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2 책임과 의무 (5)
사람의 인상이라는 게 있었다·
다르게 일러 ‘아우라’라 혹은 ‘분위기’·
구체적인 형상은 없으나 누구도 그것이 실존함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인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가령 심보가 고약한 사람의 주름은 그가 인상을 지어온 세월만큼 고약하게 파인다·
평생을 웃은 사람은 웃음기가 주름으로 남아 호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분위기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정으로 삼아 깎는 조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돌변한 엘릭의 인상은 남달랐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드러나는 면모는 직전과 그다지도 큰 차이가 있었다·
위빈 부부가 보기에 엘릭의 분위기는 날카로웠다· 까칠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꼭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예리한 날붙이와 닮아 있었다·
사람을 죽일 것 같은 혹은 죽여본 듯한 분위기·
사실이었다·
엘릭은 아주 많은 사람을 죽였다·
또한 그런 살행이 대수롭지 않은 곳에서 기억하는 생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그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살아있는 이의 피와 살을 취해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금전과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일이 크게 대수롭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엄밀히 말하여 그는 살인귀였다·
실제로 귀신처럼 악랄하게 검을 휘둘러 ‘검귀’라는 별칭까지 생긴 사내였다·
평생을 그런 일과 연관되어 본 적 없던 위빈 부부가 변한 엘릭의 분위기에 긴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분위기라는 것이 결국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은 친절할 것 같다’ 혹은 ‘저 사람은 위험해 보인다’라는 생각의 연장선이 아니던가?
그런 기질의 파악 능력은 사회를 겪고 여러 사람을 만나며 더욱 굳건해지는 법이다·
귀족으로서의 삶을 살아 평생 남의 표정을 뜯어보며 살아온 그들로선 엘릭의 변한 기질이 더하면 더 했지 덜 느껴지진 않았다·
“어쩔 수 있냐 물었소· 답해보시겠소?”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무심코 움츠러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야 극명히 갈리는 어떤 인종의 특성이 있었다·
그것은 살아온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엘릭이 활약했던 전장의 병사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검에 찔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폭력은 자비와 멀다는 것을 알고 엘릭의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알기에 그가 나타나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만 위빈 부부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폭력과 가장 먼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격식 없는 어조를 비난해도 물리적으로 해하지는 않는 사회에서 살았으며 폭력을 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를 살았으며 혹여 있는 갈등조차 혀를 놀려 해결하는 사회를 살았다·
그들은 폭력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모른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는지를 모르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간단하게 처리되는지를 모르고 그런 일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음을 모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그런 말이 왜 나오겠는가· 강아지 따위가 저보다 곱절은 큰 범을 두고도 왜 짖어대겠는가·
살기가 낯선 것이다·
몸을 바짝 굳게 하는 첨예한 분위기에 두려움보다 자존심의 상처를 느끼는 것이다·
평생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강아지는 범 또한 여느 커다란 인간들처럼 제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여겨버리는 것이다·
위빈 부부가 그랬다·
“지금 말 다했소!”
외치는 말은 이제까지 중 가장 언성이 높다·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가득 찌푸리는 모습은 의심할 여지 없는 위협의 의사였다·
움츠러들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부끄러워 본능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느냐 뽐내는 강아지의 발악이었다·
그리하여 상처 입은 자존심을 핥아 자위하는 행위였다·
그것이 엘릭과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다 했다면 어쩔 것이오?”
엘릭은 평온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표정은 험악하지 않았으며 엉덩이는 여전히 소파에 파묻혀 있었다·
엘릭은 조셉처럼 언성을 높이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욱 간결하고 확실한 방도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무기를 빼어 상대를 해하면 된다·
그러니 괜한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양상을 엘비스 그레이엄의 언어로 표현하면 그랬다·
-맹수는 권위를 뽐내지 않는다네· 뽐내야만 드러나는 것은 권위가 아님을 알고 있거든·
언젠가 사냥제에서 그를 호위하며 엘릭이 들었던 말이었다·
이제 엘릭은 소년 때와 다르게 여유가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내 묻겠소· 유산의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당신들에게 있소? 감정적인 근거가 아닌 법적 근거를 말하는 것이오·”
실제로 엘릭이 유리했다·
엘릭은 이 유산의 상속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고인의 의지에 이들이 무어라고 개입을 할 수 있겠나·
이들의 속셈 정도야 이미 훤히 드러나 있는 상태다·
10년 전에 비해 화려해진 복장 눈이 벌개져서 유산을 노리는 모습 그리고 그들이 보이는 일말의 초조함·
이들은 금전에 허덕이고 있었다·
“없소?”
