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8) >
비행기 안.
LA행 비행기가 인천공항에서 뜬지 한 시간쯤. 밤 비행기라 그런지 비행기 내부는 고요했다. 대체로 조명은 어둡다. 70% 이상의 승객은 잠에 빠졌고 나머지는 개인 조명을 켠 채 각자 할 일을 하는 중.
그 분위기는 비즈니스석 역시 같았다.
특히 거의 좌석에 파묻힌 최성건이 눈에 띈다. 꽁지 머리까지 풀어헤친 채 흡사 사망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역시 최근 강행군이긴 했으니까. 강우진은 비즈니스석의 창가 쪽 자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
틀어진 에어컨 덕분인지 검은색 가디건을 걸친 그는 자고 있지 않았다. 대부분이 잠에 빠졌지만 강우진의 포커페이스는 짙다. 방심 따윈 없으니까. 그런 우진은 자리의 개인 조명을 켠 채 태블릿을 내려보고 있다.
해외 쪽 외신 기사들이 출력되는 중.
『마일리 카라가 SNS에 올린 새 게시물 “강우진과의 앨범 작업이 기대된다”』
『한국의 배우와 새 앨범 작업 시작하는 마일리 카라』
당연히 현재도 미쳐 날뛰는 한국 쪽 언론과 비교하면 미미하지만 그래도 외신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강우진은 약간 신기한 감정이 들었다.
‘영어 기사에서 내 이름 나오니까 겁나 어색하네. 이건 카라 쪽에서 흘린 기산가??’
한국과 일본 언론에서는 자주 본 자신의 이름. 그런데 영어로 된 건 익숙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기사는 우진의 인스타를 소개하기도 했다.
‘역시 마일리 카라 화력 지리네.’
현재 강우진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지만 헐리웃에서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뭐 자잘하게 이름을 알리긴 했다. 증거로 ‘강우진 부캐’ 채널이나 SNS에 영어 댓글이 퍽 늘었으니까.
그래도 크게 보면 좁쌀만 한 인지도였다.
허나 마일리 카라가 언급한 것만으로도 외신이 움직이고 있다. 강우진으 이름을 얘기하거나 그를 조사해서 소개한다. 이것은 오직 전 세계적 슈퍼스타 카라의 힘이었다. 그렇게 몇 분간 외신 기사를 확인하던 우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얼추 자정을 넘겼다.
그래 봤자 LA에 도착하면 시간이야 바뀌겠지만 어쨌든 강우진은 목을 좌우로 꺾으면서도 물을 삼켰다. 적당히 잠을 참는 것. 시차 적응을 위한 준비기도 했으나 딱히 잠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공간에서 자주 쉬어서 그런가?’
곧 우진이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곤 태블릿에 저장된 음원 하나를 틀었다.
-♬♪
금세 곡 하나가 우진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마일리 카리의 가이드판 신곡이었다. 물론 강우진이 작업에 참여할 노래였다. 이미 적응될 만큼 듣긴 했지만 더 많이 듣는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 동시에 우진의 태블릿을 검지로 조작했다.
-스윽.
자주 봤던 뮤직비디오 콘티가 출력됐다. 이 역시 마일리 카라 쪽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뮤비 콘티는 우진이 자주보는 영화 드라마 콘티와 흡사했다. 하지만 분명 강우진으로서는 뮤비는 처음 경험하는 영역이었다.
‘재밌기야 하겠는데 은근 떨리네 이거.’
사실 처음 이 콘티를 받았을 땐 그저 그랬던 우진이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타니 심장박동이 미세하게 올랐다. 처음 찍는 뮤비에 긴장했다기보다는 기대감에 가까웠다. 거기다 그 상대가 배우로도 가수로도 온 세계를 호령하는 스타 마일리 카라였다. 아니 마일리 카라? 진짜냐 이거? 새삼 우진은 현실감이 멀어졌다.
