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8 #후일담1 – 새로운 가족 (4)
페르딘 왕국은 동부의 여러 국가 중에서도 약소국에 속하는 작은 나라다·
장점은 드넓은 곡창지대 단점은 그 외의 모든 것·
국력이 약해 외교관계에 소극적이다·
그런 일로 꽤 오랜 수모를 겪어온 까닭에 무력에 대한 갈증이 있다·
엘릭도 이미 아는 사실·
왕가는 자신이 계속 페르딘에 남아 있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걸 알긴 하는데····’
그렇다고 이리도 어린아이에게 이런 일을 넘겨주면 어쩌자는 건지·
엘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기야 대충은 알 듯하다·
아마 서부의 손님들이 몰려오는 것에 화들짝 놀란 왕실 대전에선 누구를 보내 상황을 정리할지에 관한 토론이 있었을 것이다·
왕이 직접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니 제외 고위 귀족들은 혹여 자신의 눈 밖에 날 것을 염려해 나서지 않았을 테고 왕녀는 이곳에 보내는 것만으로도 여러 정치적 혼약에 관한 구설수가 나돌 테니 또 제외·
남은 게 왕세자였을 것이다·
페르딘에서 태어난 아이는 15세부터 대외활동을 시작한다·
마침 세자로서의 첫 임무라는 좋은 변명도 있지 않았겠나·
엘릭은 접견실 맞은편에 앉은 왕세자를 살폈다·
자신이 작은 움직임만 보여도 히끅히끅 방금처럼 한숨을 내쉬며 ‘흡!’ 숨을 멈춘다·
겁이 많아 보인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예전부터 들려온 말이 이번 대 왕세자가 참 유약한 성격이라지 않던가·
물론 이런 평화의 시대라면 그런 성정이 장점이 되리라·
하지만 적어도 국가의 다음 주인으로서 가신에게 보여선 안 될 모습이다·
“왕세자 저하 고개를 드시오·”
엘릭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후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찌 고작 남작의 앞에서 세자께서 고개를 숙이시오· 조금 더 당당하셔야 하오·”
구태여 말투를 더 공손히 하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럼에도 예를 차리는 것은 포트먼 남작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알아서·
엘릭이 존중을 담아 말하자 왕세자의 고개가 들렸다·
작년 봄 영주 취임식 때 보았던 왕녀와 꼭 닮은 세자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서렸다·
“나 남작···?”
“내가 남작이 아닌 검귀로 느껴지실 수 있을 터요· 실로 외부의 수많은 이들이 그리 나를 바라보지· 하지만 페르딘의 왕세자가 아니오· 세자라면 조금 더 당당히 고개를 드셔야 할 것 아니오?”
“그 그것은····”
엘릭은 큭큭 웃음을 흘렸다·
“겁먹지 마시오· 또한 왕성에는 잘 전해주시오· 이곳에 온 손님들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갈 것이며 나 또한 구태여 건드리지 않는다면 페르딘의 귀족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그제야 왕세자의 얼굴에 안도나 기쁨 같은 것이 서린다·
그 속내야 정확히는 알 길이 없지만 어찌 되었든 일이 잘 끝났다는 마음이 우선되어 있겠지·
“그 그럼····”
“돌아가시오· 왕국까지는 열차로 하루면 갈 테지· 내 와이트 공작에게 말해 1등석의 좋은 자리를 구해주겠소·”
말하자 세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남아 중 철도에 흠뻑 빠져있는 이들이 몇 있다던데 세자가 그런 부류인 듯하다·
막 자리를 정리하기 직전 엘릭은 한가지가 더 생각나 말했다·
“아 그리고 작위는 더 안 받을 것이니 그만 보채라고 좀 전해주시오· 더 권유했다간 정말 나라를 뜨는 수가 있소·”
세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고개는 위아래로 미친 듯이 끄덕여졌다·
이것으로 모든 상황 정리는 끝·
“좋소· 가시오·”
“예···!”
세자는 그렇게 왕성으로 돌아갔다·
*
갑작스러운 손님들의 집결에 인 소란은 빠르게 그쳤다·
“이제 다들 갈 길 가시오· 선물은 잘 받았소·”
엘릭은 영지를 위해서라도 이들을 빨리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말했다·
이그렛이 크게 아쉬워했으나 다른 이들은 모두 수긍 그렇게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아 여기다 마탑이나 하나 지을까·”
끝끝내 달린을 향해 미련이 뚝뚝 떨어지던 이그렛이 말했고 에드워드가 그녀를 말렸다·
“누 누님· 그러다 정말 마탑주님 쓰러지시지 않겠습니까···?”
