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6) >
헐리웃의 스턴트 코디네이터 에단 스미스. 그가 영화 제작시 하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액션 콘티의 기획 수정 발전 무술 동선의 창작 디자인 대역 상대역 배경 컨택 훈련 연습 등등등.
간단히 나열해봐도 끝이 없었다.
각본이 나오기 전 액션 관련해선 그와 상의는 물론 감독이나 배우도 모두 스턴트 팀과 심도깊은 얘기를 나눈다. 미술팀이나 특수효과팀 등도 스턴트 팀과 관련이 깊다.
즉 영화에 삽입된 액션에 관련해선 모두 그의 손을 거친다고 봐야 했다.
보통 헐리웃에 있던 에단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관여하지만 이번 ‘이로운 악’처럼 단편적인 액션 제작을 맡기도 했다. 헐리웃이든 아시아든 어디든 타이밍이 맞으면 한다. 물론 작품의 규모를 보는 것도 있다. 포괄적으로 보면 프리랜서니 당연했다. 헐리웃의 유명 스턴트 팀이 에단만 있는 건 아니니까.
어찌 됐든 헐리웃에서 그의 경험은 상당했다.
인맥도 마찬가지.
그런 그가 보기에 ‘이로운 악’ 측이 보내온 ‘CQC’ 관련 무술 콘티는 아쉬웠다. 뭐 사실 그의 눈에 차는 콘티가 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콘티란 건 결국 대본이나 시나리오가 기반이 되고 그것은 보통 감독이나 작가가 만들어내니까. 전문가인 에단이 만족할 콘티는 백에 하나 나올까 말까였다.
‘이로운 악’도 마찬가지.
부족하진 않았다. 작가가 자료조사를 세세하게 한 듯 보였다. 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걸리는 점이 많았다. 그것을 다듬는 것이 에단 스미스의 일이긴 했다만 욕심대로 자유로이 하는 건 불가능했다. 상황과 현실에 맞춰서 최대한 끌어내는 게 다였다.
예를 들자면 제작비나 배우.
기똥찬 연출을 생각해도 돈이 부족하면 애초 찍을 수가 없고 화려하고 멋들어진 기술을 창작해도 배우가 소화하지 못하면 말짱 꽝이었다. 보통은 배우의 기술 훈련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그렇기에 에단은 ‘이로운 악’의 콘티에 아쉬움이 느껴졌어도 타협해야 했다.
발전보단 배우를 이 콘티를 소화할 수준으로 올리는 게 급선무니까.
그런데 한국에 오니 크나큰 반전이 숨어 있었다.
‘이로운 악’이 제공한 ‘CQC’ 콘티는 길지 않다. 대본상 1화 2화에 삽입될 것들이었고 80% 이상이 해외 로케에서 촬영된다.
따지면 양보단 질이었다.
짧고 굵게 치고 빠지는 느낌. 그 콘티를 흔드는 코가 큰 에단.
“처음 이 콘티를 받았을 땐 전체적으로 아쉽다고 생각했어. 심심하다는 게 정확하겠지. 액션 디자인을 수정할 수는 있겠지만 정작 주인공이 ‘CQC’에 미숙하다면 의미가 없어.”
팀원 중 곰 같은 남자가 공감했다.
“콘티를 발전시켜 봤자 기초 훈련에 돌입한 주인공이 소화할 순 없겠죠. 훈련에만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고.”
“맞아. 그런데 어제의 강우진은 ‘CQC’에 능숙했다.”
“기초가 되는 무술도 수준급 이상이었습니다.”
“당연해 ‘CQC’는 종합 근접 전투술이야. 무술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런 퀄리티 안 나오지. 하여튼 그가 부족하다는 판단에 콘티가 아쉬워도 훈련 외의 것들 때문에 그냥 넘어갔는데 강우진의 실력이 어제와 같다면 콘티를 더욱 익사이팅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팔락.
에단이 콘티를 펼쳤다. 그러자 스턴트 팀원들 역시 같은 콘티를 집었다. 이어 에단 스미스가 큰 코를 긁으면서도 다시 말했다.
“먼저 어제 강우진과 합을 나눴던 감상을 얘기해 봐.”