‘···씨 내가 마일리 카라 뮤비에 나오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앨범에도 참여한다. 이 소식은 이미 국내에 파다했고 강우진의 주변인들에게도 숱한 연락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특히 불알친구들이 발광했었다. 강우진 본인도 신기한데 그들이야 오죽할까. 이어 다시금 시선을 태블릿에 내린 강우진. 출력되는 뮤비 콘티를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근데- 아공간이 안 뜨는 건 아쉽단 말이지.’
당연하겠지만 뮤비엔 검은 사각형이 뜨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번 뮤비 촬영은 아공간 없이 강우진이 쌩으로 들이받아야 한다는 소리.
‘딱히 연기랄 게 없어서 문제 되는 건 없어 보인다만-’
그래도 연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연기가 포함된 촬영물을 아공간 없이 진행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잠시간 생각에 빠졌던 우진에게 노빠꾸 기질이 솟았다.
‘몰라 씨. 뭣하면 아무 배역이나 끌어올리면 그만이고.’
10일 토요일 아침. 일본.
한창 강우진이 탄 비행기가 LA에 근접했을 무렵 일본 전역은 홍보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3분기 애니메이션 홍보 시작」올해 기대작으로 눈길을 끄는 작품이 많다!』
수많은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뿌리는 것들이었다. 일본에선 매년 분기별로 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이번에는 3분기. 분기마다 최소 30작품 이상이 쏟아지는 시장이기에 일본 대중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선 죽어라 홍보를 돌리는 것이 당연하긴 했다.
그게 아니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니까.
물론 딱히 홍보를 하지 않아도 기세 높은 애니도 있긴 했다. 원작인 만화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애니가 그랬다. 매년 베스트셀러 만화가 애니로 만들어지고 있었고 이번 3분기에도 존재했다.
뭐가 됐든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무기만 안 들었지 혈투가 가미된 전쟁터였다.
『「최강 스파이」첫 애니화! 원작 만화 인기 이어 갈 수 있나?』
『아키하바라에서 대규모 행사 연 「스파이 대디」! 성우들 팬 사인회』
『드디어 2기 나왔다 「마술회전」팬들 2기 방영 소식에 벌써 시끌』
『「강우진」참여한 ‘남사친: 리메이크’ SNS 검색 순위로는 1등!』
물론 ‘남사친: 리메이크’의 기사도 퍽 많이 보였다.
『유일하게 한국 드라마 원작인 「남사친: 리메이크」 3분기 작품 중 유일하게 로코물 애니메이션』
많은 애니 중 ‘남사친: 리메이크’만이 원작이 만화가 아니었다. 심지어 원작이 ‘남사친’으로 한국 작품이었고 최근 일본 애니 시장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는 로코물. 따라서 제작사인 ‘A10 스튜디오’는 홍보에 붓는 돈을 두 배로 늘려야 했다.
어찌 보면 수십 애니 작품 중 제일 약세일지도 몰랐다. 다만 ‘남사친: 리메이크’에도 휘두를 무기는 있었다.
『‘A10 스튜디오’가 말한 성우 「강우진」 “성우로 전향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의 실력”』
이슈. 즉 강우진이었다. 숱한 화제성으로 일본에서 인지도 최강으로 우뚝 선 그가 유일한 돌파구. 더불어 ‘A10 스튜디오’가 감행한 도전적인 것들도 한 몫 거들었다. 한국의 작품을 애니화 한 것 뜬금 한국배우를 남자 주인공 성우로 기용한 것 더불어 OST 등을 강우진에게 맡긴 것 등등.
그 덕분에 첫 방영이 이틀 남은 ‘남사친: 리메이크’는 일본 각종 SNS 커뮤니티에서 가장 뜨겁게 회자되고 있었다.
『SNS나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얘기되는「남사친: 리메이크」 화제성만으로는 현재 1등』
당연히 전부가 좋은 말은 아니었다.
-남사친: 리메이크!! 기대돼!
-www강우진이 성우한 거 때문에 궁금하긴 해www
-난 별로 보고 싶지 않아 어차피 강우진이 성우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을 거고
-이 애니…결국 나오는구나….한국의 작품이 원작이 아니라면 봤을텐데….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지만 오랜만에 로코물이라 난 1화는 볼 생각이야
-일본에 잘 나가는 남자 성우가 얼마나 많은데ㅠ 왜 a10은 한국 배우를 쓴 거지?
