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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종이뭉치는 타노구치 쿄타로 감독의 완성된 시나리오였다. 이로써 우진은 권기택 감독과 쿄타로 감독까지. 국내와 타국의 거장 시나리오를 총 2개 가지게 됐다.
‘오- 그 일본 감독님 진짜 시나리오를 보냈네?’
쿄타로 감독과의 마지막 만남은 회사였다. 거기서 쿄타로 감독은 뭔가 오해 짙은 말을 해대다가 결국엔 우진의 합류를 원했었다. 일본 진출 어쩌고저쩌고.
‘뭐랬더라. 음 시나리오 각색 중 이랬고 일본에 무슨 유명 소설작가 원작이랬나?’
그게 몇 주 전이었다. 솔직히 우진은 그간 별 연락도 없길래 그런가 보다 했었다. 연예계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많은 이해관계가 섞이고 쿄타로 감독도 우진에게 함께하자곤 했지만 일본 컴백 후 상황이 달라졌을 거로 생각했다.
허나 잠수탄 게 아니었다.
진짜로 일본 거장의 시나리오가 도착했다. 이 소식이 국내 언론에 퍼지면 뒤집히겠지. 하지만 당장은 대외비였고 두근거림이 증폭된 강우진이 최성건 보던 시선을 시나리오로 내렸다.
시나리오 표지엔 타이틀과 감독명이 적혀있었다. 물론 일본어로.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
-감독/ 타노구치 쿄타로
제목을 확인한 우진이 속으로 읊조렸다.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 뭔가 의미심장한데? 것보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그리 낯선 타이틀은 아니었다. 유명 소설이 원작이라 그런가? 왠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느낌. 다만 우진은 책과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다.
‘기분 탓인가?’
이때 최성건이 강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메일엔 우진이 니가 시나리오를 읽은 뒤에 미팅하자고 써 있더라. 그러니까 쿄타로 감독이 다시 한국에 오겠다는 거지. 딱 봐도 이 작품 사이즈가 심상치 않어.”
“그 감독님이 다시 한국에요?”
“응. 나중에 말 바꿀지는 모르겠다만 당장은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언제 입국할지는 모르고.”
헐 나 때문에? 진심인가? 약간 놀란 강우진에게 최성건이 미소를 보였다.
“쿄타로 감독 저번에 회사 왔을 때도 느꼈다만. 진짜 제대로 너한테 꽂힌 것 같다. 원래도 친한파 감독이긴 하다만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캐스팅 이외의 다른 뜻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읊조린 최성건이 일단 차에 타라는 손짓을 던졌고 두근거림은 숨긴 우진이 무표정으로 승합차에 올랐다. 승합차에 장수환이나 한예정은 없었다. 그 이유를 운전석에 오른 최성건이 말했다.
“애들은 오늘 점심쯤 합류할 거다. 요 며칠 빡셌으니까 좀 자다 나오라고 했으.”
“아- 예.”
덤덤히 고개 끄덕이는 강우진.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는 최성건. 그런 그가 핸들을 돌리면서도 룸미러에 비치는 우진을 힐끔했다.
‘할지 말지는 시나리오 읽어보고 판단하겠지. 가능하면 그 미친 감이 또 발동됐으면 좋겠는데.’
그리곤 작게 웃었다.
‘만약 우진이가 쿄타로 감독 거 한다고 한다면 이거 진짜 한국 뒤집힌다.’
고작 몇 달. 아직 발표된 건 아니지만 현재 강우진은 권기택 감독 사단에 합류한 상태. 거기에다 뜬금 일본 거장 작품에도 붙는다? 두 가지 폭탄이 터지면 국내 언론이 침 흘리며 달려들 게 빤했다.
그야말로 사상 최초니까.
신인이 이렇게 턱턱 거장들의 작품에 합류하는 경우는 없었다. 즉 강우진은 전례 없는 역사를 쓰고 있는 것과 같았고.
‘상상만으로 전율 터지네.’
