 안경을 낀 최나나 작가가 느릿하게 고개를 다시금 내렸다. 정면에 보이는 노트북. 그 노트북의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
물론 방금 마침표를 찍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작업하던 대본은 ‘이로운 악’의 마지막 화였으니까. 길고 길던 집필이 끝났다. 많은 변화가 있던 ‘이로운 악’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로운 악’은 총 12화가 마지막 화였다.
현재로선 시즌제를 바라보곤 있지만 결과가 확실해야 가능했다.
어쨌든 빼싹마른 최나나 작가는 잠시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대뜸.
-훅!
책상에서 일어나 양팔을 번쩍 들었다. 그러다가도 날갯짓하듯 퍼덕거리기도 한다. 감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첫 장편의 완결. 충분히 무음의 율동을 추는 게 이해될 정도. 그나마 작업실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누군가 있었다면 소심한 성격인 그녀는 아마 조용히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이어.
-스윽.
충분할 만큼 즐긴 최나나 작가가 작게 숨을 고르면서도 다시금 책상에 앉았다.
“미쳤나 봐 기분 왜 이렇게 좋아?”
물론 마지막 화 대본을 마무리 짓긴 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총괄 연출인 송만우 PD의 컨펌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미소를 머금은 최나나 작가는 마우스를 움직이면서도 노트북 근방에 놓인 핸드폰을 집었다. 마우스를 움직인 건 저장을 위함이었고 핸드폰은 전화를 걸기 위함.
전화 건 상대는 누구겠는가?
“PD님 바쁘신가??”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야 할 송만우 PD였다. 최나나 작가가 핸드폰을 귀에 붙인다. 약간 긴장돼서인지 침을 꿀떡 삼키는 그녀였다.
이 순간.
“어- 작가님.”
핸드폰 너머로 송만우 PD의 약간 상기된 음성이 들렸고 웃음을 유지한 최나나 작가가 기쁘게 읊조렸다.
“PD님 마지막 화 대본 방금 마침표 찍었어요.”
바로 들리는 송만우 PD의 탄성.
“오오! 그래요? 방금?”
“네네! 오늘 오실 수 있어요??”
“나이스 좋아좋아. 오늘? 그- 오늘은 바빠서 힘들고 내일 아침 해 뜨자마자 작업실로 갈게요. 그전까지 마지막 화 대본 다시 확인 좀 하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PD님. 어? 근데 지금 어디신데 바쁘세요?”
되물음에 핸드폰 너머 송만우 PD가 웃음 섞인 대답을 뱉었다.
“뭐하겠어요 배우님 만나고 있지.”
“아! 캐스팅 건인가요? 죄송해요 그럼 끝나고 다시 연락 주세요.”
“그럽시다.”
그렇게 통화가 뚝 끊겼다.
이 시각 방금 최나나 작가와 통화를 마친 송만우 PD는 한 엔터테인먼트 미팅룸에 앉아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복도였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다시금 미팅룸 문을 열었다. 미팅룸 내부엔 대략 다섯 정도가 앉아 있었다.
송만우 PD 측이 둘 남은 인원은 반대쪽.
그중 가운데에 앉은 여자는 얼굴이 낯익다. 눈 밑에 찍힌 점 가슴까지 늘어트린 긴 머리 루즈한 느낌의 검은색 후드. 바로 화린이었다. 메이크업은 기본이었지만 그럼에도 미모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녀의 양쪽에 자리한 인원은 실장과 매니지팀 팀장.
곧 자리로 복귀한 송만우 PD가 양해를 구했다.
“허이고- 죄송합니다. 작가님 전화라.”
후드 소매로 손을 가린 화린이 답했다.
“작가님? 혹시 최 작가님이요?”
“맞아요 최나나 작가님. 방금 대본 집필 마무리하셨다네요.”
“와- 축하드린다고 연락 드려야겠다.”
“하하 작가님 좋아하시겠네.”
화린은 ‘남사친’으로 최나나 작가와 이미 인연이 있었고 안 그래도 ‘이로운 악’의 공식 발표가 있던 때에 화린은 최나나 작가에게 연락하기도 했었다. 다만 송만우 PD의 방문은 화린에게 예상외였다.
“근데 PD님.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턱수염 송만우 PD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와 화린은 그다지 친한 정도가 아니었다. 둘 다 워낙 유명하니 알고는 있지만 작품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송만우 PD가 화린에게 투명파일을 내밀었다.
그리곤 척 진중한 투로 말했다.
“이 타이밍에 온 거면 뭐겠어요? 화린씨가 ‘이로운 악’에 나와주십사 하는 마음에 찾아 왔습니다.”
“···저 저요??”
안 그래도 작지 않은 화린의 눈이 더욱 커진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가뜩이나 최근 ‘거머리’의 오디션 낙방으로 쓴맛을 본 그녀였으니까. 반면 송만우 PD는 차분했다.
“네 화린씨. 다만 주연급은 아닐 겁니다.”
“아-”
“아직 대본 콘티 작업이 진행 중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제가 화린씨에게 부탁드리는 역은 아마 주·조연에서 조연 사이쯤 될 거 같아요.”
