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빌런 (4)
‘야수’ 분장을 시작하라는 빌 로트너 감독의 외침· 이에 연회복을 입고 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귀족 같은 느낌의 강우진이 촬영존에서 빠졌다· 곧 백여 명 스탭들이 다시금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강우진은 티 안 나게 주변을 훑었다·
‘미친· 아까도 그랬지만 또 봐도 장관이네·’
‘야수와 미녀’ 중 ‘야수’의 삶을 책임질 거대한 성 세트장을 말하는 것· 심지어 성벽도 올렸다· 여기만 봐도 어마무시했지만 이 5만 평 넘는 ‘spt 스튜디오’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공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대단했다·
‘여기 세트단지는 걍 한 나라 아니냐고·’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규모가 거대한 것도 그랬지만 우진이 지속적으로 탄성을 뱉는 건 전체 세트장에 구축된 분위기였다· 마을이나 성 등등 그야말로 이 ‘spt 스튜디오’는 전체가 판타지 세상이었다· 뭐 여기 인원 중 유일하게 ‘야수와 미녀’의 진짜 세상을 수차례 살다 온 우진이었다·
그래도 현실에서 그 방대한 세계관을 퍽 비슷하게 구현한 것이 신기했다·
‘당연히 퀄리티야 아공간 쪽이 압승이지만·’
벅차오름도 있었다· 추억의 작품의 실사화· 그리고 그 실사화 현장의 ‘야수’가 자신이니까· 겉으로야 별수롭지 않았지만 내면의 알맹이 강우진은 어깨가 하늘로 승천했다· 그런 우진이 외국인 스탭들과 움직이면서도 시선이 성벽 위쪽으로 향했다·
뭐랄까 초록색이 많다·
성벽 전체의 끝부분에 성의 지붕에 세트 곳곳에 초록색이 주르륵 깔렸다· 마치 모든 꼭대기를 초록색 천으로 마감을 한 느낌· 강우진은 초록색들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저게 그린 스크린이라 이거지?’
작품 제작에 있어 특수 효과를 줄 때 주로 사용하는 그린 스크린· 워낙에 CG가 많이 사용될 ‘야수와 미녀’였기에 보통의 영화보다 그린 스크린이 배는 깔렸다· 물론 우진도 여러 영화에서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본다· 실제와 CG를 합쳐야 더욱 현실 같긴 하겠지·
나름 판단을 세운 우진이 고개를 돌릴 때 옆쪽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귀족의 모양새가 잘 어울리는데요?”
마일리 카라였다· 아직은 차례가 아닌지 금발은 한 줄로 묶었고 간편한 흰색 반팔 차림이었다· 우진은 주변의 눈이 많기에 컨셉질을 짙게 하며 답했다·
“덥습니다·”
“그런 거치고는 전혀 더운 티가 안 나는데요?”
“직접 경험해보시면 알아요·”
“응 나는 세 번째예요· 그리고 지금 모습 사진 찍었는데 기분 안 나쁘죠?”
“딱히·”
주변 스탭 시선을 신경 쓴 건지 한 걸음 다가온 마일리 카라· 우진에게 좋은 향이 스민다· 이어 카라가 작게 속삭였고·
“나도 모르게 찍어버렸어요·”
“······”
강우진은 무심한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자 카라가 옅게 웃으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야수’ 분장 시작하죠?”
“네·”
“그런 본격적인 분장해 본 적 없는 거로 아는데·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작게 엄지를 보이는 카라가 멀어진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우진이 속으로 갸웃했다· 각오? 분장에 각오까지 필요한가? 의아했다· 우진에게 가장 센 분장이라면 역시 최근의 ‘조커(Joker)’· 매번 1시간씩은 소요된다·
‘야수’의 레벨이 높으니 조금 더 걸리는 수준?
‘뭐 감독한테 듣긴 했어 꽤 걸릴 거라고· ‘조커(Joker)’보다야 복잡하니까 2시간 정도 될라나?’
