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통 (3) >
DM 프로덕션의 대회의실. ‘이로운 악’의 주요 스탭이 몰린 내부 중 총괄 책임자인 턱수염 송만우 PD의 입에서 나온 태국 방콕. 당연히 해외 로케이션 관련이었다.
“애매하게 가는 것보다는 역시 확실하게 때려 박는 게 좋겠어.”
송만우 PD의 말에 수십 키스탭 중 제작부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라인 PD 쪽에 연락하겠습니다.”
턱수염 송만우 PD 포함 수십 키스탭들이 보던 태블릿을 내리고 적당한 두께의 종이뭉치를 펼쳤다. ‘이로운 악’의 해외 로케이션 자료가 담긴 종이뭉치였다. 사실 ‘이로운 악’의 해외 로케이션 얘기는 지금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국내의 대형 세트를 구성할 때쯤 진작에 거론이 됐었다.
따라서 종이뭉치에는 방콕을 포함한 5번까지의 여러 안이 존재했고 촬영에 적합한 장소들이 포함돼 있었다. 당연히 해외 로케이션에 쓰일 씬들도 함유됐다. 그것들을 기반으로 한 제작 회의가 질펀해질 쯤 탄탄한 근육의 무술 감독이 송만우 PD에게 물었고.
“카 체이스(자동차 추격씬)는 죽여 살려?”
턱을 쓸던 송만우 PD가 어렵지 않게 답했다.
“해외로케 확정이면 살려야지 이 부분 중요하니까 라인 PD한테 현지 상황 확실히 점검해두라고 해.”
“이거를 살리는 거면 폭발씬도?”
“당연히 가야 돼.”
“간만에 펑펑 터지겠구만.”
“날리려고 했던 총격씬도 포함해서 갈 거니까 다들 초기에 빼냈던 콘티를 확인해서 잘 준비합시다.”
소품팀 무술팀 촬영팀 장비팀 특수효과팀 등등등. 수십 키스탭들의 손이 빨라졌고 이번엔 미술 감독이 송만우 PD에게 물었다.
“이러면 대본상 죽였던 주인공 설정이나 연출도 다시 살리는 건데. 대본 수정도 생기는 겁니까?”
“수정이 있기야 하겠지만 초기에 준비했던 부분이라 크게 오래 걸리진 않겠죠. 최 작가님도 이미 자료적인 부분에 착수하셨고. 초반부만 살짝 추가되는 정도니까 잘 좀 신경 써줘요.”
말을 마친 송만우 PD가 무술 감독 쪽에 시선을 돌렸다.
“해외 로케에 포함되는 이 전투 기술이 쉽지 않으니까 예전에 작성했던 액션 콘티 다시 한번 점검해 주고 최대한 빨리 완성시켜서 브리핑해보자고. 우진 씨한테도 넘어가야 하니까.”
“오케이 근데 이 씬들 전부 우진씨가 직접 소화하나?”
“글쎄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한데- 우진씨랑 얘기해보고 대역도 생각해 봐야겠지.”
점차 제작 회의가 질펀해진다. 많은 자금이 투입될 ‘이로운 악’이었고 넷플렉스와 함께 전세계를 노릴 사전 제작 작품이라 당연한 분위기긴 했다. 지금 거론되는 해외 로케이션만 봐도 판이 상당할 정도였으니까.
오고 가는 대화만 들으면 블록버스터급 영화와 비슷한 느낌.
어차피 해외 대중들의 눈을 사로잡는 거라면 파격적인 게 맞다는 송만우 PD의 판단. 물론 라이브 촬영으로 진행되는 보통의 미니라면 불가능한 그림이었다.
어쨌든 달궈진 제작 회의 사이로 송만우 PD가 주제를 바꿨다.
“넷플렉스 주관으로 하는 전체 배우들 인터뷰 촬영 그거는 해외 로케 관련 사전 답사 들어가기 전에 털어야지 싶은데.”
“아무래도 그게 낫죠.”
