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콕 (1) >
조셉이 보는 4개의 시놉엔 간략한 초반 내용이 포함된 쪽대본도 겹쳐 있었다. 물론 그가 보는 시놉의 뿌리는 헐리웃 공룡 영화·배급사인 ‘유니버설 무비스’가 제공한 것. 해봤자 컨셉 또는 아이디어 정도인 것을 영화사에게 고용된 총괄 프로듀서 조셉이 사전에 여러 각본가들에게 넘겼었다.
최근 있었던 팀 회의 이전에 말이다.
그 컨셉 또는 아이디어는 캐디인 메건 스톤도 본적이 있고 알고 있었다. 그녀가 캐스팅될 당시 영화사인 ‘유니버설 무비스’ 측에서 보여줬었으니까. ‘지킬 앤 하이드’가 모티브가 되고 해리성 인격장애가 포함된 컨셉. 즉 다중 인격. 다만 이 같은 컨셉이나 아이디어는 작가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작가 또는 각본가의 손을 거쳐야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스윽.
지금 조셉의 손에 쥐어진 시놉들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시놉 및 쪽대본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나오긴 했다. 재밌는 것은.
‘이렇게나 전부 다를 줄이야.’
같은 컨셉 아이디어에서 나온 시놉·쪽대본의 내용이나 장르가 전부 다르다는 점. 영화 시나리오 4부가 눈앞에 놓인 것과 같았다. 4명의 각본가에게 의뢰했기에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거인 조셉은 미소를 지으며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창작의 세계는 오묘해.’
헐리웃 쪽 시나리오 제작 시스템은 한국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물론 헐리웃에도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드물다. 헐리웃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 거장들이나 그렇고 보통은 조셉이 하고있는 것처럼 헐리웃 쪽 작가들에게 컨셉을 넘겨 집필하게 한다.
당연히 작가는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다.
또한 시나리오 집필 제의를 받은 작가들은 절대 서로를 알 수가 없으며 접촉도 불가하다. 그렇게 하나의 컨셉 또는 아이디어를 여러 헐리웃 작가들이 시놉으로 탄생시킨다. 완성된 시놉은 조셉같은 총괄 프로듀서에게 넘어가고 그 시놉들을 토대로 영화사와 프로듀서 등이 합심해 단 하나를 선택한다.
채택이 완료된 후에야 제대로 된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하는 것.
즉 지금의 조셉은 헐리웃 영화로 제작될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영화사에서도 개입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권력은 프로듀서에게 주어진다. 이 한 번의 선택이 향후 영화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망하면 모두가 죽 쑨다.
조셉은 물론이고 캐디인 메건 그리고 조셉이 사전에 긁어모은 최근 한자리에 모여 첫 회의에 참석했던 헐리웃 유명 키스탭들 전원이 말이다. 무시무시한 액수의 자금도 공중분해.
-팔락.
그렇기에 키가 190 넘는 거인인 조셉은 이미 봤던 시놉들을 다시금 읽기 시작했다. 아니 아마 앞으로 수도 없이 봐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시놉부터 두 번째 세 번째 끝으로 네 번째 시놉까지. 이어 다시 첫 번째 시놉을 다시 리딩.
-팔락 팔락.
워낙 자주 시놉 시나리오를 자주 읽는 조셉이기에 리딩은 빨랐으나 그만큼 흐르는 시간도 삽시간에 녹아 없어졌다.
이윽고.
-툭.
보던 시놉들을 겹쳐 앞쪽 책상 위에 대강 던진 조셉이 기나긴 다리를 꼬며 읊조렸다.
“스릴러 느와르 범죄 액션 코미디. 장르가 제각각이니 더 어렵군. 뭐 이 맛에 하는 일이긴 하다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 작품의 미래를 알고 선택해주면 얼마나 고맙겠어.”
늘 이런 상황이 오면 조셉이 자주 하던 상상이었다. 그런 인간이 존재치 않겠지만 그래도 총괄 프로듀서인 조셉에게는 언제나 꿈꾸던 일이긴 했다.
‘그런 신의 재주를 부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이 순간.