생각보다 가볍게 마음먹은 강우진이 다시 발을 움직였다· 그의 목적지는 세트 초입에 설치된 여러 트레일러 쪽·
그중에 가장 큰 것이 분장팀의 본부였다· 곧 세트 초입에서 강우진이 또 한 명의 여배우와 만났다· 분장을 마친 마리아 아르마스였다· 머리 색 전체가 갈색으로 변했고 파마기가 돌았다· 의상은 베이지 드레스에 흰색 앞치마를 했다· ‘왕자’의 성에서 일하는 직원다운 모습· 재밌는 것은·
‘주전자를 들었네·’
마리아의 손에 하얀색에 여러 문양이 찍힌 주전자가 들렸다는 것· 자신이 이 주전자로 변한다는 암시를 포스터에 보여줄 것이라 그렇다·
아마 다음 촬영 차례가 그녀인 듯·
마리아는 우진과 눈을 맞췄으나 딱히 말은 하지 않았다·
“······”
그저 새침스런 표정으로 지나갈 뿐· 우진 역시 별수롭진 않았지만 왜인지 골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중에 촬영 드가면 쟤한테 포효할 때 좀 세게 해야지 쨌든 내 직원이니까 상관없을 듯·’
혼자 재밌는 목표가 생긴 강우진이 분장팀 트레일러에 입장했다· ‘왕자’ 모습을 위해 이미 한 번 와봤지만 왜인지 강우진은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퍽 놀랐다· 물론 내면으로만·
‘와- 씨 저거 뭐여? 저것들을 나한테 붙인다고??!’
분장팀 트레일러 내부에 커다란 뿔이며 수북한 갈색 털이 보였으니까· 그뿐인가? 뭔지 모를 징그러운 가죽이나 별의별 소품들이 가득했다· 저도 모르게 멈칫한 강우진· 그냥 ‘아 잘못 들어왔네요 하하·’ 하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쎈척 짙은 그는 의연해야 했다·
‘몰라 씨 뒤지기야 하겠냐고·’
전문가 냄새 풀풀 풍기는 외국인 스탭들이 마음 단단히 먹은 강우진을 발견하곤·
“여기 앉으세요 우진씨·”
웃으며 반겼다· 우진은 덤덤한 척 스탭이 안내한 의자에 앉았다· 경험한 적은 없지만 고문 의자에 앉는 느낌이 들었고 뒤쪽에 선 분장팀 메인이 강우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좀 쉬세요 ‘야수’ 분장 마무리까지 3~4시간 걸릴 거예요·”
“······4시간·”
“네 좀 길죠? 그나마 풀세팅은 아니라서 4시간 정도예요· 나쁘지 않은 편이랄까? 혹시 중간에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아니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본능적으로 허세를 가미한 우진이 속으로 맹렬히 외쳤다·
‘4시간??!!! 돌았나? 말이 돼?!’
말이 된다· 헐리웃에선 그보다 두 배 이상 걸리는 분장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첫 경험인 강우진은 충격받는 게 당연했다· 곧 스탭 여러 명이 우진에게 달라붙을 때였다·
돌연 강우진이 스탭들에게 요청했다·
“시나리오를 좀 주세요·”
꼼수였다·
이후·
희망의 끈인 시나리오를 손에 쥔 강우진· 그의 얼굴에 여러 것들이 시작됐다· 동시에 분장팀 메인 스탭이 재차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도 ‘야수’ 분장은 촬영 안에 그리 많진 않을 거예요 이번 포스터 촬영이랑 본 촬영 중 몇 번 정도고······”
그녀의 브리핑이 우진의 귀엔 잘 들리지 않았다· 점점 얼굴에 붙는 것들 때문에 묵직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스탭의 설명은 끊기질 않았다·
“본 촬영 중 거의 80% 이상은 특수 촬영 전용 의상을 입게 될 거라- 아 의상 본 적 있으시죠? 그 몸에 딱 붙는·”
아직 못 봤지만 우진이 대강 답했다·
“예 압니다·”
그렇게 4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강우진은 힘들 때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아공간을 다녀오며 어떻게든 버텼다· 어느새 아침이었던 시간은 오후 2시를 향하고 있었고 4시간 사이 마일리 카라 포함 모두 촬영을 마친 채였다· 하지만 그 어떤 배우도 퇴근하진 않았다·
이유야 간단하지 않은가?
