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1) >
[“‘A:장연우’의 리딩(경험)을 종료합니다.”]
로봇 같은 여자 목소리를 끝으로 강우진이 현실. 즉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엔 여전히 검은 사각형이 붙은 ‘이로운 악’ 대본이 들려있었고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에 머리는 자고 일어난 직후라 산발이었다.
그러나.
“···후.”
우진의 몸 전체에는 저릿한 감각이 감돌고 있었다.
다분히 그럴만했다.
현실의 세상은 멈춰있었으나 강우진은 ‘장연우’로서 ‘이로운 악’의 세상에서 살았었으니까. 누군지도 모를 사내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바닥에 꽂으며 얼굴을 박살 냈다. AK소총으로 가슴팍을 뚫었다. 목을 꺾었다. 나이프로 뱃가죽을 갈랐다. 눈알을 후볐다. 목을 그었다.
짧은 순간 십수 명을 아작냈다.
건물에 불을 질렀고 총알이 비같이 쏟아지는 도로를 헤쳐나갔다. 차가 폭발했다. 헬기가 낙하했다. 그러면서 몇 명의 머리통을 추가로 더 터트렸다.
가히 폭력적 그 이상이었다.
현실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며 강우진 역시 영화나 컨텐츠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군대에서도 이만한 경험은 불가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무지막지한 세상에서 살다 왔다. 숨을 쉬었다. 적응했다. 꽤 지낼만했다.
‘폭발이 아직도 느껴져.’
눈앞에서 웅장하게 터지는 불길. 얼굴에 튀는 모래바람. 웅웅거리는 귀. 호흡을 막는 열기. 반강제적으로 몸을 미는 폭발력. 어처구니없게도 현실에 돌아온 우진은 지금도 생생한 온몸에 절절하게 각인된 ‘장연우’의 삶이 경이롭다 느꼈다.
잔향이 남은 피 냄새 또는 쇠 냄새마저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로운 악’의 세상에 강우진이 먹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살인 또는 총을 갈기는 것 등. 우진이 이미 과거의 작품에서 가졌던 행위들이었다. 그저 ‘장연우’라는 캐릭터는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사살했을 뿐.
곧 강우진이.
“응 괜찮아졌어.”
마인드컨트롤이 완료됐음을 느꼈다. 전과 다르지 않다. 이번의 ‘이로운 악’ 역시 숱한 작품들과 같이 철저하게 각인됐지만 금세 사라졌다.
강우진이 묵직한 컨셉질을 퍼트렸다.
더욱더 본인임이 상기된다. 자아가 선명해졌다. 그의 내면엔 수많은 캐릭터와 세상이 존재했지만 역시 그것들을 종용하는 것은 주인은 강우진이었다. 그런 그가 대본을 내리며 화장실로 걸었다. 슬슬 씻어야 했기 때문.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이로운 악’ 촬영 재밌을 듯?”
직접 경험(리딩)했던 ‘이로운 악’의 세상이 현실에서 구현된다면? 구현된 그 촬영장에서 ‘배역의 자유도’ 등을 바른 ‘장연우’가 활개 친다면? 우진은 샤워하면서도 기대감이 점철된다는 걸 인지했다. 묘했다. 과거엔 걱정이 없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을 찾기가 힘들었다.
“배우 다됐네 진짜.”
떨림은 있으나 두려움의 것이 아닌 고대함에 가깝다.
뒤로 적당히 머리를 말린 우진이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밴이 그를 반겼다. 역시나 브리핑의 시작은 꽁지머리 최성건이었다.
“오늘 컨디션 어떠냐?”
“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크크. 좋네.”
비죽 웃던 그가 주제를 바꿨다.
“어제 송만우 PD님한테 들어보니까 ‘이로운 악’ 무술 관련해서 해외팀 섭외했다더라.”
“해외팀이요?”
“어. 기존의 무술팀이랑 섞인다는 거겠지. 그- 이번에 추가된 컷에서 ‘CQC’였나? 그걸 전문으로 해오던 팀이라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어 원래 있던 무술 감독도 가능은 하다는데 아무래도 전문적이진 않을 테니까.”
즉 짜인 액션 콘티에 전문성을 더한다는 거였다.
