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세 (1) >
처음 강우진이 안가복 감독을 만났을 때 우진의 목은 잠겨있었다. ‘이로운 악’의 늘어진 촬영 때문에 늦게 퇴근해 새벽쯤 잠든 게 컸다. 사전에 아공간을 다녀오긴 했어도 그의 몸은 솔직했다.
‘어후- 씨 오늘은 아공간 좀 자주 가야 할 듯? 더럽게 피곤하네.’
아공간에서도 잠을 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개꿀일 텐데 따위의 생각을 하던 차였다. 안가복 감독과 최성건이 대표실에 입성. 이미 목이 잠겨있는 것 더해서 컨셉질이 융합되며 우진의 입에선 세상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쎈척이 생활화된 강우진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우진과 악수를 나누는 어째 얼굴에 주름이 퍽 늘어난 안가복 감독도 미간을 잠시 꿈틀했다. 뭐 우리의 거만한 괴물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어쨌든 우진과 안가복 감독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로 올려지는 종이뭉치 두 부.
‘오- 역시.’
무심함을 장착해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강우진의 내면에서는 안가복 감독이 올린 종이뭉치가 뭔지 단박에 눈치챘다.
‘시나리오지? 진짜 가지고 오셨네. 대표님 대박.’
분명 안가복 감독이 올린 것은 헐리웃의 시나리오일 게 빤했다. 옆에 앉은 꽁지머리 대표가 새삼 대단하다 싶은 우진이었다. 그의 추리가 전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니까. 이를 알 턱이 없던 안가복 감독의 점잖으면서도 늙은 음성이 울렸다.
“일단 이걸 훑어봐. 하나는 영어로 하나는 한국어로 돼 있네. 편한 거로 봐도 돼.”
근데 이 할아버지. 아니 안 감독님 왜케 진지하시냐? 뭔가 분위기상 상당히 진중하다 싶었던 우진이 더더욱 목소리를 깔았다. 그의 입에선 ‘알겠습니다’ 정도의 대답이 나왔고 곧장 시선이 책상 위 시나리오로 움직였다. 검은 사각형이 붙은 퍽 두터운 두 부의 시나리오.
제일 위의 시나리오 표지에 제목이 보인다.
-‘삐에로’
‘삐에로’? 이거 또 심상치 않은 타이틀이었다. 강우진은 고민도 없이 영어로 된 원본 시나리오를 집었다. 현재 그에겐 영어나 한국어나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어 그가 티 안 나게 검지를 펼치면서도 정면의 안가복 감독을 힐끔했다. 영물은 왜인지 강우진의 옆자리 최성건을 보고 있었다.
안 봐도 빤하지.
최성건은 지금 눈을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흥분으로 들썩이고 있겠지. 강우진에게 크나큰 기회가 던져지면 보이던 모습.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 뒤 강우진의 현실 시간이 잠시 멈췄고.
-팔락.
왜인지 더더욱 굳건해진 강우진은 ‘삐에로’의 시나리오 장을 넘겼다. 두 장 정도. 당연히 이건 연출일 뿐이었다. 곧 우진은 건너편 안가복 감독을 보며 덤덤히 읊조렸다.
“감독님 이 작품 제가 하겠습니다.”
안가복 감독은 약간 미간을 좁혔고 최성건은 눈동자를 확장시켰다. 강우진의 대답이 너무 빨랐고 확고했으니까. 안가복 감독의 주름진 입이 열렸다.
“한다고? 이렇게 아싸리?”
“예 감독님. 당연히 주연을 말씀드린 겁니다.”
하지만 강우진의 단단한 표정은 여전했다. 예상 밖이었다. 노장의 생각에서는 그랬다.
‘당연히 꽤 시간이 필요할 거로 생각했는데.’
그럴 만했다.
칸을 뒤집어 놓은 ‘거머리’ 땐 이렇지 않았으니까.
‘···일주일은 기다렸었던 거로 기억해.’
하지만 ‘삐에로’ 시나리오를 본 강우진의 대답은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묘한 질투가 드는 안가복 감독이었다. ‘거머리’와 다른 우진의 모습 때문. 그때와 지금은 명백히 달랐다. 다만 안가복 감독의 질투는 금세 지워졌다. 우진의 손에 들린 ‘삐에로’ 시나리오를 보는 그.
-스윽.
영물의 질투는 커다란 만족감과 기대감으로 탈바꿈됐다.
‘이 괴물 놈도 저 시나리오를 보고 느낀 게야 내가 본 것과 비슷한 것을.’
자신의 보는 눈이 늙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기분이었기에.
‘허허 말년에 와서 이토록 어린 배우에게 영향을 받을 줄이야. 하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 않군.’
그렇잖은가? 등장 후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강우진이었고 칸에서 폭탄을 터트린 그는 지금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꾀하는 타이밍. 결단코 적당히 작품을 고르지 않을 것이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기민해야겠지.
