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등장 (2)
강우진이 처음 ‘삐에로:빌런의 탄생’ 리딩장 쪽에 도착했을 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뭐 생각보다 한국이랑 크게 다를 게 없는디?’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세계 영화판을 호령하는 헐리웃이라고 해서 대본리딩이 특별한 건 없었다. 분위기 자체는 한국과 거의 비슷했다.
다른 점은 단 하나였다.
싹- 다 외국인이라는 것.
역시나 강우진의 생각대로였다. 이름값이 어마어마한 헐리웃이라고 할지라도 크게 특별한 점은 없었다. 직전까진 첫 경험인 헐리웃 대본리딩 덕에 약간 긴장된 건 있었다만 비슷한 분위기에 그마저도 누그러지는 우진이었다.
반면 그의 마음가짐은 평소완 조금 달랐다.
전투력이 상승했다. 이 대본리딩장에서 유일한 한국배우인 강우진. 심지어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남주. 거의 똑같은 환경의 리딩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배경과 인물들은 판이했다. 한국에서의 대본리딩이라고 한다면 컨셉질 유지를 위한 전쟁이었다면 이곳에서는 한국 대표로서의 자존감을 폭발해야 하는 전쟁터다.
이 복도를 지나 리딩장에 도착하면 수많은 헐리웃 배우들이 즐비할 것이며.
‘죄다 나를 구경하겠지?’
강우진을 판단할 것이 틀림없었다.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유일한 한국배우에 남주이며 현재 헐리웃을 여러 이슈들로 들썩이게 하고있는 장본인. 누가 됐든 궁금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국가대표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딱히 누가 덤빈 것도 아닌데 우진의 심정에 뜨거운 것이 솟구쳐올랐다. 모두를 짓누를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확실히 알리고 싶은 것에 가깝다. ‘내가 강우진이다’ 따위의 정도?
하지만 오바를 떨 필요는 없었다.
‘너무 오바떨고 쎈척하면 도리어 약해 보이는 법이지. 응 그래. 적당히- 쿨함을 장착하고 유연하고 의연하게. 그런데 이제 실력을 보일 땐 확실하게.’
그런 강우진이 리딩장에 도달했을 무렵 나름 익숙한 헐리웃 탑배우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크리스 하트넷이었다. 그는 리딩장 안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디션에 시도조차 안 했어. 포기했거든 강우진의 연기를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 이 양반 여기서 뭔 쌉소리를 하고있는 거냐? 무심한 얼굴인 우진이었지만 내면으로는 꽤 놀랐다.
‘뭐여? 뭔데??!’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퍽 예민한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줄줄 뱉는 크리스가 영 요상했으니까.
‘역시 헐리웃이라 이거냐? 졸라 개방적이네. 아니 걍 저 남자가 특이한 건가?’
더 구경할 마음이 있긴 했으나 우진은 일단 크리스에게 낮은 톤의 영어로 인기척을 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
크리스 하트넷이 약간 움찔하며 몸을 뒤쪽으로 돌렸고 어느새 짙은 컨셉질을 장착한 우진이 차분하고 묵직하게 리딩장으로 들어섰다. 넓은 공간 중앙에 배치된 ㅁ자형 책상 그 위에 즐비한 외국인 배우들 바로 왼쪽에 놓인 수십 의자들에도 마찬가지.
“……”
수많은 외국인들을 가만히 훑는 강우진. 표정에 큰 변화는 없다. 특이한 것은 외국인들이 득실득실한 리딩장이 심히 고요하다는 것. 그리고 헐리웃 배우들 포함 전부가 우진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다분히 부담될 상황이었지만 강우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이때.
-스윽.
매력적인 짙은 갈색 눈동자의 크리스 하트넷이 강우진에게 붙었다. 옅게 미소짓는 그.
“오랜만이네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당신의 기세 차이는 크네요.”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헐리웃 관련 여러 건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크리스와 간단히 악수를 나눈 강우진의 대답은 짧았다.
“DM으로 보낸 준 응원은 감사했습니다.”