즉 조연롤로 합류해달라는 얘기. 이미 아이돌이나 배우나 탑의 반열에 오른 화린에게는 살짝 낮은 제안이었다. 그것을 파악한 화린의 뚱뚱한 실장이 끼었다.
“그- PD님 제의를 주신 것은 너무 감사합니다만. 우리 화린을 왜 조연롤로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부족한 부분이 있으신 건지.”
시선을 돌린 턱수염 송만우 PD가 약간 표정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닙니다. 화린씨 폼이 아쉬워서 역할을 내린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어- ‘이로운 악’은 강우진씨를 제외하면 주연롤이 없다 봐도 무방합니다.”
“예?”
되물음에 송만우 PD의 시선이 화린에게 복귀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상태였고 송만우 PD가 화린과 눈을 맞춘 채 설명을 이었다.
“모든 것을 오픈하는 건 좀 곤란하고. 그- 적당히 에둘러 말하면 ‘이로운 악’은 여러 에피소드가 존재하고 각 에피마다 배우들이 교체될 겁니다.”
즉 ‘이로운 악’을 관통하는 강우진만 유지되며 에피소드마다 배우들이 통으로 바뀐다는 뜻.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배우는 조연롤일 수밖엔 없다. 이어 송만우 PD는 넷플렉스와 합치며 판이 거대해졌다는 것 화린 뿐이 아닌 여러 배우들과 협의 중이라는 것을 추가로 말했다.
“우리 ‘이로운 악’이 전세계 런칭을 노리는 건 보셨을 거고.”
꽤 긴 설명을 듣던 화린은 말똥하게 송만우 PD를 보면서도 속으로는 덕질의 대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최최최애인 강우진.
‘···그런 초대박 대작에 유일한 센터 주연인 강우진님- 너무 멋지잖아?’
팬심이 그득한 화린은 감격했다. 송만우 PD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추가로 이 역에 제가 화린씨를 떠올린 건 ‘남사친’ 때문이었어요. 그 캐릭터의 이미지에서 독을 풀면 딱 좋겠다 싶어서.”
고개를 약간 갸웃한 화린에게 송만우 PD가 결론을 뱉었다.
“조연롤이긴 하지만 화린씨에겐 첫 에피의 악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틀 뒤 8일. 월요일.
‘거머리’의 대본리딩이 끝난 뒤. 어느새 ‘거머리’의 정식 첫 촬영날. 즉 크랭크업 날이 밝았다. 이미 영화계 언론은 난리였다.
『[무비톡]리딩 끝낸 ‘거머리’ 이례적으로 이틀만인 8일 오늘 크랭크업!』
『드디어 첫 촬영! 국내 영화계가 주목하는 ‘거머리’ 잠시간의 휴식 없이 바로 일정 감행』
와중 강우진은 전주의 한 종합세트장 부지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가 탄 검은색 밴이 커다란 부지의 야외 주차장에서 멈췄다.
이유야 간단했다.
이 거대한 종합세트 부지에 ‘거머리’의 커다란 주택 세트장이 건설됐으니까. 거기다 외부적인 세트장만이 아닌 내부적인 세트도 이곳에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거머리’의 촬영은 로케 촬영을 빼면 약 50% 이상이 이 전주에서 진행될 예정.
뭐가 됐든.
-드르륵!
방금 강우진이 밴에서 내렸다. 오늘따라 무심함이 짙다. 새로운 촬영장과 환경이었기에 컨셉질을 짙게 만든 것. 첫 촬영이 임박했지만 다행히 우진은 그다지 떨리지 않았다. 물론 심장은 두근댔지만 이건 떨리기보단 기대감에 가까웠다.
긴장감은 이틀 전 대본리딩장에서 모두 날려버렸으니까.
이어 조수석에서 내린 최성건과 팀이 합류하자 강우진의 발이 움직였다. 야외 주차장을 벗어나니 입구 쪽엔 목에 인터컴을 두른 스탭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둘은 우진을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던져진 인사에 강우진도 묵묵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스탭 둘은 우진의 안내역을 맡았다. 곧 강우진과 최성건 그리고 팀은 정신없이 바쁜 스탭들을 스치며 장대한 주택 앞에 도착했다. ‘거머리’의 핵심이 될 세트장 또는 단독주택.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 외제차가 들어선 주차장 커다란 창문이 달린 거실 3개 건물이 합쳐진 듯한 메인 주택.
대체로 회색 톤인 주택 세트를 올려보며.
“···”
덤덤한 얼굴인 우진은 속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와- 씨!! 더럽게 크네! 이런 집이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긴 하나??! 어쨌든 퀄 지리네.’
그런 거대한 단독주택 세트 뒤쪽으론 여러 창고들이 보였다. 아마 저 창고 속에 내부 세트들이 자리 잡았겠지. 물론 현재 ‘거머리’의 백여 명 스탭들은 주택 세트 주변으로 몰린 상태였다. 열댓 명은 주택 안에 몇몇은 주차장에 20명 가까이는 잔디 깔린 마당에.
팀마다 구역마다 각자 할 일을 하기 바빴다.