“어쨌든 무술 연습 돌입하면 기존의 무술팀에 해외팀 포함돼서 진행될 거야.”
아마 콘티에 맞춰 무술이 베이스가 된 맨손 격투부터 총 칼 기타 등등의 전투술을 연습하게 되겠지. 뭐 당연하겠지만 강우진은 딱히 긴장되지 않았다. 전문가? 글쎄 밴에 앉아 덤덤히 창밖을 보는 지금의 강우진 자체가 인간 병기였다.
물론 스위치가 자유자재인.
이어 최성건이 우진에게 다시 물었다.
“어째 할만하겠냐? 해외팀인지 뭔지 덩치들 겁나 올 텐데. ‘CQC’ 기술이 고난이라고 하더만.”
강우진은 속으로는 엄지를 세웠고.
‘껌이죠 그까이 거.’
겉으로는 평소의 냉철함이 흘렀다.
“해봐야겠지만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습니다.”
최성건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곤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그냥 받아들여 의문을 가지지 마! 최성건. 저놈은 강우진이다.’
몇 시간 뒤 최나나 작가의 작업실.
며칠 전 강우진과 미팅을 했던 최나나 작가는 지금 노트북을 응시 중이었다.
-딸깍 딸깍!
‘이로운 악’의 대본을 집필하는 건 아니었다. 몇 분 전 도착한 메일을 보고 있는 것. 보낸 이는 일본의 ‘A10 스튜디오’였다. ‘A10 스튜디오’는 시기마다 ‘남사친’의 원작자인 최나나 작가에게 ‘남사친: 리메이크’ 관련 진행 상황을 공유해왔었다.
이번 메일도 그랬다.
“우와- 벌써 성우 녹음이랑 믹싱 끝났구나.”
이미 언론에도 공개가 됐던 부분이지만 최근 ‘이로운 악’의 추가 집필로 인해 정신없던 최나나 작가는 지금 알았다. 곧 그녀가 ‘A10 스튜디오’가 공유한 메일 내용을 쭉 훑다가.
-스윽.
메일 창을 내리고 검색사이트를 켰다. 검색을 하기 위함이었다. 검색어는 당연하겠지만 ‘남사친: 리메이크’. 보통 일본 쪽 애니 작품이라 하면 국내에 기사가 몇 없겠지만 ‘남사친: 리메이크’는 강우진이 남주 성우를 맡았기에 퍽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그저 기대감을 필두로 작성된 기사도 있었고 직접 일본 언론을 파악해 팩트를 전달하는 기사도 보였다.
잠시간 기사들을 집중해서 읽던 최나나 작가가 동그란 안경을 빼며 짧게 숨을 뱉었다.
“후- 긴장돼.”
요즘 최나나 작가의 인생은 어찌보면 황금빛이었다. 데뷔작인 ‘남사친’이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됨과 동시에 ‘이로운 악’이 전세계를 노린다. 작년까진 무명 또는 신인 작가였던 그녀로서는 꿈속을 걷는 것과 같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강우진이 포함됐다.
“PD님은 잘 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곤 하셨는데.”
천성이 맹탕인 최나나 작가는 걱정이 가득했다. 반면 턱수염 송만우 PD는 묘한 말과 함께.
‘아아 잘 될 거야. 우리에겐 강토템이 있으니까.’
전혀 별수롭지 않았다.
대체 강토템이 뭐란 말인가?
어쨌든 최나나 작가는 천천히 노트북을 덮으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동시에 며칠 전 미팅 때 봤던 강우진을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그와 짧게 나눴던 대화였다.
시작은 소심하게 말을 건 최나나 작가부터.
“저···우진님.”
미팅룸에서 나서려던 강우진은 낮은 톤으로 답했다.
“네 작가님.”
눈치를 확인한 최성건이 빠질 때쯤 최나나 작가가 다시금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로운 악’ 미팅에서 이걸 물어보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요- 혹시 ‘남사친: 리메이크’ 성우 녹음하실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느낌이라고 하시면.”
“그냥···성우님들 느낌이나 제작 분위기 같은 거요. 저도 메일로 받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우진님이 현장에서 직접 경험해보셔서. 성우 녹음을 했으면 이미 영상은 만들어진 거죠?”
“네. 완성된 그림을 보면서 목소리 녹음했습니다.”
