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샤의 쌍둥이 왕자에 관한 이야기는 대륙 전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왕세자 리하르트 디샤와 그의 그림자인 천익 린다로스 디샤·
최초의 둘은 쌍둥이를 불온의 상징으로 여기던 디샤의 풍습에 따라 하나를 살리고 하나를 죽여야만 했다·
선택된 것은 왕세자 리하르트였다·
린다로스는 요람에 잠든 채 약에 취해 죽었어야만 했고 그 일을 맡았던 유모의 동정심으로 빼돌려져 왕자의 신분을 숨긴 채 15년간 뒷골목을 전전했다·
하나 특별한 점은 그에게 ‘무재’가 있었다는 것·
린다로스 디샤는 태생이 그래서였는지 남들에게 스스로의 기척을 죽이는 일에 능했다·
그 재주를 살려 어린 암살자가 되었고 불과 15세의 나이에 뒷골목의 주인이 됐다·
왕세자와 암살자 그리도 달랐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어떤 귀족의 의뢰였다·
[왕자를 죽여주시오·]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 전쟁 싸움에 그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린다로스는 기꺼이 그 임무를 맡아 리하르트의 침소에 잠입했고 그의 목젖에 단도를 찔러넣으려는 순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똑같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린다로스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게 했다·
마침 눈을 뜬 리하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똑 닮은 얼굴 숨 그러나 다른 행색·
리하르트는 자신을 대신해 죽었던 동생을 다시 만나 눈물을 흘렸고 린다로스는 자신에게도 혈육이 있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날 하나의 언약이 체결됐다·
“나의 모든 숨을 바쳐 너를 지켜줄게·”
“그렇다면 나는 네가 왕족으로서 살 수 있게 해줄게·”
천익(天翼)·
하늘의 날개 디샤의 주인인 리하르트를 진정으로 왕이 되게 만드는 검의 이름·
린다로스는 그런 이름을 지고서 또한 리하르트의 그림자가 되어 평생의 충성을 다짐하여 왕족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두 사람이 18세가 되던 왕위 계승식에서의 일이었다·
과정에서 세간은 그 주인을 모르는 ‘월영’이 탄생했으나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
여하튼 핏빛 길을 지나와 그렇게 겨우 재회라고 드디어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된 두 형제는 자신들이 걸어왔던 인생을 온 세상에 알렸다·
거기까지가 엘릭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에 하나 더 오늘 엘릭은 그를 마주하고서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죽으려는 것이오?”
천익 린다로스 디샤는 죽기 위해 이 자리에서 섰다·
그러지 않고서야 암살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렇게 정면으로 부하도 없이 홀라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린다로스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공세를 취할 뿐이었다·
“말해주지 않을 것이오?”
“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엘릭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눈뿐이었다·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매에 맺힌 것은 결의였다·
“팔 한 짝 그 정도는 가져갈 수 있겠지·”
직후 린다로스의 신형이 흐려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엘릭의 허리춤이었다·
*
어렵지 않은 이야기였다·
검귀 카샤의 팔 한 짝을 가져간 채 죽는다·
그리하면 충분한 용도를 다한 자신의 목숨값으로 볼모가 된 왕 리하르트를 구할 수 있었다·
아니 리하르트뿐만 아니다·
왕비와 조카들까지 구할 수 있다·
이 세상 유일한 보물을 숨을 다해 구해내는 것이다·
언젠가 했던 언약대로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너를 지키기 위해 살겠다는 그 약속대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래야 했다·
챙!
그래야 했건만 벽은 너무 높았다·
철컥·
린다로스의 목에 칼날이 닿았다·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언제든 자신의 목을 베어낼 수 있음을 시인할 뿐·
‘왜?’
어떻게 이런 구도가 된 것이지?
린다로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빈틈을 보였던 카샤의 측면으로 이동해 그에게 단도를 찔러넣었고 그 순간 카샤는 심장을 찔려서 그걸 막더라도 팔을 찔려서 중독되어야만 했다·
한데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검을 찔러 넣었다’와 ‘역으로 당해 목에 칼이 겨눠졌다’ 사이의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가해함을 마주한 린다로스는 멍하니 카샤를 올려다봤다·
그는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오· 과정을 베어낸 것이니·”
“과정을 베었다?”
“말해도 모를 것이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는 그리 말하고 검을 거뒀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은 분명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린다로스는 그것조차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왜지?”
“음?”
“왜 죽이지 않은 거냐· 나를·”
그제야 카샤가 돌아봤다·
그는 조금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 덕에 만난 좋은 인연이 있거든· 보답이라고 생각하시오·”
“인연···?”