시나리오를 내려보던 무심한 표정의 우진은 이미 시나리오 몇 장을 넘긴 상태였다. 당연하겠지만 시나리오는 전부 일본어였다.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원문으로 보낸 건가?
하긴 이게 맞긴 했다.
시나리오를 번역해서 보내게 되면 연출자의 의도와는 다른 부분이 생길 수 있으니까. 뭐 최대한 가깝게 번역이 되겠지만 이미 일본어를 습득한 강우진에겐 그냥 이 상태로 읽는 게 나았다.
곧.
-스윽.
강우진이 티 안 나게 검지를 들었다. 왜겠는가? 일단 아공간에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우진은 시나리오 옆에 붙은 검은 사각형을 찔렀다.
금세 그는 끝없이 어두운 아공간에 도착했다.
이젠 집과 다른 바 없는 곳. 이어 강우진은 짧게 기지개를 켜면서도 몸을 돌려 움직였다. 흰 사각형은 7개로 늘어난 상태.
그중에서.
“음-”
강우진이 확인한 건 제일 마지막 것. 쿄타로 감독의 시나리오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이었다. 재밌는 것은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의 흰 사각형을 보자마자 우진이 대놓고 놀랐다는 것.
“워- 씨.”
이유는 심플했다.
-[7/시나리오(제목: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 A급]
-[*완성도가 매우 높은 영화 시나리오입니다. 100% 리딩이 가능합니다.]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은 시작부터 등급이 A급이었으니까. 시작부터 A급은 간만이었다. 우진은 놀람 반 기대 반으로 웃었다.
“이건 그냥 고 해야겠네.”
그리곤 뜬금 ‘퇴장’을 외쳤다. 어느새 우진은 움직이는 승합차로 돌아왔고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을 검색하기 위해서였다. 원작이 있는 작품은 제목을 비슷하게 가기도 하니까.
결과는 금방이었다.
‘책 있네. 같은 제목으로.’
실제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이라는 일본 소설책이 있었다. 심지어 베스트셀러. 한국에서도 인기 좋은지 리뷰도 많다. 우진은 화면을 터치해 책 정보를 확인했다. 이내 소설작가 이름이 보였다.
‘타키카와 아카리 작가? 아! 나 안다! 들어본 것 같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개유명한 작가잖아?’
일본 거장 감독 초유명 소설작가 원작 A급. 당장 핵심만 짚어봐도 어마무시했다. 이 순간 빨간 신호에 브레이크 밟던 최성건이 고개를 돌렸고.
“어때? 얼추 훑어보니까 일본 진출 괜찮을 것 같냐?”
포커페이스를 진하게 만든 우진이 허세를 가미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
강우진이 한창 이동 중일 무렵 왜인지 곳곳에서 착각에 전염된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미 꽤 포진된 상태에서 더욱더 번지고 있다는 뜻.
출처는 ‘프로파일러 한량’ 팀이었다.
수십 스탭들 또는 배우들. 물론 ‘프로파일러 한량’ 팀이 직접 움직인 건 아니다. 행동한 건 타인들. 그들에게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날아들었으니까.
“어어 난데 그- 강우진이란 친구 있잖어? 한량 촬영 땐 좀 어땠어? 성격이라든가.”
“응? 아 그렇지? 우진씨 이번에 너네 ‘마약상’ 현장에 땜빵 들어간댔나?”
“맞어. 며칠 있다 촬영 투입인데 애 느낌이 어떤가 싶어서.”
“하하하 나야 뭐 조명 달면서 대화 몇 마디 못 해보긴 했는데 우진씨 사람 괜찮지. 진국이여. 아 그러고 보니 영어를 기가 막히게 했었지 아마? 영어권에 살았다는 소리도 있고.”
“엥?”
강우진에 관해 묻는 곳은 그가 합류할 작품들 쪽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촬영이 임박한 ‘마약상’ 인원들이 많았다.
“강우진 말이야. 연기 톤이 특이하던데 현장에서는 어떻게 감정을 잡던가?”