팀원들이 차례로 느낀 점 등을 브리핑했다.
“강우진의 상황 판단은 실전에서도 먹힐 수준이었습니다.”
문제점 역시 필요한 항목이었지만 어째선지 팀원들의 입에선 딱히 나오지 않았다. 그저 우진의 몸놀림에 관한 칭찬이 주를 이뤘다.
“총기를 다루는 것이 전문가 수준이었죠. 물론 어제 하루만 보고 판단하긴 이르지만 능숙한 건 사실입니다.”
몇십 분간 팀원들의 의견을 받던 에단이 펜을 들어 ‘이로운 악’ 콘티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창작 동선 외의 여러 가지를 메모하는 것.
“···총기. 원래의 콘티에선 권총이 주로 나오지만 종류는 늘리는 것도 좋겠어. 소총이라든지. AK 시리즈가 떠올라.”
“주인공과 잘 어울립니다.”
“맨손 칼 외의 주변에서 흔히 볼 소품을 이용하는 것도 더 필요해.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지만 무기로는 생각지도 못한 것.”
읊조린 에단이 턱을 쓸다가 말했다.
“포크- 아니 한국은 포크보다는 젓가락을 많이 사용하지.”
뒤로 여러 아이디어를 뱉던 에단이 주제를 바꿨다.
“이 콘티는 이미 속도감이 괜찮아. 그러나 더 빨라져야 한다고 봐.”
“같은 생각입니다 설정 자체가 주인공이 ‘CQC’에 전문가니까요.”
“어제 너희와 나눈 테스트 컷은 사실 중간 보스급의 경합을 다루는 씬이라 디테일을 높이고 속도감을 줄였지만 메인은 신속함이지.”
‘CQC’의 핵심은 스피드에 있다는 게 에단의 뚝심이었다. 물론 그의 팀원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완급조절로 보면 이 콘티보다 두 배는 빨라져야 합니다.”
“두 배. 그 이상도 괜찮아. 결국 주인공이 수십 명 이상의 상대를 빠르게 처리하는 컷이 대부분이니. 속도를 높이면서 액션의 디자인은 놓치지 않아야 해.”
곧 에단과 팀원들의 입에서 여러 단어들이 나왔다. 액션 디자인과 예술 역동성 타격감 신속함 파괴력 카체이스(차 추격전) 등등등.
점차 에단이 든 ‘이로운 악’ 콘티엔 글자가 빼곡해졌다.
그의 욕심 실력 경험들이 적나라하게 적히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강우진이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는 짓. 허나 지금의 에단은 고삐가 풀렸다.
‘이로운 악’의 ‘CQC’ 무술 콘티가 헐리웃 급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뜻.
이때.
-♬♪
한창 메모하던 에단의 청바지 속 핸드폰이 벨소리를 뱉었다. 전화였고 상대를 확인한 에단이 작게 웃었다. 곧 팀원들에게 손짓한 그가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그래 개리.”
상대는 강우진과는 ‘라스트 킬3’의 스크린 테스트서 연을 맺은 헐리웃의 유명 스턴트 코디네이터 개리 펙이었다.
“하하하. 에단 한국은 어때?”
“나쁘지 않아. 더운 것을 빼면.”
“그래? 강우진은 만났어?”
던져진 물음에 코가 큰 에단은 다른 대답을 꺼냈고.
“그가 특수부대 출신인 건 알고 있었나?”
핸드폰 너머 개리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특수부대?”
이번엔 에단이 착각의 숙주였다.
한편.
에단이 헐리웃에 착각을 전염시켰을 무렵 진작에 집을 나선 강우진은 한창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코트 겁내 입네.’
그의 오늘 첫 번째 스케줄은 명품 브랜드의 화보 촬영이었다. 계절상 여름이지만 그가 교체하며 입는 의상은 가을과 겨울의 코트들이었다. 벌써 디자인 다른 코트를 5번은 바꾸지 않았을까? 다분히 빡빡한 상황이지만 이건 약과였다.
오늘 그가 소화할 스케줄만 4개가 넘었다.
