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4)
뭐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자신의 원룸에 앉은 강우진은 허공을 보며 멍때렸다. 약간 아공간에 처음 진입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미친.”
눈으로 현실을 보고 있지만 꿈같은 느낌. 물론 아공간을 지닌 이후 ‘현실적’이란 건 무시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정신 나간 상황을 경험했는데 사고가 멈추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몇 분쯤.
“어-”
뇌 작동을 멈췄던 강우진이 아무 말이나 씨불였다. 현재 이 미친 상태를 언어로써 표현한 것. 당연하겠지만 영어로.
“What the heck happened to me?”(대충 격하게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뜻)”
술술 나왔다. 발음이 말도 안 되게 유창했다. 강우진은 그대로 다른 말들을 쏟아냈다. 싹- 다 영어지만 막힘없이 입에서 술술 나왔다.
이건 누가 봐도 미국에서 사는 재미교포 수준.
뭐 우진도 기본 영어는 하겠지만 콩글리시였다. 응당 고등학교를 나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 영어 울렁증까진 아니지만 친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강우진은 원어민으로 착각해도 이상할 게 없다.
“와···”
강우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피똥 싸며 공부해야 될까 말까 한 타국의 언어를 한순간 습득했으니. 당장 미국에 가도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극찬 그 이상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아공간의 능력은 이미 상상 초월이었다.
곧.
“이 일단. 좀 침착하게.”
컨셉따위 없이 평범하게 당황한 강우진은 자신의 상태를 체크했다. 머리와 속을 세세하게 훑었다. 마치 뇌 속 한켠에 영어가 가득한 것 같았다. 매우 자연스럽다. 한국어와 다른 바 없다.
굳이 필요한 영어단어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원하는 단어를 생각하면 바로 떠올랐고 그것이 입으로 쏟아져 나왔다. 즉 이 느낌은 아공간서 배역 경험 후 수천 번 외운 것처럼 각인되는 대사와 유사했다. 우진은 계속해서 영어를 씨불였다. 스무스하고 부드럽게. 역시나 막힘 없이 술술 나온다.
슬슬 강우진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대사 외워지는 것도 쩔었는데···다른 나라 언어까지? 아공간 능력 미쳤다.”
솔직히 우진은 ‘비슷한 형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있기도 했다. 아공간에서 배역을 경험하고 나오면 그 배역의 대사가 각인된다. 만약 배역 중 외국어를 쓰는 역을 리딩하면 그 대사는 가질 수 있겠지. 딱 이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예 언어 하나를 통으로 이식시켜줄 줄.”
아공간은 속이 좁지 않았다. 통이 아주 태산 같았다. 느낌상 ‘뭐? 영어? 필요해? 뭘 궁상맞게 찔끔찔끔. 잠깐만 그냥 영어 줄게.’ 딱 이거였다. ‘돈? 그딴 게 뭐야. 무상이야 무상.’ 이것도 포함.
우진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간다.
‘이러면 나중에 뭐냐 막 헐리웃 가고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헐리웃이란 곳을 그냥 들어만 본 데다 꽤 먼 얘기겠다만 한국 배우가 헐리웃을 진출하려면 유창한 영어는 필수. 비단 배우 쪽이 아니라도 영어는 여러모로 유용하기도 했다.
강우진은 급작스레 펼쳐지는 황금빛 미래에 웃음이 짙어졌다. 이때 멈칫.
“아.”
대본을 보려면 읽기도 돼야 하잖아? 당연히 아무 문제 없이 읽히겠지만 우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켰다. 그가 찾은 것은 영어로 된 신문이었다. 그런 건 인터넷 검색만 좀 하면 금방 나오기에.
그리고 답은 역시나.
“개꿀.”
읽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마치 한글을 읽는 것처럼 바로바로 읽혔으니까. 평생 번역기를 달고 살았던 우진에겐 말도 안 되는 경험. 그러다 강우진은 불현듯 생각의 결을 넓혔다.
아공간만 있다면.
“영어 말고도 다른 나라 언어도 가질 수 있는거잖어.”
어느 나라 언어든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그 언어가 포함된 대본을 얻어야겠지만 아니 지금 그딴 게 대수겠는가?
“가만있어 봐. 영어 다음엔 뭘.”
이때.
-우우웅 우우우웅.
근방에 놓인 우진의 핸드폰이 긴 진동을 뱉었다. 덕분에 미소를 머금은 강우진이 발신자를 확인했다. 상대는 송만우 PD였다. 우진은 기분이 매우 업된 상태지만 애써 억눌러야 했다.
기쁨에 취해 경박스런 톤이 나오면 곤란했다. 따라서 그는 작게 심호흡한 뒤 전화를 받았다.
“네 PD님.”