이쯤 많은 의자와 모니터들이 배치된 마당 쪽에서 늙은 목소리가 강우진에게 들렸다.
“왔구만.”
경량 패딩에 한 손엔 시나리오를 든 안가복 감독이었다. 주름진 미소를 지으며 강우진에게 다가서는 그.
“어떤가? 세트가 쓸만하지?”
쓸만? 아니요? 오지는데요. 속으로 답한 우진은 겉으로는 뻔뻔하게 말을 바꿨다.
“예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요. 시나리오와 비교해서 느낌은 어떤가.”
싱크로율을 묻는 것이었다. 우진은 다시금 세트 단독주택을 올려봤다. 거의 똑같다 봐도 무방했다. 물론 강우진이 아공간에서 본 주택과는 살짝 다르지만 그 정도는 아무 상관이 없다.
“거의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름진 웃음을 만든 안가복 감독이 뒤쪽을 가리켰다. 촬영존 밖 커다란 천막이 지어져 있었다.
“저쪽이 대기실. 의상 분장 전에 저쪽에서 좀 쉬고 있어요. 그리고- 우진군 쪽 스타일 실장님은?”
팀 중 무표정의 한예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접니다.”
“나 좀 봅시다.”
익숙한 듯 스타일리스트 실장인 한예정은 ‘거머리’의 코디 북을 챙겨서는 안가복 감독 뒤를 따랐다. 뒤이어 강우진도 스탭의 안내를 받아 배우 대기 천막으로 움직였다. 남은 것은 최성건과 팀 몇몇.
곧 꽁지머리를 다시금 묶던 최성건이.
-스윽.
정면 주택을 올려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이걸 드디어 올리네.”
그렇게 약 1시간 뒤.
‘거머리’의 촬영이 임박했다. 카메라 조명 오디오 소품 배우들 등등. 세팅이 거의 끝났고 안가복 감독은 주요 키스탭들을 모아놓고 브리핑 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시간이 빡빡해서 좀 무리를 하는 수밖에는 없어.”
밤샘 촬영 또는 쪽잠을 자야 할 상황이고 안가복 감독은 그 쪽잠을 줄여가며 편집의 초벌 작업도 겸해야 했다. 지옥문이 열린다는 소리. 안가복 감독은 같은 브리핑을 배우 천막에서도 되풀이했다.
대기 천막엔 이미 강우진을 포함한 심한호 오희령 진재준 한소진 등 많은 배우가 도착한 상태였다.
강우진은 안가복 감독의 브리핑을 별수롭지 않게 들으면서도.
‘하- 오늘 칼퇴는 글렀네.’
티 안 나는 한숨을 뱉었다. 뭐 어쩌겠어? 이미 각오는 했고 아공간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터였다. 이어 안가복 감독이 천막을 나서기 전 시간을 확인했고.
“10분 뒤 스탭바이 갑시다.”
어느새 멀끔해진 수염과 머리를 정돈한 대배우 심한호와 강우진을 번갈아 힐끔했다. 동시에 예전에 연락 왔었던 조셉 펠튼의 대사를 상기했다.
‘관심 있는 한국의 배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만 해도 안가복 감독은 조셉이 말한 한국의 배우가 심한호라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강우진일 수도 있겠어.’
최근 강우진 관련 헐리웃 영화의 스크린 테스트 건이 터졌기 때문. 그 정도쯤 되면 헐리웃의 유명 프로듀서가 손수 행차할만한 이유가 되긴 했다.
‘재밌구만 2년 차에 저 심한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라-’
끝으로 덤덤한 우진을 눈에 담던 안가복 감독이 천막을 나왔다. 조감독이 달려온다. 그에게 안가복 감독이 나지막하게 지시했다.
“5분 뒤 스탠바이 돌리자.”
“옙!”
당차게 대답한 조감독이 백여 명 스탭들 사이로 다시금 뛰어갔다. 곧 안가복 감독은 손목시계를 내려봤고 오기로 한 외국인들을 상기했다.
“슬슬 도착했지 싶은데.”
한편 처음과 달리 수많은 밴과 승합차 그리고 미니버스로 가득 찬 야외 주차장. 직전에 도착한 승합차 2대에서 급작스레 외국인 무리가 우르르 내렸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두 명이었다. 거인에 가까운 흑인 그리고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마스크를 낀 금발 여자. 그 둘을 주축으로 모인 외국인 무리가 서서히 세트장으로 걸어간다.
이들을 스치는 스탭들의 시선을 단숨에 독차지했다.
“뭐 뭐야 저 외국인들.”
“그보다 봤어? 저기 저 금발.”
“아니? 나는 저 거구 흑인밖에 안 보이는데?”
“감독님이 따로 부른 특별팀 뭐 그런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외국인 무리는 미리 약속된 양 세트 단독주택의 초입에 다다랐다. 이때 외국인들 무리의 눈에.
“···”
“···”
많은 배우 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잔디 마당 위에 선 포커페이스의 강우진이었다.
이 순간.
-스윽.
인기척을 느낀 건지 강우진이 뜬금 고개를 돌려 외국인들을 확인했다.
“···”
정확히는 조셉과 카라와 눈이 마주쳤다.< 질풍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