“글쎄. 보고 있으면 그저 저게 뭔가 싶지. 누가 봐도 데뷔 몇 달 안 된 신인이다만 내 눈엔 최소 십수 년은 연기판에서 구른 놈처럼 보였어. 아니 어디선가 굴렀어 확실히.”
“그렇게나 요지경인가? 자네가 판단이 안 설 정도로?”
“기묘해. 귀신같은 놈이야. 감정의 인 아웃이 말도 안 되게 빨라. 뭣보다 앞에서 보고 있으면 이게 배우인가 배역 그 자체인가 헷갈리고.”
“허-”
“근데 본인 말론 연기를 독학했다고 했어. 대본리딩때 자기 입으로 말했고.”
“뭐라? 그게 무슨 소린가.”
친한 원로배우들 사모임 또는 같은 소속사인 배우들 라인이 형성된 촬영 조명 등의 제작진들. ‘마약상’의 인원들이 한데 짜고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 만의 방법으로 연락을 해댔다.
걱정도 있었고 호기심도 있었다.
워낙 ‘마약상’의 상황이 특이했고 그 상황을 덮으러 오는 강우진의 정보가 극도로 부족했으니까. 처음부터 캐스팅된 배우라면 차차 알아갔겠지만 갑자기 박힌 강우진이기에 당장은 작은 정보라도 필요했다.
“강우진? 딴 건 모르겠고 체력이 죽여 주더라. 촬영 중후반부쯤 죄다 골골대는데 혼자만 멀쩡해. 새벽부터 밤까지 강행군 촬영인데 연기에 흐트러짐도 없고. 괴물이라니까 괴물.”
“그래 봤자 신인이잖아? 당시엔 무명이었을 거고.”
“직접 보면 알아 나도 그런 생각 했었는데 그 물건은 보면 볼수록 베테랑 그 이상이라고.”
덕분에 점점 ‘마약상’ 쪽에도 오해를 삼킨 개체수가 수를 불린다.
“애가 좀 냉랭하긴 해도 기민해. 누구더라? 아! 카감이 그랬나? 띠꺼운데 착하다. 딱 그거야 말수가 없는데 안 보는 것 같아도 전부 보고 있더라고.”
“한량 찍을 무명이었을 텐데 그런 여유가 있다고?”
“에이- 여유를 넘어 선다니까. 신인 아니야 그거 현장에서 제일 편하게 있던 게 그놈이었다니까. 무슨 제집처럼. 확실히 외국물 먹어서 그런가 마인드가 달랐어.”
“외국물??”
발 없는 착각이 천 리를 가는 중이었다.
이틀 뒤 8일 오후. 강우진의 승합차.
시간은 6시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검은색 승합차. 속도는 빨랐다. 그런 승합차의 안엔 강우진과 그의 팀이 모두 타고 있었다. 장수환은 운전에 집중 꽁지머리 최성건은 연신 통화 중 한예정은 우진의 코디북을 심도있게 내려보고 있다.
그리고 입은 체크 셔츠의 소매를 걷은 강우진은.
“···”
-팔락.
시나리오를 읽고 있다. 얼굴이 세상 진지했다. 컨셉질도 있겠지만 순수하게 집중하기에 나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영화 ‘마약상’의 시나리오.
이유야 간단했다. 현재 강우진은 ‘마약상’의 촬영지인 순천 세트장으로 이동 중이었고 오늘부터 강우진은 정식으로 ‘마약상’ 촬영에 돌입하니까. 일정은 약 2주 정도로 잡혀 있지만 더 짧거나 길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팔락.
강우진은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읽는다. 약간 점검의 성격이 짙었다. 이미 완독을 몇 번이나 했고 우진의 배역인 ‘이상만’과 스치는 타 배역 리딩도 완료했으니까. 강우진의 머릿속엔 ‘마약상’의 세계관이 딴딴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아마 각본을 쓴 김도희 감독보다 몇 배는 생동감 있게 그릴 수 있겠지.
‘이상만’을 넘어 ‘마약상’ 자체를 가진 것과 같다.