-남사친: 리메이크는 사람들이 많이 보긴 할 거야 기대하는 사람들이나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일단 궁금해서라도 볼 테니까
따지고 보면 악플이 더 많이 보였다. 허나 이 역시 관심이라면 관심. 따라서 ‘A10 스튜디오’는 대중들이 뭐라 떠들든 말든 홍보의 고삐를 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SNS 너튜브 커뮤니티 등으로 광고를 쏟았다.
최근 일본 애니 시장의 동향은 척박하다 볼 수 있었다.
3%에서 5%대 시청률이 평균이었고 10%대가 나오면 대박이라 봐도 됐다. 2년 전 15% 시청률을 올린 애니가 나왔는데 일본 언론에선 초대박이라 칭할 정도였다. 3%대 시청률이 시청률 순위로 10위 정도. 올해 1분기나 2분기엔 10% 애니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본 언론도 3분기 애니 시장을 집중했다.
『3분기에서는 「시청률 10%」작품 나올까?』
기대작이 많기도 했으니까. 기대작이 많다는 것은 곧.
『기대작 많은「3분기」 최소 10작품 이상! 과연 승자는?』
‘남사친: 리메이크’의 경쟁자가 한둘이 아니란 얘기였다.
한편 한국. 인천공항.
아침이지만 공항 출국장엔 사람이 넘치고 있었다. 7월의 휴가철이라 평소보다 몇 배 이상의 인파가 몰린 것. 그 사이 어마무시한 짐을 든 수십 무리가 눈에 띄었다. 딱 봐도 촬영팀의 냄새를 풍기는 팀이었고 개중에는 외국인들도 포함이었다. 외국인들을 잘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코가 큰 에단 스미스와 스턴트 팀이었으니까.
그들의 앞에도 낯설지 않은 얼굴이 많았다. 특히 턱수염이 자욱한 남자가 그랬다.
“팀별로 짐들 잘 챙기고! 방콕 도착했는데 뭐 없어졌다 그러면 사고다!”
송만우 PD였다. 당연했다. 이 수십 인파는 ‘이로운 악’ 촬영팀이었으니까. 물론 전체가 움직이는 건 아니었고 이번 태국 방콕의 해외 로케 관련에 참여할 팀들만 모였다.
목표는 방콕 현지의 장소헌팅.
이미 방콕 쪽에는 해외 로케를 책임질 라인 PD가 대기 중이었다. 이번 ‘이로운 악’의 방콕행은 상당히 중요한 일정이었다. 프리 프로덕션 중 끝물과 대본리딩 바로 직전의 스케줄이기도 했고 1화와 2화의 핵심이 될 ‘CQC’ 무술 콘티를 확정 지어야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
에단과 스턴트 팀의 표정이 굳건했다.
이때.
“입국! 입국 수속! 차례로 들어갑시다!”
조연출의 외침을 시작으로.
-스윽.
‘이로운 악’ 팀이 방콕으로 출국했다.
LA 국제공항.
강우진과 그의 팀이 LA에 도착했다. 수많은 인종이 넘실거리는 어마무시하게 넓은 입국장에 우진이 발을 들인 건 밤이었다. 정확하게는 하루 전인 9일의 밤. 무심한 얼굴의 우진이 공항 창문 밖으로 보이는 어두 컴컴한 하늘을 응시했다.
‘미친 밤에 출발했는데 밤에 도착했네.’
비행기에서 어떻게든 안 자고 버틴 자신을 속으로 칭찬하는 강우진. LA는 ‘우리네 식탁’ 촬영 후로 처음이었다. 뒤로 최성건과 십수 명 인원이 붙었다. 우진의 너튜브 채널 ‘강우진 부캐’ 팀도 포함이었다. 입국 심사를 마친 이들은 드넓은 로비를 지나 공항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입구 갓길에 커다란 승합차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니 커다란? 그보다 더 거대한 차였다.
‘대표님이 준비했나?’