와중 강우진의 옆에 앉은 최성건의 눈은 점점 더 확장됐다.
‘우진이가- 우진이가 이렇게 단박에 오케이를 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욕심내는 건 처음 보는데.’
아니 이런 적은 거의 처음이라 봐도 무방했다.
‘저 시나리오가 진짜 미친 수준이라는 건가??! 근데 몇 장 보지도 않았잖아?’
어쨌든 저 시나리오는 심상치 않았다. 이때 침묵하던 강우진이 입을 열었고.
“제가 하겠습니다. 기회가 있다면요.”
주름진 볼을 쓸던 안가복 감독이 천천히 답했다.
“···기회는 있네.”
“예 그렇기에 시나리오를 가져오신 거라 생각합니다.”
“정확하게는 기회를 가질 기회가 있다가 정확해. 부러트릴지 움켜쥘지는 자네에게 달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빠르게 결정을 내렸지? 타이틀과 내용 몇 장을 보고 바로 답했잖나.”
왜냐고요? 간단한데. 포커페이스 진한 강우진이 답했다. 물론 속으로.
‘아공간에 다녀왔걸랑요.’
컴컴한 아공간 속에서 본 ‘삐에로’는 전혀 주저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로 얘기할 수는 없지. 대충 에둘러 답해야겠지만 우진은 딱히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착각이 팽배한 치트키가 있으니까.
“감이 좋았습니다.”
강토템 발진. 이로써 강우진의 착각은 더더욱 굳건해지겠지만 알 바인가? 곧 대표실은 침묵이 흘렀다. 최성건이야 ‘역시! 그 미친 감이 또!’ 따위의 마음으로 흥분했다만 노장 안가복 감독은 우진의 눈을 똑바로 보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의별 배우들을 봤지만 자네만큼은 예상이 안 되는군. 하지만 진짜배기야.”
“···”
“그래 배우는 때때로 동물적 본능 또는 감각에 몸을 맡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역시 오해가 짙어진다. 그래도 뭐 대강 넘어가는 분위기. 이어 안가복 감독이 팔짱을 끼며 강우진에게 말했고.
“아마 혈투가 벌어지겠지만 살아남는 건 자네였으면 하네. 그렇게 믿고 있고.”
덤덤한 우진의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문제없을 겁니다.”
약 1시간 뒤.
bw 엔터를 나온 방금 팀원들과 지하주차장에 내려온 안가복 감독이 승합차에 올랐다. 몇 분 되지 않아 바로 출발하는 승합차였고 차들이 빼곡한 도로에 안착했을 때쯤.
“···”
허공을 보며 뭔가 생각에 빠진 안가복 감독에게 약간 뚱뚱한 매니지 대표가 조심스레 물었다.
“감독님 강우진과 얘기는 잘 되셨습니까?”
바로 답하지 않는 안가복 감독. 특유의 느긋함 뒤에야 그의 주름진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도 아직 멀었다 싶어.”
“예?”
“‘삐에로’ 시나리오를 보고 생각 많았던 내 모습이 민망하더군. 강우진 그 아이는 아마. 아니 확실히 헐리웃 역시 헤집어 놓을 거야.”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셨길래.”
픽 웃는 안가복 감독.
“평범해. 안달 난 건 내 쪽이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강우진. ‘거머리’ 때와 같지. 시간만 단축됐고.”
“한답니까?”
“문제없다는군.”
“허-”
작게 놀란 듯 입을 벌리던 매니지 대표. 승합차가 신호에 걸렸을 때 그가 어렵사리 주제를 바꿨다.
“그 그런데 감독님. ‘삐에로’ 건을 언제쯤 발표하면 되겠습니까? ‘컬럼비아 스튜디오’ 쪽은 며칠 안에 ‘삐에로’ 제작 확정 발표를 올린다고는 했습니다.”
“‘컬럼비아 스튜디오’는 뭐라고 하던가.”
“어떤 루트든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미 계약은 마쳤으니까요. 우리가 먼저 발표해도 되고 ‘컬럼비아 스튜디오’ 측이 제작 발표와 동시에 해도 상관없다고.”
“결정권이 우리에게 있나?”
“배려를 해주는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거머리’가 개봉 중이고 해외로도 개봉 작업이 이루어지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흠-”
돌연 현실적인 대화가 이어졌기에 안가복 감독 역시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거머리’가 일본에 개봉하는 게 다음 달이지?”
“예.”
“프랑스 쪽은?”
“조율 중입니다만 빠르면 내년 초쯤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지금 한국 개봉 중인 ‘거머리’는 일본에는 다음 달 프랑스 외로 여러 국가엔 내년 개봉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곧 안가복 감독이 결정을 내렸다.
“늦장을 부릴 이유가 없지 않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대한 빨리 이 건을 발표해야 국내 개봉 중인 ‘거머리’에 몇 배는 힘이 붙을 겁니다. 물론 다음 달 개봉인 일본 쪽도요. 프랑스나 해외 쪽은 아무래도 좀 미약하긴 할 겁니다.”
