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3)
높디높은 창고형 세트 스튜디오. ‘흥신소’ 때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우진은 속으로 순수하게 놀랐다. 대체 저렇게 크고 넓은 창고 안엔 뭐가 준비되고 있을까?
‘드라마 촬영을 저런 대형 물류 창고 같은 데서도 찍는구나-’
거기다 스탭들 머릿수 역시 어마어마했다.
조명 기기를 들고 뛰어가는 조명팀 조심조심 카메라를 옮기는 촬영팀 촬영 콘티를 든 채 전체 현장을 기름칠하는 연출팀 미니버스 안에서 여러 소품을 옮기는 소품팀 등등.
얼추 60명은 넘어 보인다. 추가로 배우들과 그들의 매니저팀까지 붙으면 100명은 가뿐히 넘겠지.
‘이 사람들 전부가 내 연기를 지켜본다고?’
대본리딩 때와는 스탭들의 에너지가 달랐다.
그때도 백여 명의 인원이 몰리긴 했지만 움직임이 아예 없어서 정적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사투를 벌이는 전쟁터 그 자체였고 첫 촬영 날이니 얼마나 예민하겠는가?
덕분에 강우진은.
‘어우- 씨. 좀 부담되네.’
심장과 함께 온몸에 퍼진 혈관이 두쿵대기 시작했다. 이건 긴장과는 다른 부류였다. 그래 긴박감에 가깝다. 이 장엄함 사이에서 수백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기를 보여야 한다.
알맹이는 일반인에 가까운 우진으로선 호흡이 빨리지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도.
‘후- 심호흡 심호흡. 그냥 싹다 고양이 개로 생각하자. 그럼 돼.’
우진은 이미 ‘흥신소’로 준비운동을 마쳤다. 그렇기에 애써 고동치는 심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쯤.
-스윽.
세트 스튜디오를 보는 강우진의 옆으로 두 명이 붙었다. 로드인 장수환과 스타일리스트 한예정이었다. 그중 초록색이 섞인 단발의 한예정이 무표정의 강우진을 힐끔했다.
‘왜 저렇게 평온해? 긴장이 1도 안 되는 건가? 특이하네.’
이어 덩치 좋은 장수환이 약간 경박스레 외쳤다.
“와- 씨. 여기 엄청 크네요?! 우진 형님은 괜찮습니까? 전 첫 현장이라서! 떨린다 떨려!”
목소리는 미성이지만 그의 목청은 컸다. 그런 그를 보며 무표정 강우진이 속으로 답했고.
‘동지여 나도 떨린다네.’
겉으로는 쿨함을 뿜었다.
“저도 떨리네요.”
“엥? 그런 것 치곤 너무 말짱하신 표정이신데요??! 아! 혹시 저 생각해주신다고 떨리는 척하시는 거죠?”
떨린다니까? 왜 멋대로 판단하고 그래. 그러나 우진은 설명을 포기했다. 대신 의연함을 보였고.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옙! 몰래몰래 심호흡하겠습니다.”
방금까지 어딘가와 통화하던 꽁지머리 최성건이 하하하 웃으며 나타났다.
“자자 그럼 들어갑시다!”
그대로 강우진 팀은 대형 스튜디오 안으로 진입했다.
세트 스튜디오는 밖보다 안이 더욱 거대했다. 넓은 것도 있겠지만 뭐랄까 광경이 퍽 대단하달까? 섹션마다 촬영에 맞는 세트장이 주르륵 보였다. 그런 세트장에 수십 스탭들이 줄기차게 왔다갔다 한다.
그 주변으론 카메라며 조명이며 촘촘히 세팅되는 중.
강우진은 차원이 다른 세상을 눈에 담느라 바빴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도착한 우진을 보곤 송만우 PD가 다가왔으니까. 그가 강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는다.
“왔어요? 강토템씨.”
“예?”
“아니아니 장난장난.”
곧 꽁지머리 최성건을 포함해 강우진 팀이 송만우 PD에게 인사했고 송만우 PD가 최성건과 시선을 맞췄다.
