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컴백 (3) >
강우진이 처음 커다란 창고형 스튜디오 단지에 도착했을 땐 솔직히 좀 놀랐다.
‘워- 생각보다 큰데??’
간단한 캐릭터 촬영이라길래 적당한 스튜디오에서 진행할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하니 심히 본격적인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이정도면 어지간한 작품 세트장과 비스무리했다.
‘뭐 전체 창고를 빌린 건 아니겠다만.’
우진은 살짝 놀란 가슴을 금세 진정시켰고 단단한 컨셉질을 끌어올렸다. 이어 밴에서 내린 강우진의 옆으로 최성건과 팀 인원이 붙었다. 그중 꽁지머리를 풀었다 다시 묶는 최성건이 입을 열었다.
“오늘 캐릭터 촬영 컨셉을 들었지?”
“예 대표님.”
“어차피 도착하면 콘티는 주긴 할 건데 뭐 어려울 건 없을 거야. 그냥 홍보용 배우 소개? 정도의 촬영이니까. 적당히 인사말이랑 멘트 몇 줄이 다일 거고.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아 근데 이거 촬영 끝나고 송만우 PD님하고 미팅 있다. 알아 둬 대본 관련하고 해외 로케 등등 전달사항 말해 주지 싶어.”
굳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우진은 그저 천천히 끄덕였다. 점차 촬영이 있을 창고 스튜디오와 가까워지자 파란 단발의 한예정이 강우진에게 붙었다.
“오빠 잠깐만요.”
스타일리스트 실장답게 강우진의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거였다. 일반인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자잘한 틈도 그녀에겐 큰일이었다. 곧 옷 정리를 마친 한예정이 특유의 퉁명스런 톤으로 우진에게 말했다.
“역시 오늘은 캐주얼 말고 댄디 쪽으로 갈 걸 그랬어요.”
“난 마음에 드는데.”
“오빠야 옷걸이가 좋으니까 뭐든 마음에 들겠지만 오늘 여기 촬영에 배우들 엄청 많은 거 들으셨잖아요. 무명 신인 포함해서 조연급부터 탑급까지 싹- 다 온다는데 너무 가볍다 싶기도 해요.”
“괜찮아.”
“그래요? 오빠만 좋다면 상관없긴 하다만.”
단발을 쓸어 넘기는 한예정 뒤로 스타일리스트 팀원들이 끼었다.
“너무 가볍지 않은데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고. 전 딱 좋은 거 같은데요? 실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우진 오빠 마스크 톤이 낮아서 캐주얼도 분위기가 높게 잡힌다고.”
“응 그렇긴 해.”
“그리고 코디도 코딘데 우진 오빠는 그냥 포스가 미쳤잖아요. 모인 배우님들 오빠한테 바로 눌릴 걸요?”
“맞아! 내가 무명이나 신인 배우면 오빠 보고 얼어붙을 듯!”
그녀들의 말을 들으며 강우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거 평소보다 다 짙은 쎈척을 가미해야 될라나? 그러고 보니 이 촬영장에는 처음 보는 배우들이 많다고 했었다. 아는 얼굴들도 오긴 하겠다만 소수고 대부분이 무명 신인 배우들.
‘은근 전쟁터였네 방심보다야 오바하는 게 낫지.’
강우진은 컨셉질의 농도를 높였다. 창고 스튜디오에 진입한 건 그다음이었다.
“강우진씨 도착하셨습니다!!”
‘이로운 악’의 연출팀 스탭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우진은 창고 스튜디오의 내부를 짧게 훑었다. 짧은 촬영치고는 규모가 상당했다. 모인 스탭들도 백여 명 퍽 많이 설치된 촬영 기기들 그리고.
‘와- 씨 저기 앉은 사람들이 배우들인가? 생각보다 엄청 많네.’
한쪽에 깔린 수십 간이 의자들을 채운 배우들. 대충 봐도 20명은 넘어 보였다. 그런 무명 신인 배우들은 죄다 엉거주춤 일어나 강우진을 보고 있었다. 아니 멍때린다는 게 정확하려나?
이쯤.
“우진씨.”