“아니. 비슷한 인물이 하나.”
거인 조셉의 뇌리에 한국 배우 한 명이 스쳤다. 강우진이었다. 그의 필모에선 ‘실패’를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현재 진행형. 한국이나 일본에선 그에게 ‘미다스의 손’이란 별명을 지어줄 정도였다.
‘당연히 기민한 감이나 작품 보는 눈이 뛰어난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신의 재주에 필적하는 정도지.’
잠시간 우진을 떠올리던 조셉이 혼잣말을 뱉었고.
“시간이 괜찮다면 슬쩍 이 시놉들을 보여줘도 괜찮을지도.”
꼰 다리 방향을 바꾼 그가 시놉들을 살짝 민 뒤 다른 파일들을 당겼다. 수많은 헐리웃 감독들이 담긴 리스트와 방콕에 갈 인원과 스케줄이 담긴 파일. 물론 방콕 관련은 강우진의 ‘이로운 악’ 촬영 답사였다.
“감독이야 시놉이 결정된 뒤에 확정하면 되겠고. 일단 쉬운 것부터 하자고.”
그가 미리 정리해둔 방콕 관련 파일을 펼쳤다. 이미 강우진 측과 ‘이로운 악’ 쪽에도 얘기가 끝났다. 조셉은 파일 안 같이 동행할 인원들을 점검했다. 일단 조셉 본인 캐디인 메건 스톤 섭외가 끝난 스턴트 팀들 배급·영화사인 ‘유니버설 무비스’의 간부 몇몇.
꽤 많은 인원이 이동하는 느낌.
사실 이 정도 규모가 한 번에 움직이는 건 쉽지 않다. 조셉이나 메건이야 강우진에게 반한 상태니 그렇지만 나머지는 설득하는 게 어렵다. 허나 조셉은 겸사겸사라는 명목으로 모두에게 확정 대답을 들었다.
‘방콕에 갔다가 바로 프랑스로 가는 루트. 오랜만에 꽤 피곤한 일정이군.’
조셉의 팀은 방콕 후로 칸 영화제에 참석할 참이었다.
후로.
마일리 카라와 꽤 길었던 미팅을 마친 송만우 PD와 김소향 최나나 작가는 같은 날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넘어갔다.
그들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2일.
퍽 강행군을 진행한 송만우 PD였으나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쉬는 것 없이 바로 움직여야 했다.
“고생들 하셨습니다 가셔서 푹 쉬시고 내일들 뵙죠.”
“네 PD님. 근데 바로 회사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래야죠. 내일이 대본리딩이니.”
“어후- 좀 쉬셔야죠. 쓰러지면 큰일인데.”
“문제없죠 이 정도는. 한두 번도 아니고.”
내일인 13일 정오쯤 ‘이로운 악’의 대본리딩이 잡혀 있었으니까. 김소향 총괄디렉터와 최나나 작가도 참여하는 대본리딩이지만 오늘 바삐 뛰어야 하는 것은 송만우 PD뿐이다. ‘이로운 악’의 길었던 프리 프로덕션의 끝을 알릴 전세계의 도전장의 첫발인 대본리딩이 내일인데 쉴 시간 따윈 없었다.
곧 송만우 PD는 DM 프로덕션으로 복귀.
이 시각 강우진은 당연하겠지만 빡세게 스케줄 소화 중이었다. 오전엔 광고 모델로서 성대한 팬 사인회 현재는 추가된 광고 촬영을 찍기 위해 현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밤엔 우진의 SNS 관련 간단한 인터넷 방송이 예정되어 있었다. 팬들과의 소통을 위한 것.
‘아- 하품 마렵다. 아공간 드가서 겁나 쌔리고 나와야겠네.’
컨셉질이 짙은 우진이 한참 하품을 참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그의 핸드폰이 짧은 진동을 울렸다. 뭐 오늘 종일 핸드폰이 쉰 적은 없으나 지금 도착한 것은 DM이었다. 일본의 탑배우 마나 코사쿠가 보내온 것이었고 내용으로는 ‘힘내고 있죠?’ 정도의 멘트와 여러 일본 기사들을 캡쳐한 사진도 있었다.
