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통 (5) >
강우진은 사실 아동 센터에 올 필요는 없었다. 애초 진주에는 휴식을 위해 왔었던 거였고 예정에도 없던 스케줄을 행하면 여러모로 일이 커진다. 진주 시장이든 누구든 괜히 사람들의 눈에 띄면 잡소리가 나올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우진은 아동 센터에 왔다.
‘오- 생각보다 크네.’
좋은 일을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여동생인 강현아와 팬클럽 ‘강심장’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뭐 어차피 휴식의 마지막 날인데 살짝만 얼굴을 비추고 빠질 셈이었다.
처음 그의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었다.
아동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자신의 여동생 때문이었다.
‘저기 있네. 크크 뭐여 겁나 어색해.’
홀의 입구 복도 쪽에서 발견한 강현아. ‘강심장’ 운영진들과 모여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웃겼기 때문이었다. 이미 컨셉질이 짙은 우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뻔했다.
대체 왜 저렇게 진지한 거냐.
이미 강현아 인생 전반적인 것을 아는 강우진. 즉 오빠였기에 여동생의 지금 모습은 개그 그 자체였다. 이쯤 강우진은 강현아를 놀릴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허나 참았다.
‘그래도 강심장 회장님이시니까.’
쟤도 사회적 위치가 있지. 나름 회장님이시지 않은가? 뭣보다 강현아에게 평소처럼 하면 우진의 현 포커페이스가 깨진다. 따라서 우진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복도의 강현아를 보면서도 일단 걸음을 멈췄다. 여동생이 빠지면 홀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다만 이 마음은.
“거- 참 너무하는구만.”
돌연 홀에서 나타난 웬 중년 남자 때문에 깨졌다. 술이라도 마셨나? 물론 강우진의 시선에서나 그랬다. 술톤의 얼굴에 통통한 60대 남자. 그가 돌연 강현아에게 시비를 털기 시작했고 약간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강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컨셉질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잠시 지켜봤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술톤의 남자는. 아니 본인은 이 아동 센터의 후원사 대표라 말한 놈은 강현아와 대화할수록 선을 넘고 있었다.
뭐지 저 미친놈은?
이쯤 우진의 심정은 분노에 가까웠다. 빡침이 올라왔다.
‘걔는 나만 팰 수 있다고.’
그런 말이 있다. 오빠란 존재는 집에선 여동생을 갈군다지만 타인이 혈육을 털면 못 참는다는. 지금의 강우진이 딱 그랬다.
우진의 ‘노빠꾸’ 기질이 점화됐다.
아공간을 가지기 전인 강우진은 원래도 성격이 호락호락하진 않았었다. 뭐 건들지만 않는다면 별일 없겠지만 괜히 터치하면 참지는 않았다.
직진.
타이밍은 후원사 대표가 마무리 멘트를 던졌을 때였다.
“꼭 그 강우진에게 전달하라고. 내년엔 고작 천만 말고 좀 더 하고.”
“직접 말씀하시면 되겠네요.”
강우진은 거침없이 여동생과 후원사 대표가 선 자리로 성큼성큼 걸었고 그들에게 당도하자마자 술톤의 남자를 내려봤다. 우진은 짜증이 가득했지만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서늘했다.
급작스레 나타난 우진 때문에 후원사 대표는 명백히 당황했다.
내 알 바인가?
“1억.”
강우진이 1억이란 어마어마한 돈을 쉽게 쾌척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 아동 센터의 후원사 역시 자리에서 교체해버린다.
일이 묘하게 흘러갔다.
기분이야 나빴겠지만 강현아는 오빠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우진과 후원사 대표를 번갈아 보며 당황했고 ‘강심장’ 운영진들도 같은 얼굴이었다. 술톤의 후원사 대표는 작게 입을 벌리긴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무심한 얼굴의 강우진을 올려볼 뿐.
반대로 강우진은.
“예 대표님.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통화 상대인 최성건에게 감사를 표했다. 현 상태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성건은 별수롭지 않았다.
“그쪽 아동 센터? 어 거기랑 연결해줘라.”
“알겠습니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거고. 설명해줄 시간은 있냐?”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그래. 잘 정리하고.”
몇억이 오가는 통화가 단 몇 십 초 만에 끊겼다. 억이라는 금액이 불렸으나 최성건은 우진에게 이렇다 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평소의 강우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였다면 필시 이유가 있겠지 싶은 거겠지.
뭐가 됐든.
-스윽.
핸드폰을 내린 우진이 앞에서 사고가 멈춘 후원사 대표를 보며 낮게 말했다.
“방금 이 아동 센터의 후원사도 바뀌었습니다.”
“···이 이봐.”
“아직도 반말을 하시네요.”
“그게 아니고.”
“사과부터 하세요.”
우진이 차분하게 왼쪽에 선 강현아를 가리켰다.
“저야 반말을 늘상 듣는 직업이니 상관없지만 여기 계신 분은 제 팬클럽의 회장님이십니다.”
“···”
“당신에게 반말을 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차가운 음성. 강우진의 포스터 넘친다. 이에 강현아는 사이다를 들이켠 것 같으면서도 의아했다. 평소 자신 오빠의 캐릭터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녀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강우진의 딱딱한 목소리가 퍼졌다.
