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협 (4) >
오? 오늘 안에 된다고? 무심한 얼굴이긴 했으나 강우진은 속으로 엄지를 추켜세웠다.
‘확실히 능력이 기가 막히시네. 우리 대표님.’
은근 돌려서 재촉하긴 했다만 구해야 할 작품만 4개가 넘는다. 시간이 없긴 해도 내일까지여도 괜찮다 싶었는데 최성건의 대답은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강우진은 최성건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반면 최성건은 전혀 그럴 거 없다는 듯 두 손을 휘저었다.
“아니아니아니. 뭘 감사까지. 너가 구해달라면 작품 100개도 긁어와야지 임마.”
“정말이십니까?”
“···응. 아니 농담이었는데 넌 진심일 거 같아서 취소할게.”
뒤로 최성건은 오늘 스케줄을 브리핑하면서도 어디론가 연락을 돌리기 바빴고 강우진이 탄 승합차는 첫 스케줄을 향해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그의 오늘 첫 스케줄은 광고주 미팅이었다.
추가로 들어온 광고 관련.
낮 1시쯤 시작된 미팅은 약 2시간 정도 걸렸다. 기업과 미팅을 마친 강우진이 승합차에 다시 오른 건 이른 오후 3시쯤. 생각보다 길어진 미팅에 우진이 작게 숨을 뱉었다.
‘의류 광고라- 사기만 겁나 사봤지 이런 걸 내가 찍는 날이 올 줄이야. 이러면 막 협찬인가? 그런 것도 받는 건가? 개꿀인데 그럼.’
결과는 확정이었다. 이로써 우진은 벌써 두 번째 광고를 찍게 됐고 앞으로도 예정된 광고 미팅이 퍽 많았다.
‘쩌네 진짜.’
그야말로 강우진은 현재 연예계 모든 업계에서 주가가 수식상승 중이었다. 광고계까지 섭렵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연말쯤엔 얼마나 덩치가 커져 있을지 가늠조차 힘들었다.
이쯤.
“오빠.”
코디북을 확인하던 옆자리 한예정이 우진에게 핸드폰을 보였다.
“언론들 벌써 설레발 시작했어요.”
핸드폰 화면엔 한 기사가 출력 중이었다.
『[스타픽]울트라급 라이징 ‘강우진’ 올해 신인상 휩쓸 조짐』
허나 강우진의 시니컬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컨셉질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감흥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신인상? 내가?’
아직까진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미장센 영화제’와는 느낌이 좀 달랐다. 그땐 어버버하다가 대상을 받기도 했고 뭣보다 크게 보면 비주류 시상식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강우진 팀은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진 형님이 안 받으면 누가 받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대표님?!”
“수환. 앞이나 봐라.”
“인정. 반년 정도 남았긴 했는데 솔직히 오빠가 받아야죠. 아니면 오바야.”
덕분일까?
‘내가 그런 초대형 시상식에서 막 수상 소감 말하면서-’
우진은 저도 모르게 망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과하게 두근거린다.
‘와- 씨 기자들 겁내 많고 그 뭐냐 길쭉한 레드카펫? 그거도 밟고.’
무표정이지만 기분은 상당히 고조됐다. 최성건이 끼어든 건 이때.
“우진이가 신인상 정도로 흔들리겠냐? 저 표정 봐라 이미 뭐 본인이 신인상 받을 걸 확신하고 있구만.”
“아- 그러네.”
아닌데요. 그래도 뭐 쌓아온 캐릭터가 있으니 강우진은 평범하게 쎈척을 부렸고.
“···수상 소감은 준비해뒀습니다.”
“크크 저 봐라. 반년 남았는데 벌써 수상 소감을 짜놨다잖냐.”
“형님! 그 자존감 부럽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최성건이 다이어리 펴며 주제를 휙 바꿨다.
“뭐 어쨌든 팬사인회 와꾸 짠 거 좀 알려줄게.”