평소보다 더 많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며칠 뒤 강우진은 마일리 카라 건으로 LA에 넘어가야 했으니까. 그것을 대비해 여러 스케줄을 미리 당겨서 소화해야 했다.
이미 국내 언론에서는 우진의 LA행을 다루고 있었다.
『[스타포토]글로벌 슈퍼스타 마일리 카라와 앨범 작업 코앞 강우진 팬들에게 무던하게 인사/ 사진』
물론 이것 말고도 이슈는 많았지만 역시 강우진의 것이 많았다. 뭣보다 카라와의 작업은 다분히 파격적이었기에 더 그랬다. 국내 가수가 아닌 배우로서는 최초였으니. 이후 우진이 화보 촬영을 마친 시각은 늦은 점심쯤이었다.
다시금 밴에 오른 우진의 행선지는 호텔이었다. 거기에서 꽤 큰 규모의 패션 관련 행사가 있었고 우진은 초대 손님이었다.
곧.
“우진아.”
조수석의 꽁지머리 최성건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남사친: 리메이크’ 예고 떴다.”
첫 방영이 임박한 ‘남사친: 리메이크’의 정식 예고편이 오픈됐다. 죄다 일본어로 만들어졌지만 강우진이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고.
‘크- 퀄 좋네.’
강우진은 만족했다. 일단 예고편에 깔린 OST가 자신이 부른 것의 일부분인 것부터 마음에 들었다. 곳곳에 자신이 성우로써 활약한 목소리도 첨가됐다. 우진은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며 낮게 읊조렸다.
“좋네요.”
재밌는 건 애니 ‘남사친: 리메이크’의 입소문이 한국에서도 꽤 가파르다는 것. 강우진이 검색한 결과물이 증거였다.
『‘강우진’이 성우로 참여한 ‘남사친: 리메이크’ 일본에서 정식 예고편 떴다!』
애니 ‘남사친: 리메이크’의 경우 ‘이슈왕’ 강우진의 힘으로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뭐 원래도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수여가 꽤 크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 애니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국내 OTT 플랫폼의 화력이 추가됐다. 그들이 이벤트나 광고를 퍽 신명나게 올리는 것.
이유야 빤하지 않은가?
일본에서 ‘남사친: 리메이크’가 정식 방영되는 다음 날 국내의 애니 OTT 플랫폼에서도 ‘남사친: 리메이크’를 서비스하니까.
즉 ‘남사친: 리메이크’를 한국 대중들도 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에 강우진은 아닌 척하며 핸드폰으로 각종 커뮤니티를 돌았다. ‘남사친: 리메이크’야 일본이 메인이겠지만 한국 팬들의 반응도 궁금했으니까.
-살다살다 한국배우가 성우로 참여한 일본 애니를 보는 날이 올줄이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 시바….애니 ott 이거 다시 결제 해야되나??
-난이미 결제해둠ㅋㅋㅋㅋㅋ
-딱 1화만 봐볼 건데 어디서 볼 때 없냐???
-하악하악 졸라 빨리 보고 싶어!!
-근데 강우진이 성우 ㅈㄴ개떡같이 했으면 어쩜??
-그건 그것대로 볼만할듯ㅋㅋㅋㅋ담날 애니 본 애들이 욕 존나하면섴ㅋㅋㅋㅋ
-난 애니 내용이 쌉궁금한뎈ㅋㅋㅋㅋ어떻게 각색했을지
·
·
·
생각보다 기대감은 컸다. 죄다 좋은 말만 있는 건 아니긴 했다. 악플도 꽤 많다. 근데 뭐 어쩌라고? 우진은 별수롭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신경 쓰였다.
-[10/대본(제목: 남사친: 리메이크) SS급]
SS급인 ‘남사친: 리메이크’의 결과였다.
‘흠- 역시 시청률이겠지? 몇이나 나올라나.’
7일 낮. DM 프로덕션
‘이로운 악’를 넷플렉스와 합동으로 만드는 제작사. 송만우 PD가 바지사장을 겸하는 DM 프로덕션 중 드넓은 회의실에 익숙한 인물들이 모였다.
대충 20명쯤?