“사과하세요.”
곧 원래도 술톤이나 더 붉어진 얼굴의 후원사 대표는 눈치를 살폈다.
‘망할.’
적당히 저 팬클럽 애들에게 쿠사리나 주고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급작스레 강우진이 등장할 줄이야. 허나 대충 얼버무리기엔 판이 너무 커졌다. 뭣보다 사과하기엔 후원사 대표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큼!”
강우진과는 결 다른 쎈척을 시전했다.
“내 내가 틀린 소릴 한 건 아니잖은가.”
이때였다.
“무슨 일이지?”
홀 쪽에서 늙은 남자 음성이 끼었다. 돌아보니 머리가 벗겨진 진주 시장이 서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지역 유지들이나 아동 센터 직원들도 보였다. 이에 후원사 대표가 티 나게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잠시 얘기를. 그렇지! 여기 강우진씨가 오셔서!”
후원사 대표의 자존심이 진주 시장 앞에서는 금방 수그러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주 시장은.
“흠.”
근엄한 강우진을 힐끔 하면서도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곤 술톤의 후원사 대표로 시선을 돌렸다.
‘이 양반이 또 뭔 짓을 했구만.’
평소에도 후원사 대표는 잡음이 좀 많은 인물인 듯 보였다. 어쨌든 진주 시장은 고개를 돌려 아동 센터 직원들에게 말했다.
“문을 좀 닫지.”
“예? 아- 예!”
진주 시장의 지시로 홀의 입구 문이 닫혔다. 즉 구경꾼들의 시선이 차단됐고 진주 시장은 강우진과 강현아가 선 쪽으로 직진했다. 와중 후원사 대표가 끼어들긴 했으나.
“저기 시장님!”
한 손을 올린 진주 시장이 그의 말을 막았다. 대신에 그는 우진과 강현아에게 물었다.
“반갑습니다 강우진씨. 그 전에 무슨 일인지 들어볼 수 있습니까?”
우진은 침묵했다. 설명을 시작한 것은 강현아였다. 자신이 당한 것을 전부 말했다. 듣는 도중 진주 시장은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다.
이윽고.
“후-”
설명을 다 들은 진주 시장은 벗겨진 머리를 쓸면서도 옆에 붙은 후원사 대표를 바라봤다.
“박대표님.”
“···예 예. 시장님.”
진주 시장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내가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마시라고. 왜 자꾸 그러시는지 모르겠네.”
“···”
“이젠 나도 참기가 힘들겠어요. 일단 여기 ‘강심장’ 분들한테 사과부터 하세요.”
눈치를 살피던 후원사 대표가 헛기침하면서도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내가 미안하네.”
“또 반말.”
“아! 아닙니다 시장님. 제가 미안합니다.”
“후우 그리고 오늘부로 후원사 대표는 그만두는 거로 합시다.”
“예 시장님. 아! 예?!”
“아동 센터 후원사의 대표쯤 되시는 분이 이렇게 잡음이 많으면 쓰겠습니까?”
“···아 아니 그게.”
“일 더 키우지 마시고 그렇게 합시다.”
“···”
어버버 대는 후원사 대표가. 아니 대표였던 남자가 사색이 됐다. 허나 진주 시장은 아랑곳없이 무던한 우진을 보며 다시 말했고.
“고향에 쉬러 오셨는데 불편을 드린 것 같습니다. 시장으로서 사과드립니다.”
톤이 일정한 강우진이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굳이 이 아동 센터의 후원사를 맡아주실 건 없어요 일의 정리는 내가 알아서 해도 되니까. 이미 ‘강심장’분들이 기부해주시기도 했고.”
“아니요 제가 기부한다는 거나 후원사를 맡는다는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앞으론 제가 맡겠습니다.”
이후.
진주 시장의 정리로 아동 센터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일단 술톤의 대표는 진주 시장이나 강우진 등에게 몇 번의 사과를 한 뒤에 자리를 빠져나갔다. 초반의 기세는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터덜터덜 패잔병의 모습.
아마 진주 시장에게 밉보여선 좋을 게 없다는 거겠지.
뒤로 진주 시장은 다시금 홀로 돌아갔고 ‘강심장’의 운영진들과 강우진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좀 빨리 왔어야 했네요.”
“···아 아니요! 그보다 오빠! 아니 우진님! 악수 한 번 해주실 수 있나요??!”
“저도!”
팬클럽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우진을 실물로도 봤던 그녀들이었지만 이렇게나 가까이서 강우진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약간 진정한 우진은.
‘후- 일단 진정하고.’
컨셉질을 장착하면서도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었다.
“물론이죠.”
악수가 아닌 포옹을 해주는 그. 핸드폰 케이스나 종이에 사인까지 마쳤다. 그녀들은 방방 뛰며 아동 센터를 벗어났고 강현아는 아까부터 오빠의 얼굴을 가만- 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강우진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죽였다.
“야 너 일단 집에 가.”
“아니 오빠.”