입구를 통과한 강우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침투했다. 몇몇 스탭들을 대동한 턱수염 송만우 PD였다. 미소를 머금은 것이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하하하 왜 이렇게 오랜만인 거 같지? 아- 간만에 보는 게 맞나?”
“안녕하십니까 PD님.”
간단하게 우진과 악수를 마친 송만우 PD가 근황 토크에 돌입했다.
“2000만 관객수 올린 거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뭐- 나는 2000만이 될 거 같긴 했어. 그래도 우진씨는 뭐 하나 평범하게 가는 게 없구만.”
뒤로 주변 키스탭들 역시 강우진에게 축하를 전했고 송만우 PD가 진주 쪽 기부 건이라든지 최근 강우진의 이슈들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게 얼추 5분쯤.
가까스로 본론으로 돌입한 송만우 PD가 오늘 촬영에 관한 브리핑을 이었다. 이미 전달받은 대로 그리 어려운 촬영은 아니었다.
“우진씨도 본 적은 있을 겁니다 왜 티저나 예고편 나가기 전에 예열하는 느낌으로 나가는 홍보 영상으로 생각하면 편해요. 배우 소개지 소개.”
읊조리며 종이 몇 장인 콘티를 넘기는 송만우 PD. 그런 그가 우진을 데리고 창고 스튜디오를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수십 무명 신인 배우들이 모인 공간에 가까워지자 턱수염 송만우 PD가 비죽 웃었다.
“우리 ‘이로운 악’의 핵심 멤버들. 아 우리 우진씨는 심장이시고.”
낯뜨겁게 무슨 소리를. 강우진이 그의 멘트를 애써 무시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다들 처음 뵈는데요. 다른 분들은?”
“누구? 아- 화린씨나 주연 배우님들? 오고 있을 겁니다. 그 전에 간단하게 인사나 나눌까?”
강우진과 송만우 PD가 다가오자 간이 의자에 앉았던 무명·신인 배우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점차 우진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미 미친!’
‘떨려- 너무 떨려!’
‘뭐야. 생각보다 피지컬은 평범하네.’
‘메인 남주···확실히 강우진 도착하고부터 현장 분위기가 확 변했어.’
‘아니 말이 돼??! 저게 어딜 봐서 2년 차 포스냐고!’
‘쫄지마! 똑같은 배우잖아!’
충격 질투 혼돈 등등등.
반면 강우진은.
“···”
무던한 모습에 큰 변화가 없었다.
이윽고.
-스윽.
배우들의 코앞에 선 강우진. 그런 그가 배우들을 가만- 히 훑었다. 뻣뻣하다면 뻣뻣하달지. 그렇기에 무명·신인 배우들은 먼저 인사를 해야 되나 고민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무심한 얼굴의 우진이 돌연 배우들에게 45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분히 존중이 섞인 모습.
“강우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에 무명 신인 배우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몇몇은 얼결에 우진을 따라 허리를 숙이기도 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턱수염 송만우 PD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금세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게 요즘 애들이 말하는 강강약약이겠지. 거만한 듯하면서도 선은 확실히 지켜.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구만.’
동시에 창고 스튜디오로 동그란 안경을 낀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허억 다행이다. 안 늦었어.”
‘이로운 악’을 쓴 최나나 작가였고 그녀가 스탭들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송만우 PD와 함께 있는 강우진을 발견했다.
“으아- 더더더 멋져지셨네.”
그녀의 옆구리엔 대본 두 부가 끼워져 있었다.
뒤로.
무명 신인 배우들과 인사를 마친 강우진. 과거라면 이 시점에서 약간 떨렸을지 모르나 현재의 그는 의연했다. 이정도야 뭐 껌이지. 다만 우진의 눈에선 몇몇의 배우가 특이하게 보였다.
키가 작고 귀염상의 얼굴인 여자배우라거나 존잘에 자신을 보는 눈이 반짝이는 남자 배우 등.
여자배우는 무표정으로 강우진을 빤-히 보고 있었고.
‘뭐여 눈빛 개무섭네. 주요 인물 낙찰.’
선하게 잘생긴 남자 배우는 금방이라도 우진을 와락 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묘하게 도망치고 싶은데.’
둘의 소개는 송만우 PD의 입에서 시작됐다. 무명·신인 배우 중에서도 강우진과 자주 부대낄 배우를 소개해준 것.