“그걸로도 모자라다면··· 그래· 홀로 짊어지고 죽으려는 태도를 보니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소· 동질감 측은함· 그런 감정인 것으로 하지·”
혼란이 가득한 와중 카샤는 딱 한 마디를 더 남기고 떠났다·
“당신이 희생하는 것을 그들이 바라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시오· 직접 대화해보면 더 좋고·”
무릎꿇은 린다로스는 그 영문모를 말을 꽤 오랜시간 곱씹었다·
그리하다 결국 리하르트 일가가 잡혀있는 첨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알하다크 마히르는 황좌에 앉아 명상했다·
그리하면 느껴지는 것은 이 황도와 그를 둘러싼 수많은 군세의 살의였다·
손을 뻗는다 생각하면 살의를 수집할 수 있었다·
켜켜이 쌓인 살의가 육신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정신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하나 거기까지였다·
‘보이지 않는다·’
분명 이 너머에 자리하는 광경이 있을진대 그것이 안개에 가려진 듯 희끄무레하기만 했다·
마치 치맛자락을 흔들며 유혹하면서도 절대 곁은 내어주지 않는 요사스러운 여인의 행태와도 같았다·
그것이 갈증의 이유였다·
제국의 태자 검의 주인 그리고 검의 황좌에 올라 그 너머를 바라보기까지 한 번도 벽에 다다른 적이 없었건만 겨우 여기서 멈춰버려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지독한 절망감에 휩싸여서·
엘하다크는 그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해 황위에서 내려와 대륙을 전전했다·
방법을 찾은 것은 당대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있던 몇몇 초인을 만난 이후였다·
– 비무라? 좋지· 한번 와보게나·
그는 동부의 태양이라 불리던 기사 천제였다·
엘하다크는 그와 검을 나누던 중 문득 눈 앞의 안개가 옅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흐릿하던 실루엣이 조금 더 또렷해지는 기분·
경지 너머가 존재함이 더욱 확실해지는 감각·
그 순간 환희했다·
– 이보게! 비무는 여기까지 하세나! 자네 지금 너무 흥분···!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저 저 실루엣을 더 또렷하게 봐야한다는 생각뿐·
꽈직!
천제의 목숨은 그렇게 거뒀다·
엘하다크는 싸움이 끝나는 순간 안개가 다시 짙어짐에 곧장 다른 제왕을 찾았다·
그들 중 둘은 기꺼이 생사결에 응해 죽었고 나자크의 주인은 비무를 거절했다·
얼마나 완고한지 그 뜻을 꺾을 도리가 안보이기에 자신을 증오할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 고작 고작 비무 때문이더냐! 그깟 칼질 한 번 해보겠다고 이 많은 백성을! 그대는 황제였다는 자가!!!
그와의 비무는 특히 깊은 영감을 주었다·
상대의 살의를 자신의 살의로 도륙하는 순간 실루엣이 색채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엘하다크는 깨달았다·
살의에 차 부딪히는 검이야말로 다음 경지로 이르는 열쇠가 될 것임을·
거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제르디아 나자크와의 비무가 끝나고도 아직 경지에 미처 다다르지 못했다·
다시 그를 찾아갈까 했으나 이미 이긴 상대를 통해서는 경지의 상승을 바라볼 수 없음이 직감의 영역에서 느껴졌다·
결국 대륙을 떠돌았고 암만 해도 강자가 보이지 않아 직접 기르기로 했다·
엘릭 포트먼은 그리 만난 씨앗이었다·
– 이렇게 하면 되나?
소름이 끼치는 재능이었다·
일평생 검을 다루는 재능으로는 누구에게도 감히 밀려본 적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건만 그 어린 꼬맹이는 확신을 종잇조각처럼 구겨 던져버리는 끔찍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절망의 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저 검을 휘적이는 것만으로도 검의(劍意)에 다다르고 상대의 검을 훔쳐보는 것만으로 그 검을 체득해버리는 재능·
엘하다크는 엘릭을 인간이라 말할 수 없었다·
‘추월당한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환희를 느꼈다·
엘릭이 자신과 같은 경지에 오른다면 그리하여 살의로 서로를 베어낸다면 그 순간 확정적으로 경지 너머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마침 엘릭을 찾기 전 토양을 빚기 위해 일으켜둔 전쟁이 있었다·
꼬맹이의 발칙한 성격을 보면 언젠가 돌출되어 그 전쟁에 참여할 터였다·
그렇다면 완성되겠지·
고대하며 살았고 과정에 비틀거림이 있었으나 다 잡았다·
그리하여 오늘이었다·
“왔는가·”
대전의 문을 열고 엘릭 포트먼 검귀가 들어온다·
엘하다크는 피부가 저릿해지는 살기를 그리고 아득한 마나의 진동을 느꼈다·
미소가 떠올랐다·
엘하다크는 황좌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이 자리····”
“좆같은 소리나 할 거면 집어치우시오·”
엘릭이 말을 끊고 검을 뽑았다·
“노망이나 날 것이면 목매달고 뒤지기나 하지 꼭 험한 꼴을 보시는구려· 빨리 끝냅시다· 내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그의 몸 위로 황금색의 마나가 물씬 일렁였다·
붉은 눈동자가 금빛으로 덧씌워졌다·
삐뚜름한 미소로 그가 말했다·
“이렇게 보니 참····”
서걱―
“···당신도 별것 없구려·”
엘하다크의 왼쪽 귀가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