“가라고. 여긴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말 들어 용돈 끊기 전에.”
급작스레 90도로 꾸벅 인사하는 강현아.
“고생하십쇼 오빠님!”
후다닥 뛰어가는 강현아의 뒷모습을 보던 우진이 작게 한숨을 뱉은 후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넘치는 홀의 안으로 진입했다.
예상대로.
“어이구!! 강우진씨! 처음 뵙겠습니다.”
“허허 역시나 아주 훤칠하시구먼?? 오늘부터 아동 센터 후원사를 맡아주신다고요?”
“심지어 기부도 더 하신답니다!”
지역 유지나 아동 센터 직원들 등등 오늘 행사에 참여한 모든 인원이 강우진에게 달라붙었다. 물론 약간 자랑스런 얼굴로 변한 머리 벗겨진 진주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부터 강우진은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우리 우진씨 사진을 좀 찍어주실 수 있습니까? 아아- 불편하면 안 해도 돼요.”
“찍어도 괜찮습니다.”
기부 1억과 공식적인 아동 센터 후원사 대표로서의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으니까. 진주 시장과 또는 지역 유지들 등과 단체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다. 자리에 있는 진주 시청 너튜브 팀과의 인터뷰 요청도 있었으나 그건 우진이 거절했다.
결과적으로 우진이 이곳에 머문 시간은 얼추 1시간.
마지막으로 강우진과 대화를 나눈 것은 진주 시장이었다. 그의 표정이 초반과 달리 매우 밝다.
“허허허 강우진씨.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았네요.”
“아닙니다.”
“어- 그런데 역시 홍보 대사 건은.”
“힘들 것 같습니다. 스케줄 상.”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오신 건은 혹시 기사로 나가도 괜찮나요?”
“네.”
시장과 대화를 마친 우진은 아동 센터 직원들에게 간단히 말했다.
“저희 회사랑 연결해드릴게요.”
후원사 교체를 위함이었다. 이어 적당히 마무리 인사를 마친 강우진이 홀을 빠져나갔다. 특이한 것은.
“···”
“···”
홀에 잠시간 침묵이 퍼진다는 것. 그러다 몇 초 뒤 괴성 비슷한 것이 동시에 폭발했다.
“와!!! 강우진 진심 실물 미쳤어요!!”
“아니 사람이 처음엔 좀 냉해 보이더니 엄청 매너 있잖아??!”
“포스가 진짜···완전 미쳤어.”
“배우는 진짜 배우네. 확실히 일반적인 아우라는 아니었죠?!”
이쯤 강우진은 외부 주차장에 세워진 애마에 탄 상태였고.
“하- 일이 좀 커졌네.”
대강 혀를 차며 시동을 걸었다. 행선지는 당연하겠지만 집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강현아가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나 강우진의 압승이었다. 이날 밤 강우진과 강현아 그리고 우진의 부모가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오늘은 강우진의 마지막 휴일이니까.
“우진아 이제 또 바빠지지?”
“오빠! ‘이로운 악’ 정보 좀 줘! 팬카페에 올리게!”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였지만 강우진은 퍽 안정감을 느꼈다.
‘오랜만이네 이런 거. 진짜 얼마 만이냐.’
가족이 모두 모인 게 실로 간만이었으니까. 이런 시간도 나쁘진 않았다.
허나.
‘슬슬 좀 좀이 쑤시는 것도 있어.’
편한 만큼 ‘배우 강우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새 워커홀릭이 된 건가? 명확한 답은 모르겠으나 식사를 마친 강우진은 강우철 서현미에게 인사를 마친 뒤 누웠다.
그리곤.
-푹!
챙겨온 대본에 붙은 검은 사각형을 찔렀다. 금방 우진의 시야는 온통 컴컴한 아공간이 펼쳐졌고.
“보자-”
그는 배우 강우진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28일 월요일 정오쯤.
강우진이 진주에서 삼성동 오피스텔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10분쯤. 주차장에는 시간에 맞춰 익숙한 밴이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우진을 맞이할 밴이었고.
“형님!!”
가장 먼저 덩치 좋은 장수환이 우진을 반겼다. 에너지가 평소보다 넘쳤다. 우진의 쉴 때 그의 팀들도 모두 휴가였으니까.
곧 강우진은 밴을 타고 bw 엔터로 넘어갔다.
bw 엔터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이젠 스타트업이었던 모습을 찾기도 힘들다. 수십이던 직원들이 수백이 됐고 합류한 탑배우들도 많았으니까. 어쨌든 우진은 꽤 넓어진 대표실에 입성했다.
일에 파묻혔던 꽁지머리 최성건이 비죽 웃으며 다가왔다.
“잘 쉬었냐?”
강우진은 간만에 제대로 된 컨셉질을 장착했다.
“예 대표님.”
“진주 쪽 일이나 기사 그리고 이것저것 전달할 게 많은데. 일단.”
이어 최성건이 자리서 투명파일 하나를 집어 우진에게 내밀었다.
“‘이로운 악’ 1화 2화 대본에 장면이 추가된다더라. 러닝타임이 늘어난다는 거지.”
즉 대본에 변화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숨통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