아- 맞아. 팬사인회.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는 강우진. 아깐 ‘실종의 섬’에 정신이 팔려있던 터라 별 신경을 안 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성건이 브리핑을 이었다.
“이틀 뒤 26일 금요일에 할 거고. 약 3시간 정도 진행된다. 장소는 ‘맥스날스’ 사옥 이벤트 홀. 시간은 오전. ‘맥스날스’ 협찬으로 들어가는 거라 광고도 신경 써야 돼. 그래서 당일에 기자도 너덧 명 올 거고 우리 홍보팀 촬영도 들어갈 거다.”
천천히 고개 끄덕이는 한예정이 거든다.
“무조건 찍어야죠 오빠 첫 사인횐데.”
“내 말이. 우진이 네가 혜연이 보다 훨씬 빨리 사인회 여는 거여.”
이제사 서서히 약간 떨림이 느껴지던 우진은 과거 편의점 앞에서 펼쳤던 짧은 사인회를 떠올렸다. 많이 올까? 얼마나 올까? 100명은 오는 건가? 이에 대한 답을 최성건이 타이밍 좋게 뱉었다.
“사인회 자체는 비공식이고 팬들은 총 300명 정도 올 거야. 오바돼도 400명은 안 넘을 거고. 더 크게 하고 싶은데 한계가 있어. 네 스케줄상 시간이 안 되기도 하고.”
“···”
표정 변화 없는 우진은 속으로 외쳤다.
‘400명??! 400명이요??!’
그렇게나 많다고? 이를 알 리 없던 최성건이 설명을 계속 이었다.
“거기서 반 정도는 팬클럽일 거고. 참 너 팬클럽 만 명 돌파한 건 들었지?”
“아- 예.”
“이번에 공식 팬카페 간부들이라고 할지 총괄 매니저하고 운영진들 다 올 거야. 앞으로 쭉- 볼 사람들이니까 사인회 때 친해져 두면 좋아. 왜 배우들 보면 팬클럽 애들이랑 DM도 주고받고 하잖냐?”
“총괄 매니저 닉네임이 ‘혈육여자’였나요?”
“어. 기억하네? 팬카페 자주 들어가냐?”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이.”
답한 우진이 시니컬하게 말을 이었고.
“‘혈육여자’ 닉네임 특이해서 기억납니다.”
속으로는 웃었다.
‘닉넴 센스는 구려도 잘해줘야지 팬클럽 대표니까.’
늦은 오후. 서울의 유명 호텔.
강우진은 한 대형 언론사와 라운지에서 인터뷰 중이었다. 이쯤 최성건과 한예정 그리고 장수환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물론 언론사 측이 사는 것. 이에 덩치 좋은 장수환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죽이네요! 우리 배우님이 잘나가니까 이런 대접도 받고!”
인정한다는 듯 스파게티를 돌돌 말던 한예정이 쌀쌀맞게 답했다.
“맞아. 요즘 어딜 가도 다 엄청 친절하게 대해줘요. 신인들한텐 원래 좀 대충대충 하는 게 맞는데.”
“다 우진 형님이 지금 미쳤으니까 그런 거겠죠!”
“응 맞아. 딱 혜연 언니 느낌이야.”
둘이 한창 강우진을 극찬하고 있을 때 왜인지 최성건은 연신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당연히 강우진이 부탁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어어 실장님.”
어딘가와 통화하던 최성건이 뜬금 자리서 일어났다.
“아이고 고마워요. 내가 다음에 밥 살게. 어어 스시 당연히 되지. 하하 예예. 맞아 bw 엔터로 퀵으로 보내줘요. 응. 땡큐!”
통화를 마친 최성건이 자신을 올려보는 둘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 잠깐 회사 좀 다녀올 테니까 밥 먹고 우진이 케어 잘하고 있어.”
“어! 그럼 차 키를.”