“상관없어 상징성으로 개봉하는 거니까.”
“제대로 준비해서 최대한 빨리 발표하겠습니다!”
핸드폰에 뭔가를 적던 매니지 대표의 얼굴에 돌연 흥분이 가중됐다.
“어후 떨립니다.”
주변의 직원들도 동참.
“그 그러니까요. 심히 기대되기도 하고.”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초조하네요.”
“한국이 또 얼마나 들썩거리겠습니까??!”
격하게 공감한다는 듯 매니지 대표가 안가복 감독에게 말했다.
“대한민국 최초···헐리웃 작품의 총괄 감독. 벅찹니다! 아시아 전체로 보면 몇 번 있었지만 헐리웃 빅파이브라 일컫는 ‘컬럼비아 스튜디오’급과 작업한 아시아 감독은 거의 없잖습니까!”
“음-”
“너무 침착하신 거 아닙니까??”
“글쎄. 막상 닥치니 의외로 별수롭지 않아. 내가 너무 늙은 게지.”
“저는···저는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은-”
“그건 내가 못 할 거였다는 거로 들리는데.”
“예??! 아니아니아닙니다!!”
“농담이야.”
십년감수 한 대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칸의 ‘황금종려상’과 ‘남우주연상’ 터진 게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이 건이 던져지면 언론이고 여론이고 더욱 요동칠 겁니다.”
직원이 말을 보탰고.
“‘거머리’의 미친 흥행 이슈도 있으니까요!”
주름진 볼을 쓸던 안가복 감독이 픽 웃었다.
“그렇지 적잖이 시끄러워질 거야. 그런데 내건 약과라 생각해.”
“예?”
“그 괴물 놈.”
강우진의 터무니없는 브랜드파워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강우진 쪽이 움직이면 나보다 수 배는 더 광분하지 않겠나? 이 한국 전체가 말이야.”
같은 시각.
고속도로에 방금 진입한 검은색 밴. 안엔 강우진이 타고 있었다. 목적지는 경기도 연천. ‘이로운 악’의 촬영을 위함이었다. 우진은 다리 꼰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딱딱한 표정은 덤. 생각이 깊어 보이는 얼굴.
조수석의 최성건이 룸미러로 우진을 힐끔했다.
‘흠- 그렇게 시원하게 결정을 내렸다만···역시 정리가 필요할 거야. 계획에 없던 일이었으니까.’
틀렸다. 사실 지금 강우진은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보며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
‘오늘 밥차 메뉴 뭐더라? 제육이었나? 불고기? 뭐든 고기는 못 참지.’
그러다 시선을 내리는 강우진. 앞쪽엔 ‘이로운 악’ 대본들 포함 아침의 안가복 감독이 주고 간 ‘삐에로’ 시나리오가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시나리오를 집는 그.
-스윽.
생각해보니 헐리웃 쪽 작품의 첫 확정 작품이었다.
‘뭐 아직 나로 결정된 건 아니긴 하다만.’
조셉 쪽도 있긴 하다만 거기는 한창 시나리오 집필 중이니 일단 제외. 뭐가 됐든 첫 경험은 떨리는 법. 허나 영어로 가득한 ‘삐에로’ 시나리오를 내려보는 우진의 심정은 차분했다. 당장 체감이 안 돼서였다. 언젠가 헐리웃 어딘가에서 촬영을 시작하는 날이 되면 또 다를지도.
그런 강우진이.
-슥.
‘삐에로’ 시나리오를 몇 장 넘기는 척하면서도 검지를 들었다. 붙은 검은 사각형을 찌르기 위함. ‘삐에로’ 시나리오를 읽을 필요가 있다만 지금은 아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금세 강우진의 시야는 광활한 컴컴함이 가득한 아공간으로 변했다.
“아욱!!”
컨셉질을 집어던진 강우진이 바로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러면서도 여러 흰 사각형이 둥둥 뜬 곳으로 걸었다. 여러 작품이 보인다. 제일 처음인 ‘흥신소’ 이후 제일 뒤쪽 ‘낯기생’ ‘거머리’ ‘이로운 악’. 지금껏 제일 높은 등급은 ‘이로운 악’이었다.
-[9/대본(제목: 이로운 악) EX급]
EX급이었으니까. 이어 강우진의 시선이 오늘 아침에 새롭게 추가된 흰 사각형 중 제일 끝에 비치된 작품으로 움직였다. ‘삐에로’였다. 여기서 아침 미팅 중 안가복 감독의 물음 하나를 상기하는 강우진.
‘그런데- 왜 그리 빠르게 결정을 내렸지?’
비죽 웃던 우진이 아공간에서 답했다.
“이 등급을 보고 작품을 안 하면 병신이니까.”
-[11/대본(제목: 삐에로) EX+급]
아공간 최고 등급을 ‘삐에로’가 탈취했다.< 위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