그리고 유산이 아니더라도 엘릭은 이들에게 갑이었다·
“없구려·”
포트먼은 위빈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돈줄이다·
그리고 포트먼의 장자인 엘릭은 그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엘릭이 마음만 먹으면 이들을 굶겨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엘릭은 위빈 영지에 남아있을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지만 이들이 그걸 알 리는 없었다·
위빈 부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엘릭은 싱긋 웃었다·
“과한 탐욕 역시 당신들이 부리고 있는 것 같소·”
“이런 썩어빠질····”
“입조심 해야 하지 않겠소·”
흠칫 조셉 위빈의 몸이 떨렸다·
공포나 위기감은 때때로 이성으로 직결된다·
머리가 차갑게 식히며 감정에 휘둘릴 땐 몰랐던 사실을 속삭여준다·
어리숙한 면모나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 이길 수 있는 상대라 여겨 언성을 높였지만 그가 이리 이성적으로 나오면 벌벌 기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조셉은 그제야 그 사실을 되새겼다·
엘릭은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10년간 가출했으나 나는 포트먼이오· 부친이 유산의 상속자로 지정한 것은 나요· 그리고 당신들은 포트먼의 돈으로 먹고살고 있소· 그런 걸 내 입으로 하나하나 다 말하지 않아도 당신들은 이해하리라 생각하오·”
문득 엘릭은 헛웃음이 삐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한데 생각해보니 우습구려· 애초에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내 부인 밖에 없지 않소? 그걸 당신들 것이라 여긴 저의가 뭐요? 왜 키워준 값이라도 받고 싶었소?”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10년 전 엘릭으로 하여금 가출을 결심하게 한 결정적인 말이었다·
-키워준 값을 하거라·
이들이 실제로 티리아에게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겠지만 태도만 봐도 얼추 보이는 것이 있었다·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다 한들 그녀는 이들의 태도에서 그런 기색을 느꼈으리란 것이다·
동질감은 이입의 좋은 재료였다·
이윽고 떠오르는 것은 자기만족에 가까운 복수심이었다·
“먹여준 값을 하시오· 괜한 욕심은 부리지 말고·”
그가 아는 말 중 가장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말은 부친의 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엘릭은 그리도 증오했던 부친의 흉내를 내버린 것이다·
“가보겠소·”
딱 하고 엘릭은 지팡이를 짚으며 응접실을 나서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내가 누군 줄 알고···!”
끝까지 주먹은 휘두르지 못하는 조셉이 발악하듯 외쳤다·
엘릭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울긋불긋한 얼굴이 어딘가 초라하다·
엘릭은 웃으며 말했다·
“해보시오· 뭐든· 기대하고 있겠소·”
끝까지 엘릭은 여유롭게 응대했다·
저리 말해도 여전히 위협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혹여 뒤통수를 치기 위해 발악해보려 한다 해도 글쎄····
저들이 서부의 전장보다 지독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하나만 알아두시오· 나는 두 번 참는 걸 좋아하지 않소·”
그 말을 끝으로 엘릭은 응접실을 떠났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아아아아아악!!!
계집아이처럼 가녀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마차는 다시 포트먼가로 향했다·
엘릭은 가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위빈 가에서의 일을 되새겼다·
차오르는 것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이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염치도 없지·’
솔직히 그들을 그리 대하긴 했으나 엘릭이 생각기로 본인이 그들보다 나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렴 티리아에 관해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지 않나·
그녀가 이미 저택을 떠났으리라 생각했다 한들 그게 변명이 되겠는가·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비겁한 자위행위나 다름없었다·
하면 그들과 달라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겠나·
“···잠시 멈춰주시게·”
엘릭이 말하자 마차가 멈췄다·
포트먼 가의 밀밭이었다·
티리아가 있었다·
한창 밀을 살피던 티리아의 시선이 엘릭을 향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다시 일을 보려는 듯 몸을 돌렸다·
엘릭은 마차에서 내려 그녀에게로 향했다·
밀밭의 흙이 마차길과는 달라 움직이는 데 꽤 불편했다·
“이보시오·”
차마 그녀를 부인이라 부르기엔 염치가 없다 느껴지는지라 그리 불렀다·
티리아가 다시금 엘릭을 바라봤다·
의아함이 묻은 답이 돌아왔다·
“예·”
무뚝뚝한 모습이 어찌 직전 보고 온 부모와 이리 차이 나는지·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평소보다 덜 긴장되는 것은 그런 이유일지도 몰랐다·
엘릭은 평소 그녀를 대할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미소로 말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을 함께하지 않겠소? 꼭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는 지라·”
“이곳에서 말할 수는 없는 일인가요?”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소·”
조금 긴장되었다·
소박맞으면 어떡하나 하는 괜한 걱정도 있었고·
하여 엘릭은 조마조마하게 그녀의 입술이 열리길 기다렸고 그 끝에 돌아온 답에 안도했다·
“조금 늦은 시간도 괜찮다면· 그리하시지요·”
엘릭의 인상이 조금 더 환해졌다·
“고맙소· 그럼 저녁에 뵙지·”
결자해지라 했다·
매듭은 묶은 이가 풀어야 하는 법 아니겠나·
엘릭은 오늘 밤 10년 전 그리 떠난 일에 대해 사과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