“최대표님 일찍 오셨네? 배우 중 1등.”
“하하하 우리 우진이가 신인 아닙니까. 무조건 1등으로 와야죠.”
송만우 PD의 시선이 덤덤한 강우진으로 움직였다.
“그래 신인이지. 아니 신인이 맞나? 헷갈리는데?”
동시에 최성건도 웃으며 동조했고.
“그렇긴 합니다. 신인은 맞는데 사실 아니기도 하죠.”
최근에 강우진 팀에 합류한 장수환과 한예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우진을 경험하기 전이었기에. 뭐가 됐든 송만우 PD가 본론으로 돌입했다.
촬영 콘티를 보이며 우진에게 설명을 시작한 것.
“우진씨. 일단 오늘 스케줄 반 정도가 박대리니까 알아 둬요.”
즉 강우진의 촬영이 정신없이 이어질 거란 얘기였다. 실제로 오늘 촬영 콘티엔 남주인 ‘유지형’과 ‘박대리’ 컷이 많았다.
드라마는 대본상 1씬부터 순서대로 찍을 순 없다.
상황과 동선 또는 배우들의 스케줄 등을 고려해 촬영 로드맵을 짜게 되고 그에 맞춰서 일단 중구난방으로 찍는다. 그것을 송만우 PD가 최후에 편집에서 짜 맞추게 되는 것.
덕분에 오늘 촬영장엔 홍혜연이나 다른 주·조연은 참석하지 않는다. 계획상으로는 내일부터 합류.
“자- 먼저 우진씨는 바로 메이크업부터 받고 의상도 한번 맞춰 봅시다. 우진씨 스타일리스트분은 같이 가서 나랑 박대리 의상 좀 점검하고.”
“네 PD님.”
이때 현장에 몰래 온 손님을 상기한 송만우 PD가 말을 이으며.
“오늘 우진 씨한텐 의외의 경사가 있을지 몰라요. 아니 난 확신해.”
강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똥차가 가고 외제차가 온다 딱 그런 느낌?”
당연히 우진은 무심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송만우 PD의 미소가 짙어진다.
“현장에 외제차가 와있다는 소리지.”
몇십 분 뒤.
커다란 검은색 벤이 세트 스튜디오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프로파일러 한량’의 남주 류정민의 벤이었다. 그런 벤 안에는 캐릭터상 베이비펌을 한 류정민이 눈을 감고 앉아 있다.
“···”
잠을 자는 건 아니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 호흡을 정리하는 작업도 포함됐다. 이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는 탑배우 류정민.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연기 생각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스윽.
그가 방금 펼친 대본은 얼마나 봤는지 너덜너덜했다. 대본 속은 여기저기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있다. 분석의 흔적이었다. 뒤로 약 5분쯤.
“형.”
내내 대본을 보며 호흡을 정돈하던 류정민이 매니저와 팀들을 호출했다. 현장으로 갈 준비를 마친 것.
“슬슬 가자.”
-드르륵!
이어 류정민과 그의 팀 대여섯 명이 세트 스튜디오로 걸었고 류정민의 표정은 뭔가 진했다. 십수 년 이골이 날 정도로 온 현장이지만 오늘은 평소와 느낌이 달랐으니까.
장신 류정민의 눈엔 비장함이 서렸다.
언뜻 전투가 눈앞인 병사 같기도 했다. 딱히 틀린 소린 아니었다.
‘이런 느낌 간만이네.’
오늘의 류정민은 연기로 전력 질주할 요량이었으니까.
‘박대리를 뛰어넘을진 모르겠다만 잡아 먹힐 생각은 없다.’
적어도 ‘박대리’와 비등한 싸움을 해야 했으니. 대본리딩땐 제대로 밀렸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류정민이었다.
이는 탑배우로서 그의 자존심도 있었지만.
‘시작부터 박대리한테 밀리면 4부 동안의 심리적 감정이 모두 허탕이 돼.’