“뭘요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 누구랑? 나랑?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겉으론 별수롭지 않게 강우진이 끄덕였다.
“그렇죠.”
우진이 크리스와 적당한 대화 중일 때도 이 둘을 빼면 리딩장은 조용했다. 허나 모두는 등장한 강우진을 가늠하고 있었다.
초대된 외국인 기자들도.
‘과연- 저 여유 하며 분위기 자체는 뭔가 남다르긴 하군.’
‘헐리웃에서의 대본리딩은 처음일 텐데도……전혀 흔들림 없이 꼿꼿하다고 해야 할까? 오만함? 아니 그저 강인할 뿐인가.’
배우들의 팀원 관계자 제작진 등등. 특히 ㅁ자형 테이블에 자리한 헐리웃 배우들이 속내들이 시끄러웠다.
‘남주로서 당연한 거긴 하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아 거기다 아우라가 무거워.’
‘크리스랑 친한가? 것보다 일들이 많이 터지는 중이라도 헐리웃 진출은 얼마 안 됐을 텐데- 왜 저리 여유롭지?’
‘어색한 모습도 없고……근데 생각보다 많이 시니컬 한걸? 저게 원래 캐릭턴가?’
‘확실히 일반적인 아우라는 아니야.’
무음이지만 강우진을 향한 내면의 평가들이 즐펀하게 뿌려졌다. 대체로 우진의 평가는 ‘역시 심상치 않군’ 정도였다. 그 심상치 않은 강우진의 알맹이는 약간 호들갑 떨며 신기해하는 중이었다.
‘오오- 배우들 개많네. 저 배우랑 저 배우는 많이 봤다 저 배우도!’
눈에 익은 헐리웃 배우들이 많았으니까. 새삼 출세했네 싶은 그였다.
‘사람 일 모른다 몰라 쟤네들이랑 같이 대본리딩을 할 줄 알았겠냐고.’
이어 크리스 포함 주변 외국인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한 강우진이 움직였다. 너무 시선을 집중 받는 것이 조금은 귀찮기도 했으니까. 눈알을 굴려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 강우진.
-[헨리 고든 역/ 강우진]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남주의 자리 겸 ‘컬럼비아 스튜디오’가 목숨을 건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첫 캐릭터의 좌석이기도 했다.
-슥.
우진이 자리에 앉자 리딩장 전체론 묘한 긴장감이 퍼졌고 뒤쪽 의자에 포진된 ‘컬럼비아 스튜디오’ 간부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빌런의 포스가 저 정도는 돼야지.’
이미 그들은 강우진의 컨셉질에 전염 당했다. 곧 자리에 앉은 강우진의 오른쪽에 크리스가 앉았다. 그의 착석으로 ㅁ자형 테이블의 배우들 자리엔 빈자리는 없었다.
배우들이 모두 도착한 것.
그러자.
-파바바바박!
무수한 셔터음이 들렸다. 기자들이 완성된 ‘삐에로:빌런의 탄생’ 구도를 찍기 시작했기 때문.
물론.
‘강우진을 중심으로.’
‘메인은 저 강우진이지.’
모든 사진엔 우진이 무조건 찍혔다. 오른쪽의 크리스도.
그때였다.
-스으.
과열된 리딩장으로 인물 몇몇이 추가도 등장했다. 주름진 얼굴의 또 한 명의 한국인. 안가복 감독과 인상이 세다 싶은 여자. 즉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총괄 프로듀서였다. 안가복 감독은 리딩장에 들어서자마자 영화사 간부들부터 여럿에게 인사하면서도.
“……”
남주 자리에 앉은 강우진과 시선을 나눴다.
‘잘 어울리는구만 ‘거머리’ 이후로 두 번짼가?’
상황과 배우들 그리고 헐리웃이라는 배경은 과거완 달랐지만 ‘거머리’ 때와 지금의 모습에 유일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총괄 감독이 안가복이라는 것 강우진이 남주라는 것.
그렇게 안가복 감독과 프로듀서가 자리로 움직였다.
우진의 바로 왼쪽 ㅁ자형 책상에서 상석의 의자를 빼낸 안가복 감독이 강우진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국어였다.