“헐. 어 어떠셨어요?? 잘 뽑혔나요?”
짧게 침묵하던 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함구로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그렇긴 한데.”
“하지만 제 눈엔 충분히 재밌었습니다.”
“저 정말요?”
“예.”
“잘 될 겁니다.”
“어- 어떻게 우진씨는 늘 그렇게 확신이 가득하세요??”
“글쎄요 그냥 느낌이죠.”
벙찐 최나나 작가. 반대로 강우진은 여유가 있으며 근엄한 얼굴로 미팅룸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최나나 작가가 읊조렸다.
“···느낌? 뭔 느낌?”
그녀가 ‘남사친: 리메이크’의 SS급인 걸 알 턱이 없었다.
한편 일본 도쿄.
도쿄역 근방에 위치한 초대형 애니 제작사 ‘A10 스튜디오’의 내부 중 녹음실 겸 테스트가 가능한 중형 스튜디오에 퍽 많은 인물들이 몰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의자에 앉은 성우들.
애니 ‘남사친: 리메이크’의 여주 목소리를 맡은 나츠미 우미부터 우진과 연이 깊은 아사미 사야 등등. 과거 대본 리딩때 모였던 성우 수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우진만 빠졌다.
이들은 전부 진중한 얼굴이었다.
“···”
“···”
“···”
그런 표정으로 정면의 대형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그 모니터 근방엔 ‘남사친: 리메이크’의 총괄 감독을 맡은 사쿠이치 마히로부터 키스탭 외의 여럿이 서 있다. 물론 ‘A10 스튜디오’의 간부들도 보인다.
이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스튜디오의 입구 쪽에 선 여자가 불을 껐다. ‘남사친: 리메이크’의 핸들링을 맡았던 기획팀 여자 팀장이었다.
-탁 탁!
어느새 스튜디오 전체에는 적당한 어둠이 깔렸다. 그리고 모인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통일된 행동은 정면의 대형 모니터를 보는 것.
이윽고.
-♬♪
화면보다 오디오가 먼저 짱짱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남사친: 리메이크’의 공식 OP(오프닝곡)였다. 피아노 선율로 시작해 템포를 빨리하며 바이올린까지 끼어드는 곡이었다. 이어 남자 보컬이 깔린다. 물론 강우진의 목소리.
-♬♪
스튜디오에 강우진의 OP가 깔림과 동시에 대형 모니터엔 애니의 오프닝 컷들이 출력됐다. ‘남사친: 리메이크’였다. 오프닝의 러닝타임은 대략 30초. OP가 나오는 동안 수십 성우들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 이도 있었다.
이윽고.
-스으.
OP가 멈추고 ‘남사친: 리메이크’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출력되기 시작했다. 성우들의 눈알이 디립다 커진다. 그럴 수밖에.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성우들의 목소리 믹싱부터 마무리 편집까지 끝난 완성본 ‘남사친: 리메이크’ 1화니까.
즉 지금은 방영 전 완성본 테스트의 자리였다.
부족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최소 성우들의 눈에선 그랬다. 작품만 많게는 수십 편을 넘게 소화한 그들의 눈이니 정확하겠지.
‘남사친: 리메이크’의 남주 ‘센고쿠 토오루’가 등장했다.
밑으로 강우진의 목소리가 깔렸다.
성우들은 다시금 실감했다.
‘잘한다 완성품 보니까 더 절절히 느껴져.’
‘주인공이랑 톤이 딱 맞아.’
‘누가 저걸···배우로 보겠냐고. 100% 성우지.’
강우진의 성우 실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그렇게 ‘남사친: 리메이크’의 1화가 끝났다. 러닝타임은 얼추 24분. 그대로 2화가 연달아 재생됐고 2화는 1화보다는 적은 18분쯤이었다.
이어 3화가 재생되기 전.
-스윽.
모니터 기기 앞쪽에 앉은 감독이 고개를 뒤쪽 성우들에게 돌렸다.
“어떠십니까?”
3화를 보기 전에 평가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돌연 성우들 사이로 박수가 쏟아진다는 것.
-짝짝짝짝짝!
의도했다기보다는 솔직한 심정이 녹아든 박수였다. 박수는 점차 스튜디오 전체로 전염됐고 성우들은 저마다 완성된 1화 2화에 관한 감상을 흥분된 일본어로 뱉어댔다.