턱수염 송만우 PD와 무술 감독 포함 키스탭 수십 그들의 건너편 자리엔 헐리웃 스턴트 코디네이터 팀 4명과 리더 에단 스미스.
ㄷ자형 책상에 둘러 앉은 그들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았다.
회의실이 좀 어둡다 보니 더 그랬다. 이유야 간단했다. 이 회의실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으니까. 정면엔 스크린이 펼쳐져 있었고 한 영상이 출력되고 있었다.
긴팔 흰티에 슬랙스 의사인 강우진이 보인다.
그랬다. 이들 전부가 보고 있는 것은 며칠 전 액션 스쿨에 등장한 테스트로 ‘CQC’의 콘티를 보인 강우진의 영상이었다. 테스트 제안은 스턴트 팀의 리더 에단 스미스가 했었다. 그리고 이 회의실에 있는 인원 모두가 저 영상을 현실에서 목도 했다.
어쨌든.
“···”
“···”
“···”
영상 속 강우진. 아니 ‘이로운 악’의 주인공 ‘장연우’가 활개 치는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스크린 속 ‘장연우’의 움직임은 냉철하면서도 지체 없는 판단을 보였다. 누가 봐도 ‘CQC’의 특화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스턴트 팀이 처절하게 당한다.
턱수염 송만우 PD는 영상을 보면서도 던너편 에단 스미스의 표정을 힐끗댔다. 급작스에 이 영상을 보자는 것도 그의 요청이었기에.
‘왜 갑자기 이걸 보자고 한 거지?’
역시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헐리웃으로 튀려는 건가? 뭐든 무슨 낌새가 있다.
후로 몇십 분.
재생되던 영상이 끝에 도달하자
-스윽.
코가 큰 에단 스미스가 돌연 건너편의 송만우 PD에게 말했다. 물론 영어로. 톤이 진중했다.
“따로 얘기할 게 있는데 괜찮습니까?”
모인 키스탭들을 물려달라는 얘기였다. 곧 통역 직원을 통해 뜻을 전달받은 송만우 PD가 키스탭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키스탭들이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내 회의실엔 송만우 PD와 에단 그리고 그의 팀이 남았다. 추가로 무술 감독도. 에단의 요청이었다.
이어.
“강우진씨를 본 후엔.”
에단이 건너편 송만우 PD에게 말했다.
“우리를 왜 불렀지? 싶었습니다.”
송만우 PD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가 필요 없다고 느꼈다는 얘깁니다. 우진씨의 ‘CQC’는 완성형에 가까웠으니까.”
“그건.”
“다만 이젠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훈련이 아닌 단련이 메인이었군요.”
리더 에단 대뜸 검지를 들었다. 그 검지로 회의실 정면의 멈춘 영상 속 강우진을 찍으며 다시 말하는 에단 스미스.
“그가 군대로 특수부대를 나온 걸 들었습니다. 우진씨가 ‘CQC’에 익숙지 않다는 건 실전이 아닌 연기로써를 말하는 거였고. 확실히 실전 ‘CQC’와 연출된 ‘CQC’는 밸런스가 다르죠.”
순간 송만우 PD와 무술 감독은 두 눈을 끔뻑였다. 멍 때리는 것과 같다. 둘 다 입을 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괴성 비슷한 걸 질렀다.
‘뭐 뭐를 나와?! 특수부대??! 이게 뭔 개똥싸는 소리여???!’
‘우진씨가 특수부대를 나왔다고??!!’
당최 이해가 안 가는 발언이었지만 둘은 에단에게 질문을 던질 새가 없었다.
-스윽.
스턴트 팀의 리더 에단이 챙겨온 투명 파일을 송만우 PD에게 내밀었으니까.
“기존의 콘티를 업그레이드해봤습니다. ‘CQC’가 능숙한 강우진씨가 있다면 그 정도는 텐션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급작스런 주제 변동에 송만우 PD는 일단 침착해졌다. 그 역시 드라마 판에선 거물이니까. 단숨에 투명 파일을 펼친 그가.
“···!!”
첫 장부터 눈이 디립다 확장됐다. 콘티보단 이해를 돕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10분짜리 롱테이크??’< 가을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