“즐겨봅시다 그리고 살살해요 살살.”
잠시 뒤.
안가복 감독의 입장으로 ‘삐에로:빌런의 탄생’ 대본리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넓은 리딩장엔 수십 헐리웃 배우 포함 최소 백여 명의 외국인들이 응집됐다. 분위기를 호령하는 건 안가복 감독이었다.
“반갑습니다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연출은 맡은 안가복 감독입니다.”
그가 인사하자 박수가 울렸다. 다음 인사는 총괄 프로듀서였고 안가복 감독이 말을 이었다.
“일단 ‘삐에로:빌런의 탄생’에 합류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높고 원대한 기획인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서막인 만큼 최선을 다해 임할 것입니다. 전부 나와 비슷한 마음일 거라 생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일단 시나리오는 모두 준비했으나 각자의 것으로 해도 됩니다.”
어느새 진중한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강우진의 표정도 심히 딱딱했다. 허나 우진은 내면으로 딴생각이 진했다.
‘워- 씨 영물 할아버지. 아니 안 감독님 영어 실력 개많이 늘었네??’
곧 안가복 감독이 배우들 소개를 진행했다.
“헨리 고든 역의 강우진.”
딴생각하다 흠칫한 우진이 컨셉질을 바로 잡았다. 스르륵 일어난 그가 세상 묵직한 영어를 뱉었다.
“강우진입니다 재밌게 촬영하겠습니다.”
무척이나 간단한 인사말. 이에 헐리웃 배우들이 약간 놀랐다. 미간을 좁히는 이도 있었다.
‘긴장했나?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안가복 감독은 배우 소개를 이었다. 다음은 크리스 하트넷이었다. 그는 우진과 달리 인사에 농담을 섞었다. 후로 전체 배우들 소개는 약 30분 이상 소요됐다. 총괄 프로듀서와 키스탭 ‘컬럼비아 스튜디오’ 간부들 등까지 소개하니 1시간이 지났다.
이윽고.
-팔락.
주름진 얼굴의 안가복 감독이 시나리오를 펼쳤다. 그를 따라 강우진 크리스 외의 전체 헐리웃 배우들도 같은 액션을 취했다. 촬영팀은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를 점검했고 기자 등 나머지 인물들은 배우들에 시선을 집중했다.
정확히는 대부분이 강우진을 본다.
본격적으로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대본리딩의 스타트는 안가복 감독의 입에서부터였다.
“밤의 도로 버스 한 대가 달리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지문과 기타 부수적인 건 안가복 감독이 맡았다.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시작점은 ‘헨리 고든’보단 각성한 ‘조커(Joker)’의 형태가 잠시 보이는 것부터였다. 지문을 읽던 안가복 감독이 바통을 강우진에게 넘겼다.
“……”
지금의 우진은 이미 ‘헨리 고든’. 아니 ‘조커(Joker)’를 진작에 끌어 올렸다. 크리스와 주변 헐리웃 배우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저 낙서 가득한 버스가 그의 시야에 보였다. 버스의 배기음이 귓가에 울렸다. 조금은 젖은 붉은 머리가 눈을 찔렀다.
“후-”
대강 머리를 쓸어 넘겼다.
광기 광기가 온몸 혈관을 탄다. 내장들과 뇌에 스며든다. 비극과 희극이 공존했다. 감정이 치솟았다. 나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너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강우진의 입가가 찢어졌다. 웃었다.
저걸 ‘웃었다’ 표현하는 게 맞나 싶지만 딱히 다른 방도가 없다. 다분히 소름 돋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그야말로 비극과 희극이 얼굴에 공존했다. 얼핏 무서워 도망쳐야 될 것 같지만 묘하게 든든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강우진의 ‘헨리 고든’을 맛본 수십 헐리웃 배우들의 두 눈이 커졌다.
“……”
“……”
작게 입을 벌리거나 ‘저게 뭐지?’ 따위의 얼굴로 미간을 좁히기도 했다. 이어 시나리오상 건들대는 양아치 남자들이 등장할 차례였다. 그들은 단역이라 대사는 안가복 감독과 프로듀서가 맡았다.