“여기 이 배우가 임해은씨라고 이번 대규모 오디션을 뚫고 합격하신 분. 연기를 아주 잘해요. 보기완 달리 다크한 이미지도 가지고 있고.”
키가 작고 귀염상인 임해은이 우진에게 덤덤하게 인사했다. 목소리는 예상외로 음침했다.
“안녕하세요.”
속으론 살짝 놀랐으나 강우진 역시 별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임해은이 또 우진을 빤히 본다. 보통이라면 그냥 무시할 법도 하지만 컨셉질이 짙은 강우진은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노빠꾸.
“왜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아서.”
“그냥 신기해서요.”
송만우 PD가 끼었다. 강우진의 귓가에 속삭인 것.
“어머님이 무당이라더라고.”
무당? 헐- 처음 본다. 내가 신기한 게 아니라 님이 신기하신데요? 다만 우진은 표정 변화 없이 임해은에게 멘트쳤다.
“신기함의 눈이 아니라 신기의 눈이었네요.”
“···”
분위기를 바꿀 겸 송만우 PD가 다른 배우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전전긍긍하고 있는 조무찬이었다.
“이 친구는 조무찬 배우님. 우진씨도 전문국 선생님 알죠? 당연하겠지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니까. 그분 연극단 소속. 한마디로 전문국 선생님 직속 제자인 거지.”
1티어 원로배우 전문국. 당연히 강우진도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봤다기보다는 그냥 대한민국 국민이면 전문국을 모를 수가 없으니까. 이때 우진과 키가 비슷한 조무찬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말을 더듬는다.
“아아안녕하세요! 조무찬입니다! 우 우상. 아니! 팬입니다 강우진님!”
“안녕하세요.”
적당히 인사를 받은 우진이 조무찬을 짧게 스캔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개잘생겼네.’
수수하게 내린 머리 깨끗한 피부 눈코입 이목구비가 확실하면서도 선한 이미지.
‘뭐랄까- 대학교 존잘 선배? 느낌인데.’
이쪽도 임해은과 마찬가지로 캐릭터가 만만찮았고 이번에도 송만우 PD가 우진의 귓가에 부연설명을 붙였다.
“뭔가 우진씨와는 대조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아요? 나는 그게 확 마음에 들었었어. 볼 땐 맹탕 같은데 연기 들어가면 힘이 확 오르더라고. 과연 전문국 선생님네 애라고 할지.”
그런가? 우진은 다시금 조무찬을 바라봤다. 눈이 반짝이고 있다. 뭐 확실히 지금의 강우진과 정반대의 냄새긴 했다. 물론 컨셉질이 낀 것이 조건. 이어 송만우 PD가 속삭임을 이었다.
“아- 그리고. 조무찬씨 롤모델이 우진씨라네. 미팅할 때 들어보니까 아주 열렬한 팬이야. 아니지 거의 신급으로 보고 있는 거 같아요.”
이 지점에서 조무찬의 눈이 왜 저리 반짝이는지 이해하는 강우진이었다.
어쨌든.
‘뭔가 이래저래 새롭네 이번 작품은.’
강우진의 심정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속된 말로 짬이 좀 찼다고 해야 할까? 이전 작품들에선 늘 어마무시한 탑들이 즐비했다면 이번에는 강우진이 독보적이었다.
‘뭐 그래 봐야 하던 대로 연기만 하면 그만이고.’
그때.
“화린씨 오셨습니다!!”
화린 하강수 등 ‘이로운 악’의 주연 급 배우들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아! 우진! 아 큼큼. 우진씨 연락이 너무 뜸하신 거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살아 계신 걸 기사로 확인할 정도라구요.”
‘이로운 악’의 캐릭터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같은 날 이른 오후.
예정됐던 대로 ‘이로운 악’의 캐릭터 촬영은 그리 길게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강우진의 컷은 두 시간도 안 돼 끝났다. 제일 먼저 시작됐기에 그랬다. 사이 우진은 다른 스케줄을 갔다가 현재는 넷플렉스 코리아의 미팅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미팅룸엔 여럿이 보였다.