“그럼 우진씨 복귀하는 거 상황 봐서 일정 조율하고 순서는- 전체 배우들 인터뷰 촬영 턴 뒤에 해외 로케 사전 답사 및 장소헌팅 전체 무술 점검 포함 세트나 대본 콘티 마무리 짓고. 그 사이에 대본리딩도 들어가는 게 좋겠어.”
“크~ 빡빡하네.”
지옥행이 연상되는 미래에 키스탭 몇몇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송만우 PD는 제작 실장에게 다시금 강우진 얘기를 꺼냈다.
“강우진씨 스케줄이 핵심이니까 사전에 계속 연락 주고받으면서 최대한 시간을 맞추는 거로.”
“예 PD님. 아까도 최성건 대표님이랑 통화했습니다. 우진씨 며칠 쉬는 거 끝난 뒤 LA 쪽 넘어가는 일정만 빼면 조율할 수 있답니다.”
“LA?”
“그- 있잖습니까? 마일리 카라랑 한다는.”
“아아.”
곧 작게작게 감탄사가 쏟아졌다.
“대단하다- 대단해 그 마일리 카라랑 음반 작업을 하는 배우가 한국에서 나올 줄이야.”
“이거 이러다가 우리 작품 런칭되기 전에 강우진씨 월드 스타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럼 저희야 좋죠. 멘땅에 헤딩 안 해도 되고.”
“근데 우진씨 스케줄은 진짜 보통으로 보면 불가능한 건데 그게 어떻게든 진행되는 거 보면 어이가 없달지.”
동시에 턱수염 송만우 PD가 주제를 바로 잡았다.
“여튼 해외 로케 촬영 진행할 우진씨 포함 배우들한테도 바로 내용 공유해 주고.”
그가 말한 ‘배우들’은 대부분 무명 신인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진주 쪽.
몇십 분 전 최성건과의 통화를 마친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강우진은 방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무릎 나온 추리링과 프린팅 벗겨진 반팔은 그대로였다. 짧은 2박 3일의 휴식이지만 최선을 다해 쉬려는지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보는 우진의 주변엔 대본 또는 시나리오 따윈 없다.
오로지.
“아우- 씨 진심 노는 게 최고야. 짜릿해.”
원래의 강우진으로서 빈둥대는 것을 최대치로 즐기고 있었다. 물론 컨셉질이나 쎈척도 없다. 진주 전체는 그의 방문으로 들썩이고 있었으나 강우진 혼자만 유유자적이었다.
그런 강우진은 현재 너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이미 300만 조회수를 넘긴 얼추 100만에 가까운 구독자를 지닌 한 영화 리뷰 너튜버의 영상. 내용은 타이틀에도 보이듯 강우진 관련이었다. 현 한국영화계의 역사를 뒤집은 ‘실종의 섬’에서 우진의 연기만을 편집해 업로드한 것.
수천 댓글은 당연하겠지만 강우진의 극찬 세례가 폭발한다.
“흐흐 좋군.”
뭐 중간중간 우진을 욕하거나 까는 댓글도 보였으나 강우진은 사뿐히 무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신 위주의 너튜브 영상을 감상하던 우진이 검색사이트를 켰다. 최근 크랭크업한 ‘거머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떤가-”
이미 단톡방 등에서 실제 진행률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우진이었으나 언론과 여론의 상태가 궁금했다. 검색어는 ‘거머리’. 결과는 당연하겠지만 빠르게 쏟아졌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기사들.
『[무비톡]후반 작업 돌입한 ‘거머리’ 올해 칸 영화제에서 축포를 터트릴 수 있나?』
‘실종의 섬’의 초대형 홈런이 있어선지 칸 영화제가 예정된 ‘거머리’의 기대치도 퍽 높았다. 다만 ‘거머리’는 홍보 활동을 하고 있진 않았다.
어차피 편집이 완료돼도 국내에 바로 개봉하진 않으니까.
아마 ‘거머리’는 무슨 결과가 나든 칸 영화제에 걸린 뒤 그 힘을 등에 업고 한국의 극장에 개봉될 예정이었다. 날짜로 따지면 아마 올해 연말 이전이 되겠지.