폭력이 오갔다. 강우진의 입가는 더 찢어졌다.
“흐으-”
실제 밟히는 건 아니었으나 우진의 웃음은 더욱 격렬해졌고 광기가 진해졌다.
“크크크!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의 괴기한 웃음이 리딩장 전체를 감쌌다. 여기서부터는 배우들의 수십 스탭들과 기자들 전부의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대본리딩에 돌입하자마자 저만한 농도의 연기가 바로 튀어나온다고?’
그러나 진행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안가복 감독이 버스 기사가 되어 대사쳤고.
“다 당신! 미쳤구만!”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꺾은 강우진이 받아쳤다.
“미쳤다니 극찬인걸?”
10분도 안 되는 이 씬에서 강우진을 보는 모든 배우들 시야가 변했다.
‘……‘조커(Joker)’.’
‘세상에 마치 시나리오를 찢고 현실로 나온 것 같잖아?’
‘망할 연기를 봤는데 왜 헛것이 보이는 거야.’
앉아 있던 우진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얗고 벌겋게 칠해진 ‘삐에로’로 교체됐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헤진 집업 후드를 입은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다.”
안가복 감독이 읊은 지문이 씬 변경을 알렸으니까. 그러자 광기 가득했던 우진의 웃음이 싹 사라졌다. 찰나였다. 그리고 현재의 강우진은.
“뭐야?”
“아 아니. 저는.”
굽은 어깨의 유약한 ‘헨리 고든’이었다. 딴사람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마냥 멍청이 같진 않았다. 약해빠진 표정과 몸짓이었지만 우진의 눈빛엔 미약한 분노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호흡과 잠시잠깐 표출되는 그의 대사 강세에서 느낄 수 있었다.
광기는 사라진 게 아니다. 심연에 감췄다.
우진의 터무니없는 연기법을 감상하던 헐리웃 배우들은.
‘……그가 왜 ‘헨리 고든’에 낙점됐는지 알겠군.’
점차 인정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어떻게 저런 수준 높은 연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메소드? 아니야- 저건 그보다 좀 더 상위의 뭔가다. 대단해 크리스를 밀어낼만했어.’
‘망할. 돋은 소름이 풀리지 않네 솔직히 이질감이 들 줄 알았는데……전혀. 저건 연기라기보다는- 그냥 ‘조커(Joker)’ 그 자체잖아??’
왜 강우진이라는 한국배우가 이 거대한 작품의 남주에 크리스보다 앞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를 이해했다.
‘분석할 필요가 없어. 빠져들어서 봤다 연기가 저 정도나 되면 ‘헨리 고든’ 역을 안 줄 수가 있나.’
포진된 헐리웃 배우들은 심히 충격을 받았다. 더불어 초반에 가졌던 호기심부터 의심을 깔끔하게 지워냈다.
‘미쳤군 마치 ‘조커(Joker)’와 같은 공간에 있는 느낌이야. 크리스가 오디션을 포기할 만해.’
여기서 저 강우진을 인정하지 않는 건 그저 객기일 뿐이었으니까. 이쯤 ‘헨리 고든’의 씬이 끝났다. 안가복 감독은 다음 씬을 넘기기 전에 작게 ‘컷’을 뱉었다. 배우들이 처음 모인 자리니만큼 틈새마다 호흡을 정렬할 시간을 준 것. 곧 리딩장에 웅성거림이 울렸다. 기자들 관계자들 할 것 없이 서로 대화하기 바빴다.
이 순간.
“강우진씨.”
무심한 얼굴로 시나리오 보는 우진에게 작게 고개 갸웃한 크리스가 물었다.
“오디션 때와는 느낌이 좀 다른데요 힘이 좀 빠진 듯한.”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우진이 간단히 답했다.
“대본리딩이니 적당히 했을 뿐입니다.”
사실이었다.
순간 몰린 수십 헐리웃 배우들의 얼굴이 티 나게 구겨졌다.
‘뭐? 저 적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