“아니 내가 들고 갔다가 우진이 먼저 끝나면 시간이 꼬여. 난 그냥 택시 타면 돼. 다음 거 보라(보이는 라디오)지? 혹시 사이에 뭔 일 있으면 바로 전화 때리고.”
“네-”
“알겠슴다!”
“오래 안 걸려.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다시 쪼인하자.”
급하게 레스토랑을 나온 최성건이 호텔 앞에 정차한 택시를 잡아탔다. 동시에 회사로 전화를 거는 그. 상대가 빨리 받았는지 바로 입을 여는 최성건.
“어어 오늘 퀵 3개 왔죠? 응 몇십 분 있다가 하나 더 올 거거든? 총 4개 챙겨서 내 방 책상에 올려둬요.”
할 말을 다 한 최성건이 전화를 끊었고 택시 기사에게 읊조렸다.
“사장님 빨리 좀 부탁합니다.”
이후 몇 시간 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장소는 한 공중파의 라디오국. 총 4부에 걸친 보라 게스트 출연을 마친 강우진이 진행자와 스탭들에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고생 많으셨어요 우진씨!”
진행자의 인사를 받은 우진이 부스를 나왔다. 바로 달려드는 작가들. 한 손에 종이와 매직을 들고 있다.
“우진씨 사인 좀 해주세요.”
“네 물론이죠.”
부스 안을 보니 게스트로 참여한 연예인들의 사인이 많았다. 뭐 그런갑다 싶은 그가 이젠 좀 익숙해진 사인을 휘갈겼다. 다만 한 장이 아니었다.
“저도 부탁드려요!”
“저도저도! 저도 팬인데 제 동생이 지인짜 팬이라서요.”
“예예 주세요.”
“감사합니다! 참참 우진씨 오늘 청취자들이 목소리 좋다고 난리였던 거 보셨어요?”
민망함을 애써 숨긴 우진이 총 5장의 사인을 묵묵히 마쳤다. 그런 뒤에야 부스를 나올 수 있었다.
복도엔 꽁지머리 최성건이 웃고 있었다.
‘일 있어서 빠졌다 싶더니 그새 복귀하셨네?’
여기서 왜인지 최성건이 강우진을 재촉했다.
“애들은 차에 있다 다음 스케줄 취소됐으니까 퇴근하면 돼. 후딱 가자고.”
“네 대표님.”
낮게 답한 우진이 속으로 갸웃했다. 원래 이런 분이 아닌데? 그러다 직감했다.
“아.”
이 양반이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
“혹시 다 구하신 겁니까?”
부탁한 것을 다 모았냐는 물음. 그러자 김이 좀 샜는지 최성건의 얼굴에 약간 아쉬움이 묻었다. 아니 많이 묻었다.
“에헤이- 차에서 서프라이즈로 딱 줄라고 했드만. 눈치 빠른 놈. 그래 다 구했다.”
그런 것 치곤 너무 티가 나셨는데요? 뭐가 됐든 최성건의 능력은 진짜였다. 진짜 그 4작품을 하루에 다 모으다니.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는 강우진.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대신에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물론 최성건은 감사를 거절했다.
“하지마 하지마 아침에도 말했잖아. 내가 무슨 큰일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런 건 네가 해준 거에 새 발의 피니까 팍팍 시켜도 된다이?”
세상 든든한 우진이었다.
이어 몇 분 뒤 우진은 방송국 주차장에 세워진 승합차에 올랐다. 늘 그가 타는 자리 옆에 대본 시나리오 4권이 쌓여있다. 곧바로 그중 하나를 집는 강우진. 그런 우진을 룸미러로 힐끔하는 최성건이 만족스런 얼굴로 물었고.
“어이구 바로 읽어 볼라고? 너답다 진짜.”
장수환에게 출발하란 손짓을 던졌다.
“가자 바로 우진이 퇴근시키면 돼.”
“옙!”