작품 속 본인이 맡은 ‘유지형’으로서도 중요했다.
연기 좀 한다하는 배우는 촬영할 때도 안 할 때도 인물의 감정을 유지하며 카메라 밖에서도 상대역을 주시한다. 그것은 곧 다음 컷의 연기로 표출된다.
박대리 같은 진한 역할을 만날 땐 더 집중해야 했다.
즉 류정민은 박대리와의 촬영 동안 그의 눈치를 살피고 파악하고 분석하며 해부할 생각이 그득했다. 실제와 연기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하기 위함.
따라서 류정민은.
-스윽.
세트 스튜디오에 진입하자마자 스탭들에게 가볍게 인사하면서도 우진을 먼저 찾았다. 어디 있나? 현재 류정민에게 강우진은 적이었다. 그러다 류정민이 약간 구석진 곳에서 우진을 찾았다. 스탭들이 마련해 놓은 배우 대기 공간이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분위기가 무겁네 쟤는.’
단단한 얼굴의 강우진을 평가한 류정민이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류정민의 인사에 고개 돌린 우진이 덤덤하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 네.”
확실히 선배인긴 하다만 류정민은 우진의 선배님이란 단어가 괜히 껄끄러웠고.
‘너보다 제대로 잘나야 선배 노릇도 할 텐데 말이지.’
대강 강우진의 옆쪽에 의자를 편 류정민이 대본을 펼쳤다.
“우진씨 컨디션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박대리로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가? 류정민은 강우진의 모든 것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괜찮은 게 어느 정도?”
“평소와 같습니다.”
“아- 평소랑.”
“예.”
볼수록 신비한 배우였다. 모든 것이 물음표다. 과거가 불투명한 것도 그랬고 그 미친 연기를 독학으로 익혔다는 것 역시. 류정민은 시선을 대본으로 천천히 내리며 생각했다.
강우진이 정말 호기심 땡기는 배우라는 것.
NG를 내기는 하는 건가? 반대로 내 쪽이 NG를 낸다면? 다른 배역은 어떻게 소화하나? 또는.
‘내가 치는 애드립에는 어떤 반응인가?’
점점 심지를 딴딴히 만드는 류정민. 빨리 저 세트로 들어가 옆에 앉은 박대리와 심리전을 벌이고 싶었다. 초조해질 지경이었다.
‘하 그래 연기엔 이런 맛이 있었지. 강우진 얘 때매 생각났어.’
류정민은 수년 만에 연기가 미치도록 재밌었다.
이때.
“정민씨! 우진씨!”
조연출이 배우 둘에게 외쳤고.
“PD님이 리허설 한 번 맞춰보자십니다!!”
강우진과 류정민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어 앞서 걷던 류정민이 우진을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오늘은 안 먹힙니다?”
연기 얘기였다. 반면 강우진은 포커페이스로 침묵했으나 속으론 물음표가 가득했다.
‘저 개존잘이 뭐라는 거지?’
동시에 탑배우의 여유에 감탄하기도 했다.
‘어쨌든 방금 영화 속 한 장면인 줄.’
촬영 돌입 전.
강우진과 류정민 등 주요 배우들의 메이크업은 물론이며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오디오 등이 위치를 잡았다. 어느새 첫 촬영 세팅이 전부 완료됐다. 촬영존에 분포됐던 수십 스탭들이 썰물처럼 주르륵 빠진다.
와중 자리에 앉은 송만우 PD는
“···”
아직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확실히는 모니터에 출력되는 강우진을 보고 있는 것.
‘메이크업부터 의상까지 해놓으니까 위엄이 몇 배는 뛰는구만.’
지금의 강우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대리였다. 부스스한 헤어 약간 피곤함이 섞인 메이크업 어디서나 흔히 볼 후드와 청바지 등.
그런 우진은 현재.
‘후우- ‘흥신소’ 때랑은 느낌이 아예 달라. 미치겠네.’