‘야수’를 보기 위함·
곧·
“‘야수’ 들어갑니다!!”
수많은 촬영기기가 즐비한 백여 명 스탭에 수십 헐리웃 배우들이 포진된 촬영 존으로 ‘야수’가 들어섰다· 분장이 무거워서인지 ‘야수’의 양옆으로 스탭이 부축 중이었고 기대하고 있던 빌 로트너 감독이 바로 반응했다·
“오오오! 죽이는군!”
그가 돌연 박수 치자 스탭들 대부분도 양손을 쳐댔다· 온몸이 천근만근인 우진은 속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치지 마! 박수 치지 말라고! 아오 씨 개무겁네!!’
하지만 표정 변화는 없다· 컨셉질도 컨셉질인데 얼굴에 붙은 분장이 워낙 견고해서 강제적인 것도 있었다· 새로 붙인 거칠고 괴기한 피부 이마부터 머리 뒷목까지 수북한 갈색 털 이마에 붙은 휘어지고 뾰족한 뿔 눈코입 모두 커지고 짐승처럼 변했다· 당연히 이빨도 붙였고·
지금 강우진은 괴물 그 자체·
하지만 ‘야수’가 되는 길은 험난했다·
이쯤 주변 스탭들이 감탄한다·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근데 생각보다 우진씨 되게 담담하네· 안 힘든가?”
“맞아 엄청 무거울 텐데· 가뿐한 느낌이죠?”
아니었다· 그는 지금 난생처음 겪은 사태에 정신이 혼미했다· 내면으로·
‘으으으!! 토 나오네 진심!!’
머리에 호박통을 한 10개쯤 박은 느낌·
어쨌든 우진 또는 ‘야수’는 스탭 배우들의 환대를 받으며 어렵사리 카메라 앞에 섰다· 앞이 보이긴 하지만 100%는 아니었다· 어렴풋 보이는 감독 옆에 선 금발의 여자· 마일리 카라· 그녀가 핸드폰으로 강우진을· 아니 ‘야수’를 찍어대다가 대뜸 풉 웃었다·
“근데 왜 상체만 ‘야수’예요?”
상체만 ‘야수’였기에· 하체는 강우진의 것· 즉 반만 분장했다· 곧 감독이 답했고·
“어차피 하체는 포스터에 안 담기니까·”
“아아- 그런가?”