“좋은데요?! 너무 좋아요!”
“그림이 진짜 잘 뽑혔네요? 솔직히 최근 작품 중에서 작화로 보면 1등 같은데??”
“간만에 제대로 된 로코물 나왔네요!”
“재밌다 제가 목소리를 녹음했는데도 재밌어요!”
“근데 진짜 OP랑 EP가 끝내주지 않아요? 전 벌써 귀에서 맴돌아요.”
“맞아 특히 저는 OP가 좋아요. 확실히 강우진씨 보컬이 매력적이긴 해.”
“느낌 왔다! OP는 애니 방영되자마자 차트 석권할 거 같아요!”
성우들이 신명나게 떠들어 댄다. 오바를 떠는 건 아니었다. 업계 TOP 3에 든다는 ‘A10 스튜디오’의 간부들도 매우 흡족한 얼굴이었으니까. 베테랑의 눈에도 ‘남사친: 리메이크’의 완성도나 퀄은 상당했다.
이를 입구 쪽에서 가만- 히 지켜보던 기획팀 여자 팀장이 순간 끼었다.
“차트 석권하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방송사는 TBE 7월 12일 월요일 밤 10시 첫방입니다.”
실제로 ‘남사친: 리메이크’의 뚜껑이 열리는 날은 코 앞이었고.
“이번 3분기 경쟁작은 대략 30갭니다.”
격렬한 전쟁터가 예상됐다.
인천 공항.
수많은 인파가 넘쳐나는 입국장. 그런 입국장에 외국인 무리가 나타났다. 반삭의 머리거나 덩치가 산만 하다던가 근육이 탄탄한 남자들. 얼추 5명 정도 돼 보이는 외국인 무리가 입국장에 나타나자 줄펜스 주변에 있던 한국인이 그들을 반겼다.
잘 보니 한국인은 ‘이로운 악’ 쪽 스탭이었다.
두 팀은 적당히 영어로 대화를 하다가 이동했다. 외국인 무리는 공항 밖 갓길에 세워진 커다란 승합차 두 대에 나눠 탔다. 그중 앞쪽엔 외국인 3명이 탔다. 반삭 머리 곰 같은 덩치 코가 큰 남자였다. 이어 모두가 탑승하자 승합차 두 대가 출발했고 앞쪽 승합차의 외국인 중 코가 큰 남자가 영어로 말했다.
“덥군 이렇게 더울 줄이야.”
나머지 외국인 남자 둘이 고개 끄덕이며 동조했다.
“얘기를 듣긴 했는데 그 이상이네요.”
“그래도 작년에 갔던 일본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느낌상 코가 큰 남자가 리더 같았다. 창가 쪽에 앉은 보통의 체형이지만 근육이 탄탄한 그가 오른쪽에 앉은 반삭 머리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받았던 자료 좀 보자고.”
반삭 머리 남자가 앞에 내린 백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뭔가를 조작하자 영상이 출력됐다. 재밌는 점은 영상 속 인물이 강우진이라는 것. 명확히 말하자면 액션 스쿨에서 무술 연습을 선보이는 과거의 우진이었고.
“흠-”
받은 태블릿 속 강우진을 유심히 보던 코 큰 남자가 작게 읊조렸다.
“폼이 좋긴 한데···직접 보지 않으면 판단이 어렵겠어.”
“그래도 기본기 이상은 잡혀 있는 거 같은데요.”
“하지만 기본기만으로는 ‘CQC’를 구현하는 건 오래 걸릴 거야.”
“촬영날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흠- 힘들다면 연출로 적당히 타협을 봐야겠죠.”
사실 이들은 ‘이로운 악’ 측이 섭외한 헐리웃 쪽 스턴트 코디네이터 팀이었다. 이어 턱을 쓸던 코가 큰 남자가 재차 말했다.
“영상으로 보기엔 ‘개리 펙’이 말한 대단함은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그가 말한 ‘개리 펙’은 헐리웃에선 퍽 잘나가는 ‘라스트 킬3’의 스크린 테스트에서 강우진을 경험했던 스턴트 코디네이터였다.
“이 강우진이란 배우와 만나는 게 오후라고 했나?”< 가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