『노이즈 마케팅을 노렸나? 「낯기생」강우진의 선포 일파만파!』
『자만인가 자신인가? 「강우진」이 일본 영화계에 날린 선전포고 업계 전문가들이 보는 시선은 분분』
마나 코사쿠가 전송한 기사들은 죄다 ‘낯기생’과 강우진 천지였다.
‘뭔 자만이여 그냥 한 말이구만.’
속으로 헛웃음 뱉은 우진이 적당히 답장한 후에 다른 것을 켰다. 일본의 각종 포털 사이트와 SNS 그리고 커뮤니티까지. 약 10분간 파도를 탄 강우진의 결론은.
‘진심 개빡세게 홍보 갈기네.’
‘낯기생’의 홍보·마케팅이 미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쿄타로 감독을 포함해 ‘낯기생’ 측은 제작발표회 이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본 언론에 떡밥을 뿌려대는 중이었다.
『제작발표회 이후 더욱 뜨거워진「낯기생」편집 이달 말쯤 끝날 듯 10월 말 개봉 예상』
판을 어마무시하게 키운다는 결정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강우진의 자신감 이어 받나?「낯기생」측 “시사회 등 규모 몇 배로 키울 것”』
일본의 상황을 가만- 히 보던 우진은 상상해봤다.
‘이렇게까지 눈덩이를 거대하게 키운 담에 ‘낯기생’이 개봉하면 진짜 일본 애들 눈 뒤집히는 거 아니냐?’
개봉 후 닥칠 후폭풍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나야 딱히 쫄 건 없다만.’
금방 우진은 하던 생각을 지워냈다. 속된말로 지랄이 되든 말든 작품만 잘되면 장땡이잖아? 뒤로 강우진이 광고 촬영장에 도착했을 쯤 준비 시간 덕에 약 30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사실 최근 강우진의 관심은 ‘거머리’ 쪽이 컸다.
촬영 내내 조용하던 ‘거머리’의 영화사가 며칠 전에 있던 완성품 테스트 후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따라서 한국에 터지는 여러 이슈 중 ‘거머리’의 것이 강세였다.
『[무비톡]‘칸 진출작’인 ‘거머리’ 상영 테스트까지 완료 어느 섹션에 진출할지 관심 집중!』
현재 ‘거머리’는 칸 영화제에 초청은 확정이며 출품도 완료했다. 하지만 어느 부문인지는 미확정이었다.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중 으뜸인 거대한 칸 영화제에는 여러 부문이 존재한다. 수상 부문이나 경쟁 섹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칸 영화제의 핵심이며 메인은 ‘경쟁부문’이었다. 그 밑으로 ‘주목할만한 시선’ ‘비경쟁부문’ 등등이 있다.
‘경쟁부문’엔 세계적으로 20편 내외의 초청작이 선발되고 그 중 칸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이 수여된다.
2등 상인 심사위원 대상이나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등도 포함이었다. 모든 상이 칸에서 메인이 되며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배우 영화인들 역시 이 상들을 노린다.
그것이 발표되는 것은.
『‘칸 영화제’ ‘경쟁부문’ 공식 초청작 발표 17일 확정 메인 부문 ‘거머리’ 포함 한국영화 몇 편이나 진출할까?』
칸 영화제 측이 프랑스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한 번에 발표한다. 물론 생중계로 너튜브 등의 영상 플랫폼에서 볼 수 있었다. ‘경쟁부문’만 그렇고 나머지 작품들은 공식 페이지에 게재되는 느낌.
한마디로 칸에 나가는 것도 영광이겠지만 역시 제대로 세계를 뒤집어 놓으려면.
『칼을 간 ‘안가복 감독’의 ‘거머리’ 올해 칸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오를 가능성은?』
‘경쟁부문’에 드는 것이 먼저였다.
13일 DM 프로덕션.
‘이로운 악’의 제작을 맡은 DM 프로덕션 대회의실의 문이 굳건히 닫혀 있다. 그 앞엔 몇몇 스탭들이 지키고 섰고 뒤쪽 유리문엔 코팅된 종이 붙어 있었다.
