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막 (4) >
부스스 일어난 강우진은 헛웃음을 보였다. 이런 걸 보고 혼절이라 했던가? 수 시간 전 새벽엔 죽어도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황당하게도 지금 시간은 아침 9시를 넘기고 있었다.
‘기분이 오묘하네.’
컨셉질을 벗은 강우진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평온하면서도 초조한? 뭔가 가만히 누워있고 싶은데 점차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뭐가 됐든.
-스윽.
슬슬 일어나 움직여야 했다. 침대서 빠져나오는 강우진. 편한 복장에다 머리가 산발이다. 그러나 우진은 왜인지 바로 탁자에 쌓인 ‘이로운 악’의 대본 중 한 권을 집었다.
“일단 1아공간부터 조지고.”
사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아공간의 은혜. 오후에 전쟁터에 출전해야 하지 않은가? 오늘은 특히 몇 배는 더 충분한 체력을 보충해야 했으니다.
얼마나 흘렀나?
아공간에서 현실로 나온 강우진이 벽면에 걸린 화이트 톤 턱시도를 가만- 히 응시했다. 어찌보면 오늘의 전투복이 될 턱시도.
그런 턱시도를 우진이 집었을 때쯤.
-똑똑.
누군가 룸에 노크했다. 우진이 벗어놨던 컨셉질을 끌어올리는 건 삽시간이었다. 단숨에 시니컬함이 짙어진 강우진이 문을 열었다. 꽁지머리 최성건이 웃으며 엄지를 보이고 있었다.
“밥 먹자 우진아. 한국인은 밥심 아니겠냐.”
“알겠습니다 대표님.”
강우진도 격하게 동의했다 물론 속으로.
그렇게 수 시간 후.
축제 분위기가 팽배한 프랑스 칸의 시간이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5시. 이 시각 칸 영화제의 메인인 초대형 규모의 회장 ‘팔레 데 페스티발’ 주변은 인산인해 그 이상이었다.
레드카펫이 다시금 깔린 것.
개막식과 같았지만 입구서부터 저 끝까지 깔린 옆으로도 넓은 레드카펫의 양옆으로 몰린 수천 기자들. 죄다 턱시도를 입은 그들은 개막식보다 더 몰린 상태였다.
촬영 기기들도 퍽 눈에 띈다.
소형 크레인은 물론 드론들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크기가 다양한 카메라만 수천 개. 옆면에 방송국 로고를 붙인 승합차들과 각국의 방송팀이 즐비했고 이 ‘팔레 데 페스티발’을 감싼 구경꾼들만 수만 명을 훌쩍 넘었다. 가까운 해변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도 역시 수만 이 응집됐다.
행진은 진작에 스타트한 상태였다.
-파바바바박!
-파바바바바바박!
각국의 탑배우들이나 감독 외의 스타들이 칸 영화제의 폐막·시상식을 향했고 턱시도 입은 수천 기자들은 초마다 셔터를 눌러댔다. 물론 수십 방송팀들의 현지 중계도 진행 중.
사이사이 아는 얼굴들이 스친다.
‘경쟁부문’에 두 작품을 올린 일본 쪽 감독과 배우들 조셉과 메건 등의 헐리웃 인물들 대니 랜디스 감독 마일리 카라 등등등.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영화판 인물들이 당당히 행진했고 시간이 갈수록 레드카펫의 열기는 가열됐다.
그때였다.
-텅!
레드카펫 끝쪽의 리무진에서 짧은 흰머리의 안가복 감독이나 심한호가 내렸다. 즉 ‘거머리’팀이 도착한 것. 이번 칸 영화제에서 퍽 화제가 됐던 그들이었기에 ‘거머리’팀이 내리자마자 주변의 수백 기자들이 플래시 세례를 퍼부었다.
이어.
-스윽.
리무진에서 화이트 톤의 턱시도를 입은 흑발의 남자가 내렸다.
‘후- 쫄지마 시바. 그냥 노빠꾸 간다.’
강우진이었다.