당연히 최성건이 준비했을 거라 생각한 우진이었으나 아니었다. 그 답을 꽁지머리 최성건이 읊조렸다.
“이야- 마일리 카라 쪽이 제대로 손님 대접해주네. 이 밤에 차까지 보내주고.”
마일리 카라가 보내준 거였고 당연히 우진이 이번에 LA에 있을 동안 계속 써도 괜찮은 차였다. 곧 차 운전석에서 내린 우람한 외국인이 강우진과 팀의 짐 정리를 도왔다. 강우진과 최성건 한예정 외의 몇몇은 앞쪽 승합차에 올랐다. 차에 막상 타니 내부는 예상보다 더 넓었다.
‘와- 씨 차 진짜 개크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우진이었으나 속으로는 화들짝 놀랐다. 동시에 강우진의 옆자리에 앉은 최성건이 비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숙소도 카라 쪽이 잡아 준 거 알지? LA 중심부 5성급 호텔. 죄다 스위트룸이더라. 뭐 그쪽이 부른 거니까 당연하긴 하다만.”
이어 짐 정리를 마친 우람한 외국인이 운전석에 올랐다. 조수석에도 마찬가지 거인이 탔다. 가드였다. 그런 둘 중 운전석의 외국인에게 최성건이 몸을 붙였다. 핸드폰을 보이며 뭔가 말하는 그. 우진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딱히 묻진 않았다.
그렇게.
-부웅!
거대한 승합차 두 대가 나란히 LA 공항을 벗어났다. 우진은 창밖에 보이는 LA 야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우리네 식탁 찍을 때도 봤는데 확실히 야경은 LA가 지리긴 해.’
이쯤 꽁지머리를 다시금 묶던 최성건이 하품을 쩍 하며 끼었다.
“일단 오늘은 숙소 가서 쉬고 마일리 카라는 내일 낮쯤에 만나서 미팅할 거다. 그쪽이 호텔로 온다네?”
“그렇습니까?”
“어어. 그리고 숙소 가기 전에 한 곳 먼저 좀 들르자.”
이 밤에 어디를? 속으로 되물을 뿐 강우진은 컨셉질 짙은 얼굴로 끄덕였다.
“예 대표님.”
이후 우진을 태운 승합차는 뭔가 높은 건물이 즐비한 도심에 들어섰다. 시간이 늦었지만 도로에 차도 많고 밝게 켜진 건물의 불빛 때문에 밤이 아닌 낮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상태로 5분쯤 달렸을까?
-끼익!
차 두 대가 갓길에 나란히 정차했다. 바로 내리는 최성건. 우진도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바로 앞엔 베이지 톤의 사각형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의 입구를 손짓하는 최성건. 표정엔 웃음이 짓다.
“들어가자.”
결과적으론 최성건과 강우진 가드 외국인 등등으로 총 6명 정도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LA 감성이 풀풀 풍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최성건은 복도를 따라 뚜벅뚜벅 걸었다. 이내 한 사무실 앞에 도착한 꽁지머리 최성건이 뒤로 고개를 돌려 우진에게 말했다.
“여기하고 옆에랑 그 옆에까지다.”
뭐가? 최성건은 바로 앞 사무실과 옆으로 붙은 2개 사무실을 가리켰다. 그런 그가 돌연 앞의 사무실 유리문을 열었다. 그리곤 불을 켰다. 사람은 없지만 수십 책상들은 배치됐고 그 위는 텅텅 비었다.
대체로 갓 이사 온 느낌이 강했고.
-슥.
사무실 내부로 한 발 들어온 최성건과 강우진 중 최성건이 검지로 사무실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저기 좀 봐라 우진아.”
검지를 따라 우진의 고개가 돌았다.
‘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대형 화보 포스터였다. 정장을 입은 강우진이 멋들어지게 자세를 취한 포스터가 벽에 당당히 걸렸다. 민망함과 의문이 동시에 든 우진에게 미소가 짙어진 최성건이 말했다.
“여기가 bw 엔터 해외 지사다 당연히 네가 메인이고.”
이곳은 강우진의 헐리웃 본진 시발점이었다.< 가을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