-[이로운 악 대본리딩장]
그랬다. 이곳에서 현재 ‘이로운 악’의 대본리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드넓은 대회의실 내부의 ㅁ형 책상엔 수많은 배우들이 몰렸다. 그 ㅁ자형 책상을 감싼 건 여러 키스탭들이었다. ‘이로운 악’의 제작 실장 무술 감독 촬영 감독 외의 다수. 물론 외국인 팀과 섞인 스턴트팀 에단 스미스도 포함.
‘한국의 대본리딩도 헐리웃과 비슷하군. 조금 정적인 것이 다른가?’
김소향 총괄디렉터는 물론 넷플렉스 관계자들 등도 합쳐져 관계자는 최소 백여 명은 넘었다. ㅁ형 책상 상석엔 당연히 송만우 PD와 최나나 작가가 자리했다.
“다음은 배우님들 소갭니다.”
배우들은 신인 무명이 많았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모자를 푹 눌러쓴 화린과 하강수 그리고 A급 배우들 정도. 물론 이번에 합류한 귀염상이지만 음침한 임해은 청량감이 가득한 조무찬도 보였으나 그들도 결국 무명이었다.
이 많은 인물들이 모인 대본리딩장에서 핵심인 건.
“‘장연우’ 역을 맡아주신 강우진님.”
“안녕하세요 강우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데뷔 2년 차지만 이미 세계적으로도 입질이 있는 파급력과 영향력으론 국내 최정상인 강우진이었다.
그가 ‘이로운 악’의 ‘장연우’로서 첫 시동을 걸었다.
이로부터 수십 시간 뒤.
국내 언론에선 앞다퉈 ‘이로운 악’ 관련의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포토]넷플렉스 ‘이로운 악’ 강우진 포함 배우들 모여 대본리딩 중/ 사진』
『‘전세계’ 노릴 ‘이로운 악’ 대본리딩 성황리에 종료 강우진의 리드 빛났다』
정확히 4일이 지난 17일 금요일.
‘이로운 악’팀의 해외로케 첫 촬영이 딱 3일 정도 남은 상황에.
-드르륵!
방금 화보 스케줄을 마친 강우진이 승합차에 타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꽁지머리 최성건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오후 4시쯤. 컨셉질이 짙어 무심함이 가득한 우진이었으나 속으론 나름 초조했다.
‘칸 영화제 발표 그거 이미 시작했겠네!’
시간상 한국은 오후지만 프랑스는 아침일 것이고 지금 프랑스 현지에서는 칸 영화제 측이 공식 초청작을 발표하고 있을 테니까.
-슥.
따라서 우진이 너튜브에 접속했다. 링크는 이미 공유된 터라 영상을 접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진이 켠 실시간 영상엔 칸 영화제의 대표 격인 집행위원장이 출력됐다. 머리가 벗겨진 외국인이었고 플래시 세례를 받는 그가 마이크에 대고 담담히 ‘경쟁부문’에 합격한 20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올해 칸 영화제를 빛낼 메인이 될 작품들 말이다.
‘다행히 작품 발표는 이제 스타트구만.’
강우진이 영상에 집중했다. 프랑스에 있을 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의 입에서 불어가 뱉어졌다. 첫 번째 영화가 발표된 것. 프랑스 영화였다. 두 번째는 일본. 세 번째는 독일. 그다음 영국. 쭉쭉 발표된다. 어느새 15번째 작품을 넘겼다. 사이 일본이 한 번 더 불렸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이었다.
이윽고.
‘19번째!’
발표가 거의 끝에 도달했다. 허나 19번째 영화도 프랑스 쪽이었다. 우진은 순간 욕을 뱉을 뻔했다.
‘아오 시바!’
하지만 근엄함을 어떻게든 유지했다.
이때.
[“‘경쟁부문’ 20번째 초청작. 대한민국 안가복 감독의 ‘거머리’.”]
마지막에 ‘거머리’가 불렸다.< 방콕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