합격이었다. 냉엄한 목소리가 나왔으니. 곧 핸드폰 너머로 송만우 PD의 약간 상기된 음성이 들렸다.
“우진씨 첫 촬영날 확정됐어요. 25일.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이틀 뒤 20일 아침 논현동 박스무비 영화사.
방금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선 얼굴이 구겨진 눈썹에 흰색 털이 섞인 우현구 감독과 키 작은 최도민 실장이 내렸다.
웃긴 건.
“그러니까 무명 걔가 오디션을 깠다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감독님.”
“이런 미친. 뭐하자는 거야.”
“정말 죄송합니다.”
최도민 실장이 우현구 감독에게 붙어 빌빌대고 있다는 것. 죽을죄를 지은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대역죄인. 그럴만했다. ‘제가 억지로 밀어붙인 강우진이란 무명에게 까였다.’ 이 소식을 전한 직후였으니까.
반면 거장 우현구 감독은 내뱉는 숨조차 서늘했다. 눈빛 역시 마찬가지.
즉 빡친 상태.
그런 우현구 감독이 대역죄인 최도민 실장을 노려보다가 복도를 걸으며 짜증 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나? 무명은 날고 기어봐야 무명이라고 했지. 이게 뭔가? 자네 그 독단적인 행동이 내 얼굴에 먹칠을 했잖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무명 새끼는 왜 오디션 안 온다는데. 한 번 들어나 보자.”
“그 그게 스케줄이 안 맞는다고.”
“뭐라? 스케줄이 뭐?”
“안···맞는다고.”
순간 걸음을 멈춘 우현구 감독이 흰털 섞인 눈썹을 격하게 추켜 올렸다.
“그 무명 새끼가 고작 스케줄이 안 맞는다고 내 영화 오디션을 깠어?”
무명이 스케줄이 어딨으며 있다고 한들 그 이유가 전부? 우현구 감독은 분노가 치밀었다. 이에 당연히 최도민 실장은 더욱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거 아주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놈일세. 허- 스케줄이 안 맞아? 그 무명 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지?”
“bw엔터의 강우진입니다.”
“bw엔터? 신생인가? 거기 대표가 누구야.”
“최성건 대표라고. 감독님도 몇 번은 보셨을.”
“알아 홍혜연 키운 놈. 발이 꽤 넓지? 근데 최성건이 걔는 능구렁이 같긴 해도 싹싹했던 이미진데.”
“일은 잘합니다. 다만 그 강우진이란 무명이 좀···상태가.”
짜증에 우현구 감독이 인중을 씰룩인다.
“그 무명이 병신이란 얘긴가? 내 말 했지? 걔 쎄하다고. 이거 어쩔 건가? 이 얘기 밖으로 세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나? 어? 나만 우스운 꼴 나지 않겠어?”
정답이었다. 행여 이 일에 관해 기자들이라도 알면 100% ‘무명에게 까인 우현구 감독’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쓸 게 빤했다. 배우들에게 소문 돌면 웃음거리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곧 누가 있나 주변을 훑던 우현구 감독이 혼잣말을 뱉었고.
“무명인 새끼가 감히···강우진인지 뭔지 동료 감독들한테 싸가지없는 놈이라고 얘기해둬야겠어. 아주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최도민 실장이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감독님.”
그런 그를 싸늘하게 보던 우현구 감독이 작게 지시했다.
“됐어 말 새지 않게 관리나 잘해. 그리고 오늘 쏘기로 한 기사들 처리 잘 하고. 앞으로 내 앞에서 무명얘긴 꺼내지 마 알았나?”
“예 감독님.”
이어 한 시간 뒤 박스무비 측이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했다. 투자가 완료됐으며 백여 명 스탭들도 모두 세팅됐으니 당연했다. 촬영에 필요한 세트도 공사가 시작된 상태.
『[무비톡]‘거장’ 우현구 감독 대형 영화사 박스무비와 손잡고 차기작 제작 돌입』
과연 거장 감독의 복귀작이라 그런지 대중들이 반응도 심상치 않았고 기사엔 캐스팅이 거의 확정된 뉘앙스로 탑배우들이 거론됐다. 우현구 감독의 차기작에 오르는 것으로도 탑배우들의 급이나 이미지는 올라간다.
이는 의도된 홍보였고.
『곽하민 고성연 등 탑배우들 대거 참여하나? 우현구 감독 차기작에 업계 관심이 쏠린다!』
영화계 언론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한 너튜버의 스튜디오.
‘이슈킹TV’는 구독자 90만을 훌쩍 넘은 나름 대형 채널이었다. 여긴 ‘이슈킹TV’의 스튜디오였다. 채널명답게 여러 이슈를 다룬다. 정치권도 있지만 주로 연예계 이슈를 폭로하는 게 많았다.
채널의 주인은 과거 기자를 했던 인물.