상태가 썩 좋진 않았다. 드디어 때가 왔다. 지켜보는 눈만 수백에 현장감이 너무 절절해서 그런지 ‘흥신소’ 촬영 때와는 결이 다른 중압감이 우진에게 때려 박힌다. 배려 따윈 없다. 괴팍하고 거칠다.
‘어우 약간 울렁거려.’
지금 강우진의 얼굴에 서린 무표정은 컨셉이 아니다. 이번엔 진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이었다. 심장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종종 소름이 온몸에 퍼지기도 했다. 닭살이 계속해서 돋았다.
질펀한 현장의 공기. 무겁기 그지없다.
가뜩이나 정신을 짓누르는 느낌인데 이 대형 세트장의 장대함과 진중함 서린 수십 스탭들의 눈빛이 강우진을 더욱 옥죈다. 이름 모를 커다란 카메라들은 어떤가? 마치 진짜 죄인이 된 기분이 번지는 우진이었다.
이 느낌은 언제쯤 적응되는 걸까?
아니 적응되기는 하는 건가? 우진은 새삼 초연하게 앉은 류정민이 대단해 보였다. 류정민은 취조실처럼 꾸며놓은 세트 안에 앉아 있다. 저쪽은 프로 중의 프로다.
‘반대로 나는 프로를 흉내 내는 게 고작이고.’
취조실 세트 옆쪽에 선 강우진은 억지로 중압의 공포를 몰아냈다. 현실을 받아들인다. 겉모습은 컨셉질이 함유됐지만 연기는 진짜다. 물론 아공간의 선물이지만 구현하는 건 강우진.
힘을 내자 수십 프로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낸 현장이니까.
이때.
-철컥!
한 스탭에 의해 강우진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오늘 ‘프로파일러 한량’ 첫 촬영 씬은 박대리가 스스로 자수한 뒤의 이야기였다. 그의 미친 등장 이후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뉴스도 기사도 사람들도 모두가 이 사건에 집중한다.
미제 연쇄 살인범의 자수와 숨겨진 진범.
따라서 경찰과 검찰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중심엔 프로파일러 ‘유지형’이 있었다. 그는 박대리의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이번 씬은 유지형과 박대리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렇기에 우진에게 채워진 수갑은 당연한 소품이었다.
다만 강우진은.
“···”
수갑을 시발탄으로 사용했다. 손목에 차가운 쇳덩어리가 채워지자마자 이식된 박대리를 끄집어낸 것.
시작은 기분 나쁜 감정부터였다.
아공간에 의해 각인된 박대리의 감정은 감각으로 발전했고 그 감각은 감성과 이성을 깨워냈다. 금세 강우진의 냄새가 탈바꿈됐다. 색이 진하고 그 깊이 모를 어딘가에 광기를 품은 눈.
박대리였다.
동시에.
-스윽.
수갑 찬 박대리의 옆으로 단역인 형사 배우가 붙었다. 박대리가 그를 돌아봤다. 단역 형사 배우가 약간 흠칫했다. 아무 표정이 없는데 그것이 더 무서웠으니까.
이 순간.
-탁!
메인 카메라 앞에서 한 스탭이 씬 넘버를 외치며 슬레이트를 쳤고.
“하이-”
턱수염 송만우 PD가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액션!!”
‘프로파일러 한량’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뜻. 이어 카메라가 취조실 안 베이비펌 유지형을 비춘다. 그의 앞엔 두꺼운 파일이 놓였다. 피곤한 듯 눈과 눈 사이를 꾹꾹 누르는 유지형.
“하 잘 못 걸렸네. 사건 사이즈가 너무 커졌어.”
천성이 한량인 그였기에 투덜대는 것이었다. 이때 약간 어두운 취조실의 문이 열렸다. 형사와 박대리가 입장했다. 형사는 수갑 채운 박대리를 유지형의 반대편에 앉혔다.
유지형이 작게 한숨 쉬며 박대리를 본다.
오늘의 박대리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웃음기가 없다. 저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 얼굴에 색이 존재치 않는 느낌이었다. 그런 박대리는.