영화 ‘마약상’의 배경은 1999년 부산이었다. 외환위기가 터진 후 대한민국은 위기에 봉착하지만 정작 마약 사범들은 더욱 늘어난다. 마약을 찾는 고객들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즉 마약 시장은 호황이었다.
위기 속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심지어 이 시장에 타국도 끼어든다. 러시아 중국 일본 등등.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늘어나기 마련. 여기저기서 제조된 마약들이 국내로 미친 듯 유입된다.
이에 부산 경찰청은 골머리를 썩는다.
마약은 파고 파도 끝도 없이 파생되며 기생충 같은 마약 사범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늘어나기만 하니까. 더군다나 그들은 더욱더 암흑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타이밍을 놓치면 손쓸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경찰 내부에서도 썩고 있었다.
마약 조직들과 손을 잡은 것들이 생겼으니까.
결국 경찰 간부 몇몇이 모여 결단을 내리게 된다. 위장 수사에 돌입하자. 마약 시장에 경찰을 위장시켜 투입시키겠다는 결정. 다만 이 프로젝트를 아는 건 소수만. 경찰도 썩고 있으니까.
거기서 결정되는 게 ‘정성훈’이라는 마약과 형사였다.
그는 이미 건달들과 유대가 깊은 양아치 형사였다. 덕분에 정성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그딴 귀찮은 일에? 하지만 그간 있던 행실에 관한 협박 그리고 성공 시 포상금 등으로 인해 정성훈은 이 프로젝트를 하기로 한다. 시작은 위장으로 교도소에 수감 되는 것부터.
목표는 그 교도소에 있는 마약왕 ‘최준호’의 환심을 살 것.
마약왕 최준호의 팸이 되는 것이 핵심이었다. 물론 정성훈은 특유의 양아치 기질과 경찰과의 공조를 통해 최준호의 팸에 가까스로 합류. 차후 마약왕을 뒷배에 두고 출소한 정성훈은 부산에서 마약 사업을 시작한다. 동시에 숨겨진 마약 사범들의 정보를 경찰에 넘긴다.
이쯤 만나는 것이 ‘김교수’란 별명의 김현수.
김교수는 마약을 제작하는 인간이었고 정성훈은 그와 함께 부산 최대 마약 유통책으로 성장한다.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경찰과의 충돌. 돈이 어마어마하게 벌리니까. 결국 머리가 큰 정성훈은 일본 시장까지 넘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일본에 진출하나?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강우진이 맡은 ‘이상만’이었다. 부산의 건달 최대 조직인 ‘상만파’의 보스. 그는 일본 야쿠자와도 인연이 깊었기에 정성훈은 이상만과 딜을 친 뒤 일본에도 진출하게 된다.
이렇듯 ‘마약상’은 범죄 스릴러이며 많은 키워드가 함축돼 있다.
속도감 배신 액션 잔인함 등등. 어쨌든 우진이 보일 ‘이상만’은 일본이라는 배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면서도 극 초중반의 긴장과 기대감을 솟게 할 중요한 배역.
하지만 문젠 없었다. 이미 강우진은 준비 만반이니까.
‘후- 영화 촬영은 ‘흥신소’ 다음으로 첨이라 좀 떨리는데? 모르는 배우들로 겁나 미어터지겠지? 보내준 리스트 보니까 탑이나 연기 쩌는 배우들도 많던데.’
그래도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기분은 아마 평생 가지 않을까? 여전히 연예계는 미친 듯이 넓고 낯설었으므로.
‘후흡-’
강우진은 작게 심호흡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컨셉질을 장착하되 현장에선 무게감 있게 가겠다고.
‘될 수 있으면 말을 줄이자. 괜히 낯선 배우들 앞에서 실수하면 난감해져. 광고 미팅 때처럼 날 아는 사람 튀어나올 수도 있고.’
최대한 시니컬함을 강조할 것을 확정한 우진에게 최성건이 말을 건 것은 이때.
그는 비죽 웃고 있었다.
“우진아 10분 뒤 도착한다. 준비해.”< 확장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