이 ‘이슈킹TV’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연예계의 더러운 사건이 퍽 많았다. 최근엔 한 A급 여자 배우의 불륜을 다뤘다. 그 여자 배우는 현재 잠적 중이었다.
그런 스튜디오 작은 미팅룸에 여자 둘이 마주 앉아 있다.
한쪽은 단발머리에 표정이 단단했고 반대쪽은 모자를 쓴 채 책상을 처연히 내려보는 여자였다. ‘이슈킹TV’의 주인이 단발머리 쪽이었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저밖에 없어요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모자 쓴 여자가 잠시간 침묵했다.
“···”
그게 얼추 10초쯤. 뭔가 마음을 먹은 모양인지 모자 쓴 여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일주일 전이었고 세팅된 스탭 전체 회식이 있었어요.”
“어디였나요?”
“청담에 소고깃집. 이름이 소고기 궁전이었어요.”
“예 계속하세요.”
“저는 연출팀이었고 감독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었어요. 처음엔 저도 고기 먹고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그랬어요.”
“근데?”
“한 시간쯤 지나니까 사람들도 취하고 저도 좀 취기가 돌았거든요. 그때 그 감독이 제 옆자리에 앉았어요.”
“그래서요.”
“···깜짝 놀랐어요. 워낙에 영화판에선 대단한 사람인데 갑자기 제 옆자리 앉으셔서.”
읊조리던 모자 쓴 여자가 잠시 심호흡하다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터치가 시작됐어요. 사람들 모르게. 근데 작정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뭔가 은근슬쩍 가슴이나 허벅지를···”
잠시간 지난날을 어렵사리 설명하던 모자 쓴 여자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집에 데려다준다고 거의 억지로 차에 태워졌어요. 근데 도착한 건 커다란 무인 모텔이었어요.”
“음 계속하세요.”
“너무 무서워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도망쳤어요. 정말 필사적으로.”
“뒤론?”
“전화 엄청 왔는데 전부 씹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연출팀에서 퇴출당했어요.”
천천히 고개 끄덕이던 단발 여자가 되물었고.
“죄송하지만 증거 같은 게 있을까요?”
모자 쓴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탈 때부터 녹음했어요.”
이어 단발 여자가 모자 쓴 여자를 위로했다.
“그거면 충분해요 피해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서.”
피해자가 한 둘이 아니라는 말에 힘 빠진 얼굴의 모자 쓴 여자가 작게 되물었다.
“···저 말고도 더 있는 건가요?”
‘이슈킹TV’의 주인 단발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그래요 더 있었구나.”
처연히 읊조리는 모자 쓴 여자에게 단발 여자가 걱정말라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잘 아시겠지만 그 감독이 워낙에 영화판에선 거물이라 피해자 한 명으로는 엮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이 건은 제가 꽤 오래 조사하고 준비해왔고 이제 충분합니다.”
퍽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이에 모자 쓴 여자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더 있는 건가요 피해자가.”
“총 다섯 정도. 이미 업계에선 꽤 유명하죠? 그 감독 여자 좋아하기로.”
“네 그런 소문이 있긴 해요. 회식이나 그럴 때 꼭 주변에 여배우가 있어야 하고. 여자 스탭들 괜히 툭툭 만지고.”
“근데 거장 감독이기도 해서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일 테죠.”
“맞아요. 영화판에선 배우도 배우지만 감독이 최상위 포식자라.”
이쯤 이해한다는 눈빛의 단발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고.
“잘 알고 있어요. 혹시 녹음했다는 거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 네네.”
핸드폰을 꺼낸 모자 쓴 여자가 여러 녹음파일을 재생시켰다. 그렇게 몇 분간 녹음을 듣던 단발 여자가 다시 물었다.
“협박도 당하셨죠?”
긍정하는 모자 쓴 여자.
“네. 모텔에서 도망친 다음 날에 문자로. 어차피 어디 가서 말해봐야 아무도 안 믿을 거라고···그런 다음에 잘렸어요.”
“상황은 잘 알았어요. 혹시 얼굴 없이 인터뷰는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목소리엔 변조가 들어갈거구요. 특정되지 않게 피해 사실만 말씀해주시면 돼요.”
“할 수 있어요.”
“고마워요.”
곧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보던 모자 쓴 여자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쯤···세상에 알려지나요?”
되물음에 단발 여자가 핸드폰을 검지로 찍었다.
“보니까 차기작 들어간다고 기사도 돌렸더라구요 꽤 양도 많고.”
“맞아요 이미 투자도 해결됐고 배우들 캐스팅도 예약 잡힌 상태. 세트도 공사 들어갔어요.”
“그럼 다음 주쯤이 될 것 같네요.”
이어 단발 여자가 목소리를 줄였다.
“우현구 감독이 나락가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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