강우진과 최성건 김소향 총괄디렉터 턱수염 송만우 PD와 최나나 작가 ‘이로운 악’의 제작실장까지. 당연히 오전에 있던 캐릭터 촬영을 모두 마친 뒤 모두 모인 것. 여러 히트작 포스터가 달린 유리 미팅룸이 오랜만인 강우진은.
‘간만이네- 여기.’
과거를 상기하면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와중 송만우 PD와 뭔가를 얘기하던 살짝 통통한 김소향이 건너편 우진에게 시선을 맞췄다. 미소는 덤.
“우진씨 요즘 잘되시는 거 기사로 확인하고 있어요. 아! 그리고 ‘실종의 섬’ 2000만 축하드려요.”
강우진이 대강 답하자 김소향 총괄디렉터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우리 ‘이로운 악’도 제대로 터졌으면 좋겠네요.”
제작실장이 거들었다.
“하하하 우리 ‘미다스의 손’ 강우진씨가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강우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속으로.
‘인정. 이로운 악이 SSS+급이라고.’
하지만 대놓고 말할 수 없던 우진은 덤덤하게 답했다.
“열심히 해야겠죠.”
대충 대답한 거였는데 왜인지 송만우 PD나 김소향 등은 우진이 세상 든든했다.
‘저 괴물이 열심히 한다면야 걱정 없어.’
‘미다스의 손이 아니야 강토템이지.’
이쯤 동그란 안경을 추겨 올리던 여전히 소심한 느낌의 최나나 작가가 강우진에게 책 두 부를 스윽 밀었다.
“우진님 늦어서 죄송해요. 추가된 씬까지 포함된 1화 2화 대본이에요.”
“괜찮습니다.”
“기존의 대본과 거의 똑같은데 추가된 장면들만 확인하시면 돼요.”
턱수염 송만우 PD가 거들었다.
“해외 로케 관련해서 보내드린 자료는 보셨을 거고. 일단 대본 확인해보시고 의견 있으시면 편하게 알려줘도 됩니다 우진씨.”
별 의견이 없다면 대본 리딩 전 해외 로케 액션씬 등의 것들을 모아 무술 감독과 리허설 겸 연습이 퍽 자주 있을 거란 말도 추가됐다. 물론 강우진의 스케줄에 맞춰 줄 거란 얘기도.
이쯤 강우진은.
-스윽.
검은 사각형이 붙은 ‘이로운 악’의 수정된 대본을 당긴 상태였다.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척했지만 사실 우진의 검지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푹.
왜겠는가? 아공간에 진입하기 위함이었다.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수정된 ‘이로운 악’ 대본의 교체도 해야 했으니까. 뭐가 됐든 끝없이 컴컴한 아공간에 진입한 우진이.
“하암-”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을 쩍 했다. 금세 컨셉질이 벗겨진 모습. 그 상태로 여러 흰 사각형이 나열된 곳으로 걷는다. 역시나 ‘이로운 악’의 흰 사각형은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따로 리스트업 돼 있었다.
과거에도 이런 경험은 있었기에 우진은 별수롭지 않게 기존의 ‘이로운 악’ 흰 사각형을 삭제했고.
“1화 2화는- 꽤 예전에 리딩(경험)했었나?”
정리를 마친 우진이 새롭게 방금 추가된.
-[9/대본(제목: 이로운 악) SSS+급]
-(1화)/(2화)/(3화)···
-[*완성도가 매우 높은 드라마 대본입니다. 100% 리딩이 가능합니다.]
‘무술’ 능력을 선사한 ‘이로운 악’의 흰 사각형을 터치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화였다.
-[리딩(경험) 가능한 인물을 나열합니다.]
이미 과거에 리딩(경험)은 마쳤으나 새롭게 추가된 컷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뭐 실제 대본은 그 뒤에 읽어봐도 늦지 않겠지. 강우진이 당연하겠지만 ‘이로운 악’의 남주 ‘장연우’를 선택했다.
그리고.
[“···”]
기다리던 로봇 같은 여자의 음성은 예상 밖의 멘트를 뱉었다.
[“기본 스팩 이상의 능력이 감지됩니다. ‘CQC’를 먼저 습득합니다.”]
강우진의 미간이 단박에 구겨졌다.
“뭐?? 그게 뭔! 아니 ‘CQC’가 뭔데?”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컴백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