뭐가 됐든.
-스윽.
옆으로 누운 채 있던 우진이 보던 핸드폰을 내렸다. 그리곤 배를 긁었다.
“출출한데.”
뭐랄까 허기짐이나 배고픔은 아니었다. 입가심이 필요했다. 과자 같은 거. 이어 방에서 나온 그가 주방 이곳저곳을 뒤졌다.
뭐가 개뿔 없다.
라면 같은 거나 오전에 먹다 남은 닭볶음탕은 있으나 군것질할 건 없다. 시간을 확인하는 강우진. 정오가 되기 직전이다.
“···흐음.”
멀뚱히 서서 뭔가를 생각하던 우진이 다시금 방에 들어가 모자와 마스크를 챙겼다. 이유야 간단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슈퍼가 갈 생각이니까.
“옷은- 뭐 이대로 가는 게 낫겠지. 오히려 덜 눈에 띌 거고.”
그래도 티는 갈아입어야 하나? 무릎 나온 추리링 바지야 무난하지만 프린팅이 사정없이 벗겨진 반팔은 밖에서 입기 조금 그랬다. 결과적으로 우진은 반팔만 대충 갈아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집을 나섰다.
강우진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까지 몇몇 사람들이 타긴 했지만 우진을 알아보진 못한다. 뭐 몇몇이 힐끔거리긴 했지만. 아파트를 나온 우진이 슬리퍼를 끌며 걸었다. 슈퍼는 아파트 입구 쪽에 있었다. 하품하는 우진의 옆으로 어려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스친다.
“입구에 현수막 봤지?”
“응 대에박! 진짜 강우진 우리 아파트에 있나 봐.”
“볼 수 있나??! 아파트 단지 계속 돌래?”
“만나면 진심 심장 터질 듯!”
그녀들을 보며 우진은 왜 이 시간에 밖에 있지? 학교 안 가나? 따위의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가 오늘이 토요일임을 인지했다. 그런데 현수막? 생각해보면 아까 최성건의 통화에서도 현수막 어쩌고 했었다.
‘뭔 현수막을 말하는 거지.’
우진은 슈퍼를 가는 김에 어린 여자들이 봤다던 현수막도 확인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를 스친 어린 여자들은 뒤를 힐끔대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뒤 슈퍼가 보이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강우진은.
“···”
위쪽에 걸린 현수막을 확인하자마자 우뚝 멈췄다.
‘미친- 저게 뭐여??!’
당황과 수치심 비슷한 것이 온몸을 휘감았으니까. 아파트 입구에 걸린 현수막들 때문이었다.
-‘진주의 자랑! 괴물 배우 강우진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진주시청.
진주의 자랑 진주에서 용 났다 등의 멘트가 실린 현수막이 위풍당당 펄럭이고 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닌 여러 개. 대략 ‘강우진을 환영한다’는 느낌의 문구가 박혔는데 그중 하나의 현수막엔 강우진의 포스터나 얼굴도 인쇄됐다.
‘얼굴! 왜 얼굴까지 삽입했냐고!’
민망함이 배가 된 우진이 과자 사는 것도 잊은 채 몸을 돌렸다. 대체 저게 무슨 호들갑이지? 이때였다.
-우우웅.
무릎 나온 추리링 바지속 우진의 핸드폰이 짧은 진동을 뱉었다. 그의 엄마에게서 온 톡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강우진의 쪽팔림이 수 배로 늘어났다.
-오마니: 우진아 가게 주변에 현수막 엄청 달렸네? 진주 공무원들이 너 온 거 엄청 반가운가 봐. 가게 올 때도 현수막 엄청 많이 봤어.
-(사진 첨부파일)
현재 진주 전역엔 강우진의 얼굴이 박힌 현수막이 폭발하고 있었으니까.
‘그만! 그만 달아! 내가 원하질 않는다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우진에게 여자 목소리가 침투했다.
“저기-”
앞을 보니 아까 스쳤던 어린 여자들 두 명이 어물어물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 안경 낀 여자가 우진에게 물었다.
“호 혹시 강우진님 아니세요?”