“···”
진한 눈으로 유지형을 빤히 응시한다. 그러다 약간 고개를 삐뚤하게 꺾는다. 하지만 입은 다문다. 눈에 어떠한 메시지가 담기지도 않았다. 공허하지만 멍청하진 않다. 흐리멍텅하지만 또렷하게도 보였다. 이 표현을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생생하게 담았다.
다음은 유지형의 차례였다.
“하-”
건너편 요상한 존재를 보자마자 유지형이 질린다는 듯 베이비펌 머리를 긁는다.
“얼굴만 봐도 피곤하네.”
이미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박대리에게 허술함을 보여야 했다. 분명 쉽지 않은 상대다. 그러니 방심부터 유도한다. 잡소리는 방심이 깔린 오만에서부터 파생된다. 그것부터 시작하자.
유지형이 다시금 한탄했다.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지 않아요?”
“···”
여전히 유지형을 잔잔히 보던 박대리는 딱히 표정 변화가 없다. 그러나 그는 유지형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분위기를 유연하게 풀려는 작정이구나. 그래 수많은 범죄를 겪어 왔을 거야.
하지만 난 그런 포장만 번듯한 놈들이랑은 달라.
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분석하며 뜯어라. 그럴수록 수렁에 빠질걸? 박대리는 이 상황 자체가 즐거웠다. 유지형 포함 모두가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여줄 때의 쾌감. 그리고 환희.
너희는 내 꼭두각시일 뿐이야.
순간 취조실의 칙칙한 공기가 박대리의 피부를 간지럽혔다. 암울한 공간이지만 박대리에겐 놀이터였다. 조명에 비추는 살랑살랑 작은 먼지들이 춤추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이때 박대리의 눈이 자신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일단 이 수갑부터 풀어보자.
“이거 잠깐 풀어주세요. 아파서.”
문 쪽의 형사가 움찔했지만 유지형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지 뭐. 풀어주시죠.”
하지만 형사는 표정 없는 박대리를 보다가 유지형에게 귓속말했고.
“위험할 텐데요. 그냥 이대로.”
-드르륵.
뜬금 자리서 일어난 박대리가 양손을 유지형 앞으로 쭉 밀었다. 이때야 웃음이 번진다.
“무서우세요?”
유지형도 웃었다.
“괜찮으니까 풀어주세요.”
곧 형사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박대리의 수갑을 풀었다. 박대리의 웃음이 진해졌다.
“됐다.”
그대로 산뜻하게 기지개를 켜는 박대리. 의도된 행동이었다. 당신이 유연함을 원하니 그런 척을 해준다는. 이때 움직임을 뚝 멈춘 박대리가 유지형에게 물었다.
“피곤해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오기도 전에 커피는 다 마셨고 썩은 담배 냄새가 나서요. 밤새 담배를 피웠을 때나 나는 냄새요. 나를 조사하느라 그랬겠지만.”
“내가 꼴초라.”
여기서 박대리가 돌연 자세를 반듯하게 했다. 입꼬리는 더욱 끌어올렸다. 철저히 연습된 미소였다.
“그래서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일단 얘기를 좀 하죠. 시시콜콜한.”
“하세요.”
“음- 그래 당신이 말한 알리바이는.”
“아침 드셨어요? 전 햄버거가 먹고 싶어요.”
“난 패스트푸드는 별로. 그보다 당신은 지금 햄버거를 먹을 수.”
“난 새우버거가 좋아요 다른 소나 닭 같은 패티는 비리거든요.”
이때 유지형이 대뜸 다른 것을 물었다. 대화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누나가 있었던데 자살한.”
처음으로 박대리의 웃음이 약간 흔들렸다. 곧 유지형을 연기하던 류정민의 등에 서늘한 소름이 번졌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였다.
“···”
옅은 미소를 유지하며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박대리의 검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매우 진했지만 텅텅 비어있는.
“맞아요 있었어요. 누나가.”
기괴하리만큼 차분하고 공포스런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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