약 1시간 뒤 오후 6시 50분쯤.
장소는 ‘팔레 데 페스티발’ 안에 있는 제일 큰 홀이었다. 5000명은 거뜬히 수용할 홀이었고 현재는 칸 영화제 폐막·시상식을 위해 꾸며진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높디높은 천장 거기에 달린 수많은 조명들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진 5000석 넘는 좌석 그 좌석을 가득 채운 각국의 명망 높은 인물들. 세계에서도 내로라하는 칸 영화제를 빛냈던 수천 관객은 전부 턱시도와 드레스 차림이었다. 평소엔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헐리웃 탑배우들도 즐비했다.
해외 영화인들의 축제 그 자체.
이 수천 관객들이 보는 정면은 더 휘황찬란했다.
커다란 무대 검은색 바닥 그 무대의 왼편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
무대 바로 앞쪽으로는 방송팀이 분주했다. 칸 측이 마련한 것이었고 저들의 손길로써 프랑스 방송에 칸 영화제가 생중계된다. 물론 너튜브에도 마찬가지. 무대 뒤쪽으로는 사람 키의 5배가 넘는 기둥이 무대 왼쪽부터 오른쪽 끝까지 세워졌다. 커다란 기둥은 금빛이었다.
오른쪽 끝에는 총 10석의 자리에 마련돼 있었다.
칸 영화제 공식 심사위원들의 자리였고 심사위원석 바로 뒤에도 큼지막한 모형이 세워져 있었다. 칸의 공식 로고인 종려나무 잎을 금으로 칠한 것.
이 모든 것을 위에서 본다면 자연스레 이런 말이 뱉어지겠지.
가히 웅장하거나 성대했다.
참석한 인물들이 워낙 어마무시했기에 이 거대한 홀이 더 대단해 보였다. 이 시각 ‘팔레 데 페스티발’의 밖 해변 쪽에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관광객과 수천 기자들. 설치된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칸 영화제의 폐막·시상식을 보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강우진은 홀의 1층 좌석 중간쯤에서 찾을 수 있었다.
“···”
흰 턱시도를 입은 그는 묵묵한 얼굴이었다. 안가복 감독이나 심한호가 우진의 오른쪽 진재준과 한소진이 왼쪽에 앉아 있다. 다들 명백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우진은 잠잠했다. 이 지랄 맞게 큰 홀에 들어왔을 때부터 극한의 마인드 컨트롤을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후- 씨 별거 아니라고. 그냥 쪼매 큰 행사 본다고 생각해. 어 그거면 돼.’
컨셉질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럴수록 우진의 무심함은 진해졌다.
이쯤 한국은 새벽 3시였다. 당연히 대부분이 잠든 시각. 그럼에도 칸 측이 제공한 너튜브 라이브 방송엔 퍽 많은 시청자가 달려들었다. 영어나 타국의 언어들 사이 한국어가 꽤 많이 보이는 게 그 방증이었다.
-악!!!!기다렸다고!!!!
-왘ㅋㅋㅋㅋㅋㅋ시상식 겁나 사이즈 크넼ㅋㅋㅋㅋㅋ
-드디어!!ㄷㄱㄷㄱㄷㄱㄷㄱ
-왜 계속 무대만 보여주냐?? 배우나 뭐 사람을 좀 보여달라고!
-강우진 어디써!!!
-어후 기대
-뭐옄ㅋㅋㅋㅋ아직 시작도 안 했네??
-어차피 거머리 애들은 들러리 서나 퇴장할건데 왜들 오바쌈ㅋㅋㅋㅋㅋㅋ
-와…참석한 애들 몸값만해도 얼마냐….
-아닠ㅋㅋㅋ차피 거머리는 칸이 작년 실수 만회할라고 대충 끼워 넣은거라곸ㅋㅋㅋ
-1등 2등 바라지도 않는다!! 각본상만 받아도 초대박!!
-심한호나 오희령이 배우상 받을 수 있지 않음?
이때.