스르륵 출발하는 승합차. 그와 비슷하게 우진이 오른쪽 한예정의 눈치를 살피며 검지를 들었다.
-푹!
대본에 붙은 검은 사각형을 찌른 것. 그대로 아공간 진입. 바로 퇴장을 외치고. 이것을 총 4번 정도 반복한다. 꽤 많은 변화가 생기는 중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고.
‘다 됐어 다음은.’
작품을 모조리 리스트업한 강우진이 재차 아공간에 몸을 던졌다. 좀 고됐는지 작게 심호흡하던 우진이 몸을 돌렸다. 둥둥 뜬 흰 사각형이 단숨에 늘었다.
“보자- 결과는 어떤가.”
원래 있던 것은 필요 없었다. 강우진이 필요한 건 직전에 리스트업한 것들.
-[8/시나리오(제목: 자만추) F급]
-[9/시나리오(제목: 검사사용법) F급]
-[10/대본(제목: 로얄컴퍼니 1화) C+급]
-[11/시나리오(제목: 어게인 맨) C급]
결과는 단숨에 확인됐다. 딱 두 작품만 정확하게 F급이었다. 나머진 평범. 그리고 그 두 작품은.
“둘 다 서채은 거지?”
서채은의 영화였다. 금세 강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느낌이 맞았네.”
그저 찍은 거였지만 우연이든 뭐든 정확히 들어맞았다. 즉 용의자는 서채은일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이유야 간단했다. 아무리 망한다 한들 영화 두 개다 F급이 뜨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서채은은 탑배우였다.
그리고 두 작품엔 그녀 말고도 다른 탑배우나 연기파 배우도 출연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F급? 이건 살짝 고개가 갸웃해질 만한 수치. 뭣보다 우현구 감독 일로 F급이 어느 정돈지 파악했다.
‘제작 자체가 미끄러지거나 아예 망했을 때.’
F급은 그야말로 나락 그 자체. 즉 서채은의 이 두 영화는 관객수로 따지면 10만 이하 또는 몰락한다는 뜻. 그런데 하필이면 서채은이 나온 영화 두 개다 전부 F급이다?
“서채은 확정.”
용의자는 그녀가 거의 확실했다. 서채은 때문에 2작품. 아니 ‘실종의 섬’까지 총 3작품의 등급이 골로갔다.
“‘실종의 섬’만 D인 건 서채은이 뒤늦게 합류해서인가?”
다른 두 작품은 이미 촬영을 끝냈거나 크랭크업에 가깝다. 그러니 피해로 보면 막심했을 것. 어쨌든 용의자는 서채은으로 좁혀졌다. 물론 아직 그녀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까지 알아내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여기서 강우진은.
“내가 뭘 하겠냐. 토스해야지.”
일의 마무리를 넘겨야 했다. 어떻게? 착각과 컨셉에 기대야지 뭐. 곧 강우진이 아공간에서 빠져나왔고 승합차로 돌아왔다.
뒤로 우진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까지 1시간이 걸렸다.
-끼익!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오빠 고생 많으셨어요-”
“우진아 푹 쉬어라!”
바로 던져지는 인사들. 다만 강우진은 무심한 표정으로 최성건을 불렀다.
“대표님 잠시.”
“어? 어어어. 말해. 왜? 대본 더 필요해?”
“아니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밖에서요.”
“밖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변한 최성건이었으나 일단 차에서 내렸다. 강우진도 마찬가지. 이어 승합차에서 몇 걸음 떨어진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우진이었고.
“대표님 서채은 선배님이요. 좀 쎄합니다. 느낌이 안 좋달지.”
“뭐?? 그게 뭔 소리야.”
강우진이 착각을 이용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짙은 포커페이스를 장착했다. 심각성을 증폭시키기 위해서.
“그냥 우현구 감독 때와 비슷합니다.”
때문일까?
“···어?”
최성건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확장됐다.< 위협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