“···”
짧게 침묵하던 우진이 목소리를 냈다. 평소의 근엄한 톤이 아닌 경박에 가까운 가벼운 톤으로.
“아닌데요??”
“···역시. 아 죄송합니다.”
역시? 뭔 역시? 두 여자가 강우진에게 고개를 꾸벅하며 몸을 돌렸다. 그녀들의 작은 대화 소리가 우진에게 얼핏 들렸다.
“그것 봐 아니라니까? 막 엄청 인기 대박 배우가 무릎 나온 추리링을 왜 입고 다녀.”
“하긴 저기 현수막에 걸린 사진이랑 비교하면 좀 많이 추하긴 했어.”
“그냥 주민인데 담배나 사러 나온 사람이라니까 백퍼.”
“응응. 딴 곳 가보자 딴 곳.”
점차 멀어지는 소녀들. 이어 약간 멍하니 섰던 강우진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작게 읊조렸고.
“나온 게 실수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복귀했다. 돌아오니 텅 비어 있는 집에 인기척이 들렸다. 주방에서 물컵을 쥔 채 나타난 여동생 강현아였다. 아침부터 안 보이던 흰색 모자를 쓴 그녀는 우진의 모습을 보자마자 두 눈이 커졌다.
“미쳤어! 오빠!! 그러고 나갔어?!”
“어.”
우다다 달려온 그녀가 우진에게 붙어 어깨를 때려댔고 강우진은 강현아의 모자를 벗긴 뒤 멀찌감치 떨어트렸다. 긴 갈색 머리가 드러난 강현아는 우진에게 잔소리를 늘어놨다.
“아니 오빠! 지금 오빠 진주에서 완전 영웅 취급인데 그렇게 패잔병처럼 하고 나가면 어째?! 누가 알아봤으면 어쩌려고!”
“조용히 해 임마.”
“팬클럽 회장한테 그랄래?”
“아- 팬클럽 회장님. 그래 팬클럽 회장님 가서 과자 좀 사와라. 너 먹고 싶은 거도 좀 사고.”
별수롭지 않게 카드를 건네는 오빠에게 강현아가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이거로 옷도 좀 사도 되나?”
“그 옷이 슈퍼에서도 파는 거면.”
“씨!”
용돈으로 강현아의 입을 다물게 한 강우진이 소파에 벌렁 누웠다. 그런 그에게 강현아가 다시 말했다.
“오빠 그러고 있으니까 강우진 같지 않아.”
“미쳤나.”
“내일 기부 행사 있는데 오빠 올 수 있어? ‘강심장’도 기부하는 거라 나는 참석하는데.”
“너 그런 것도 하냐?”
“내일 기사도 뜰 거거든! 나만 가는 게 아니라 여기 결식아동 센터 관련 사람들 엄청 온대. 진주 시장도 올지 모르고.”
뜻이야 좋다만 본인이 참석하기에 애매하다 생각한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못갈 듯.”
같은 날 밤.
장소는 아파트 형태의 작업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로운 악’을 쓴 최나나 작가의 작업실이었다. 늦은 밤이기도 했고 이미 완결편을 썼기에 거실 중앙에 모인 책상엔 보조 작가들은 보이지 않았다. 불도 꺼졌다.
허나 제일 큰 방엔 불빛이 밝다. 그리고.
“···”
동그란 안경을 낀 호리호리한 최나나 작가가 노트북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 주변엔 숱한 종이들이 널브러졌다. 필시 어떠한 자료일 게 분명했고 최나나 작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너튜브 영상이었다. 우람한 남자 외국인 두 명이 격렬한 액션을 보인다.
헤어밴드를 찬 최나나 작가는 같은 영상을 반복해서 재생시켰고.
“좋네 이 영상. 참고가 돼.”
노트북 옆에 놓인 그녀의 메모장 수첩엔 여러 번 동그라미가 쳐진 글자가 눈에 띄었다.
-CQC/근거리 종합전투 기술 시스템
아마 ‘이로운 악’에 사용할 설정 같았다.< 숨통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