-♬♪
너튜브 라이브 속 앵글에 약간 변화가 생겼다. 잔잔히 나오던 음악도 바뀌었다. 칸 영화제의 폐막·시상식이 뚜껑을 연다는 뜻.
곧 커다란 무대 왼쪽에서 턱시도를 입은 늙은 외국인 남자가 입장했다.
칸 영화제의 대표. 즉 위원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뜨거운 칸의 일정을 같이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대 중앙에 조명이 쏴졌고 위원장이 불어로 폐막·시상식의 시작을 알렸다. 물론 영어 통역은 관객들에게 지급된 헤드폰을 쓰면 들을 수 있다.
“다들 즐기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올해의 칸 영화제의 마무리까지 함께해주시길.”
짧은 멘트를 친 그가 큐카드를 올리며 이번 폐막·시상식의 총 사회를 맡은 사람을 호명했다. 벨기에의 여배우였다. 초록 드레스의 그녀가 무대에 오르자 5000명 넘는 관객들의 성대한 박수가 울렸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벨기에의 여배우는 무대 중앙에 서서는 간단히 인사말을 전했다. 곧 다시 박수가 퍼졌고 손에 든 큐카드를 보던 그녀가 폐막·시상식을 진행했다.
“먼저 이분들부터 불러볼까요? 올해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분들!”
재차 우레와 같은 박수. 무대 한쪽에서 턱시도와 드레스 입은 10명의 공식 심사위원들이 올랐다. 그들의 자리는 무대 오른쪽 금빛 종려나무 잎 모형 앞의 심사위원석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이 한 명씩 자기소개를 이었고 모든 소개가 끝난 뒤엔 사회자와 주거니 받거니 적당한 농담이 오갔다.
무거운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 사이 칸의 방송팀은 5000석 관객 중 몇몇을 카메라에 담았다. 헐리웃 배우 프랑스의 감독 일본 배우 등. 금발을 단정히 묶은 마일리 카라도 잠시 스쳤다.
이어.
-스윽.
무대 위 벨기에 여배우가 첫 시상을 위한 멘트를 쳤다.
“오 이제 시상을 진행할 차례네요. 수상의 시작은 ‘각본상’입니다. 이번 ‘경쟁부문’의 20작품이 워낙 대단했기에 선택이 매우 힘들다고 들었어요. 어땠나요?”
심사위원 10명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둘 정도가 장난 섞인 대답을 뱉었다.
“지옥이었습니다 다시는 심사위원 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도 힘든 작업이었죠. 저에겐 모든 작품이 좋았으니까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은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배우상을 빼면 4등상이었다. 하지만 순위 따위 의미 없었다. 칸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것 자체가 작품엔 더없는 영광이니까.
곧 스텐딩 마이크 앞 사회자가 말했고.
“‘각본상’의 발표를 부탁드려요.”
뒤쪽 심사위원 중 이란의 영화감독이 핸드마이크를 들었다. 손엔 발표용 큐카드가 전달됐고 그것을 펼친 그가 비죽 웃으며 발표를 외쳤다.
“‘각본상’ ‘성스러운 집’! 축하합니다!”
경쟁부문 20작품 중 ‘성스러운 집’은 프랑스 쪽 영화였다. 당연히 관객석 중에서 일어난 건 프랑스 감독이었고 무대 앞 카메라가 일어난 그를 바로 찍었다. 초대형 홀은 금세 어마어마한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짝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
앉아서 또는 일어서서. 쉼 없이 양손을 쳐대는 5000명 관객. 강우진도 동참한 참이었다.
‘소름 이 상황에 저 무대에 나가는 거 가능하냐??’
프랑스 감독은 어느새 무대 위에 올랐다. 그에게 상이 전달된다. 트로피는 칸 영화제의 마스코트인 종려나무 잎이 함에 들어있는 형태. 상을 받은 프랑스 감독은 감격한 듯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스윽.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어렵사리 멘트를 시작했다. 도중에 눈시울이 불어져 멈칫하긴 했으나 어떻게든 끝까지 해냈다. 그것을 치하하듯 재차 박수가 울렸고 사회자인 벨기에 여배우가 무대에 다시 올랐다. 프랑스 감독과 간단한 인터뷰. 뒤로 프랑스 감독이 무대를 내려갈 때쯤 사회자가 다음 시상을 알렸다.