싱긋 웃던 카라가 반만 ‘야수’인 강우진의 모습 전체를 찍었다· 그리곤 작게 읊조렸다·
“제목은 반인반수· 응 딱 좋아·”
다음 날 아침 ‘컬럼비아 스튜디오’·
대형 회의실에 간부들부터 많은 관계자들이 모였다·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운 걸 보니 퍽 중요한 얘기를 하는 듯· 뭐겠는가? ‘삐에로:빌런의 탄생’ 건이었다· 정확하게는 안가복 감독이 제안한 ‘아카데미상’ 관련·
“말도 안 돼요 그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차후 ‘삐에로:빌런의 탄생’의 진행이 뭉개질 수 있다고·”
“그렇지· 이미 기대치는 충분히 높아 괜히 도전했다가 망하면 개봉 확정된 나라들에서 취소가 속출할 수도 있어요· 반댑니다 난·”
“다들 알고 있잖아요? 무리해서 진행하는 건 어디선가 100% 구멍이 납니다· 나 역시 반대합니다·”
역시나 반대의 목소리가 더 크다· 진행 잘 되고 있는데 돌연 리스크가 따르는 도전을 하자니 당연하겠지· 그런 수십 인원 중 아까부터 검지를 책상에 두드리며 생각에 빠진 남자가 있었다· 민머리 간부였다· 처음부터 강우진과 엮인 적이 많아선지 제일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
그는 지금 과거를 상기하고 있었다·
안가복 감독과의 미팅· 프로듀서인 노라 포스터의 의중 그녀는 의외로 안가복 감독의 말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최근에 연락 온 강우진과의 대화·
이내 뭔가를 결정한 그가 작게 한숨을 뱉었고·
‘후- 역시 흐름을 바꿔야겠군·’
시끌시끌한 회의실에서 돌연 손을 올렸다·
“우리가 너무 겁에 질린 건 아닌가 싶어·”
민머리 간부의 뜬금없는 침투· 곧 회의실에 모인 전부의 시선이 그에게 붙었다· 미간을 찌푸리거나 눈에 물음표를 띄운다· 반면 천천히 다리를 꼰 민머리 간부는 침착했다·
“촬영 스케줄이 어쩌고 ‘아카데미상’이 망하면 어쩌고 들인 자금이 공중분해 되면 어쩌고 개봉관이 줄면 어쩌고· 이래저래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 끝도 없지만 그렇게 걱정만 늘어놓을 거면 애초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해·”
“자네는 찬성이란 말인가?”
“찬성이고 반대의 얘기가 아니지· 그저 우리가 지금 너무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야· 이미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주사위는 던져졌네 우리가 모두 각오를 했기에 시작한 것 아니었나?”
“······”
“실패는 어디나 도사리지· 안가복 감독의 제안에도 우리가 계획한 초기의 설계도· 위험하든 안전하든 실패가 없는 곳은 없어· 아닌가?”
분위기가 변한다· 민머리 간부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나라고 우리의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중요하지 않겠나? 하지만 방대한 세계관을 짜 놓고 정작 우리들이 비겁하다면 결국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옹졸한 결과물이 만들어질 게 뻔해· 거기다 ‘삐에로:빌런의 탄생’은 모든 이야기의 서막 아닌가? 시작부터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고 있다고 우리가 지금·”
“···하지만 반대로 시작이기에 실패 없이 성공해야 하는 건 자네도 잘 알잖아·”
“알아 그래서 모두에게 한 번 묻지·”
잠시 입을 멈춘 민머리 간부가 전체 인원을 훑다가 물음표를 던졌다·
“강우진은· 그가 만든 ‘조커(Joker)’가 헐리웃을 뒤집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
“우리가 그간 봐왔잖아· 그의 소름 돋는 연기를· 그건 흉내 따위가 아니야 실체라고· 잊었나? 강우진은 그 크리스 하트넷을 포기하게 만들었어· 그저 우리가 본 것만을 믿자는 얘기야·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우린 잠자코 지켜보는 걸 제안하지·”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침음을 뱉거나 표정이 진중해졌다· 생각이 바뀌는 인원이 생겨난 것· 이쯤 민머리 간부가 강우진의 이름을 다시 꺼냈고·
“강우진이 ‘내후년 아카데미상은 자기 계획에 없다’고 말했다는군·”
“계획에 없다??”
“처음부터 그는 이번 ‘아카데미상’만을 노리고 있었던 거지· 그래 확실히 말하자면 칸에서부터· 또는 그 이전·”
민머리 간부가 여유롭게 꼰 다리 방향을 바꾸며·
“방대한 세계관의 첫 ‘빌런’이 저리 대놓고 자신감을 비치는데 우리가 꽁지 빼고 도망치면 그와의 후속작 계약들도 물 건너갈 테지· 믿음을 주지 않았으니 말이야·”
핵심을 뱉었다·
“강우진의 ‘조커(Joker)’를 포기할 셈인가?”
회의실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