“이번에는 배우님들에게 드리는 상이예요.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먼저 남우주연상부터 시작할게요.”
배우들 차례. 곧 5000명 관객석에 분포된 수많은 각국 배우들의 표정이 변했다. 긴장이나 떨림 기백 욕심 등등. 반면 강우진은 초반의 덤덤한 얼굴 그대로였다. 이쯤 날카로운 인상의 진재준이 강우진과 심한호를 힐끔했다.
‘둘 다- 기대는 없나? 난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
그리곤 주변의 광활하게 펼쳐진 해외의 탑배우들을 훑었고.
‘하긴 여기서 상을 받는 게 진짜···더럽게 어려운 일이긴 하지.’
사회자인 벨기에의 여배우가 뒤쪽 심사위원들에게 질문했다.
“심사위원님들 배우들의 선택은 어떠셨어요?”
대답은 다리 꼰 회색에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의 스웨덴의 여배우가 먼저 했다.
“최종 결정 전날까지도 확정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아까 제프씨가 말한 ‘지옥’에 격하게 공감해요. 결국 선택하긴 했지만 모든 배우님들은 최고였어요.”
다음은 그녀 옆자리인 이탈리아의 감독이었다.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전 그녀와 달리 선택이 빨랐습니다. 칸 영화제 내내 그 배우의 연기만 맴돌았거든요. 내 연출 인생에서 처음으로 혼을 빼놓고 봤어요.”
곧 홀 곳곳에 설치된 방송팀 카메라들이 배우들을 담았다. 당연히 ‘경쟁부문’에 진출한 주연 배우 얼굴을 찍은 것.
웅성웅성. 무대 앞 관객들의 소리.
관객석 여기저기에선 작게작게 수군거림이 번졌다. 다들 예상하거나 추측한 배우들이 있었을 테니까.
“이란 배우들이 받을 거 같은데? 연기가 인상 깊었거든.”
“글쎄 난 역시 프랑스가 괜찮았어. 작품이 많기도 했고.”
“일본 쪽도 괜찮지 않았나?”
“난 일본 영화는 안 봤어.”
평가는 각양각색이었다.
“이번에 미국은 좀 아쉽긴 했지?”
“전혀. 내가 볼 땐 미국 쪽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거야 켈리의 연기는 죽여줬다고.”
“그래?”
“한국은 어때? 소문이 꽤 났었는데.”
“아- 한국도 있었군.”
그럴 수밖에. 애초 본 영화들이 전부 판이했을 테니까. 애초 만석이 되면 영화를 보지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론 10명의 심사위원만 모든 영화를 봤다.
그 순간이었다.
“발표를 부탁드려요.”
외부의 해변가 수만 관광객들 포함 홀 안의 5000명 관객들 시선과 방송팀 카메라 전체가 무대 위 심사위원석으로 쏠렸다. 인터뷰했던 콧수염 이탈리아 감독의 손에 큐카드가 들렸으니까. 즉 올해 칸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발표는 그가 맡는 셈.
-스윽.
이탈리아 감독이 큐카드를 내려봤다. 동시에 오른손에 들린 핸드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곤 비죽 웃었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네요.”
그가 세계 각국의 ‘거물’들이 모인 5000석 관객들을 향해 나지막이 ‘괴물’을 발표했다.
“제74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거머리’의 강우진.”
순간 홀의 수천 시선과 카메라가 분주히 움직였다. 덤덤히 앉은 무심한 표정에 변화가 없는 흑발의 한국배우를 바라본 것.
화이트 톤 턱시도인 강우진은.
“···”
잠잠히 미동도 없었다. 다만 속으로는 격한 욕을 뱉은 참이었다.
‘···아니 시발. 나라고?’< 폐막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