“엄마도 나 포기했어· 괜찮아·”
“그게 진짜 안 괜찮은 건데·”
“허허! 염화께선 효도도 불같이 하시는구려!”
“종교쟁이야 지금 뭐라고 했니?”
“다들 아가 앞에서 뭐하는 짓이더냐· 그만두고 가자꾸나·”
제르디아가 상황을 정리하며 그제야 이별·
“건강한 모습을 보니 좋군·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나자크에도 들르시게·”
“그리하지·”
그들은 찾아왔을 때처럼 몰아치듯 사라져버렸다·
정말 폭풍 같았던 순간의 연속이라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와중·
“그래서 자네는 왜 안 가고 있나?”
“아하하 참 너무한 말이군!”
엘릭은 눈을 좁힌 채로 휠체어에 앉아있던 엘버스를 노려봤다·
다른 이들과 함께 찾아와 유독 조용히 있더니 아직까지 떠나지 않고 있는 게 괜히 수상한 까닭·
하지만 그 의심은 이내 잦아들었다·
“피난 왔네!”
“?”
“아내에게 크게 혼이 났거든! 나 참 근래 들어서 유독 신경질이 많아진 것 아닌가?”
뒤통수를 긁으며 해맑게 웃는 엘버스의 모습에 참 어이가 빠지는 기분이다·
“보통은 그걸 피난이 아니라 가출이라 한다네·”
“가출이면 뭐 어떤가·”
“나이를 그렇게 먹고 가출이 하고 싶나?”
“가주 당신이 할 말은 아닙니다·”
흠칫 티리아의 일침에 엘릭이 몸을 떨었다·
자연히 슬금슬금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많은 말을 참는 얼굴이었다·
엘릭은 할 말이 궁해졌다·
“꺄웅!”
달린이 손을 허우적거렸다·
분위기가 조금 환기되는 중 엘버스가 말했다·
“참 어여쁜 아이오·”
싱긋 웃으며 말함에 티리아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문득 느끼길 두 사람 사이가 참 서먹서먹하다·
엘릭은 쉬이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고 영 모를 것 같기도 했다·
하기야 남편의 친구를 보는 아내의 마음을 사내인 엘릭이 알 길이 있겠는가·
뭐가 됐든 당분간은 여기 있을 듯해 보이니 일이나 좀 돕게 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던 순간이었다·
“여 영주님!”
알디오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엘릭의 고개가 기우는 순간이었다·
“제 제국에서 손님이···!”
라고 말하는 순간·
쾅!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엘릭과 엘버스의 숨이 멎었다·
“여기 계셨네요· 하여튼 도망치는 것도 창의성이 없어서·”
쯧―
여인이 혀를 찬다·
북부 대설원의 빙하를 연상케 하는 차디찬 표정 이목구비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와 새하얀 머리칼·
“부 부인···?”
엘버스가 당황했다·
엘릭은 티리아와 서로를 마주 봤다·
“저분이?”
“맞소· 그 사람이오·”
아이리 그레이엄·
그 방탕하던 엘버스를 정착하게 한 여인이자 엘릭이 아는 가장 담대한 여장부·
또각또각 그녀가 구두굽 소리를 내며 엘버스에게 다가왔다·
엘버스가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물러나려 했으나 그것보단 그녀가 빨랐다·
턱!
엘버스가 잡혔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잠시 아이리가 엘릭을 봤다·
옅은 경멸이 그녀의 얼굴 위로 피어났으나 이미 익숙한 엘릭은 하하 웃으며 엘버스를 가리켰다·
그제야 아이리의 시선이 다시금 엘버스에게 닿았다·
다짜고짜 그녀는 물었다·
“변명할 말은?”
“···살려주시오?”
“그것 외에는?”
“내가 잘못했다? 근데 말일세· 암만 생각해도 부인도 잘못이 있는 듯해·”
엘버스는 그새 기색을 바꾸더니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세상에 나이프 순서를 틀렸다고 칼을 던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어이쿠야 엘릭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도망칠 만하군·’
아이리 그레이엄은 제국 제일 기사 가문의 고명딸이다·
그녀의 무력이 이미 경지에 닿아있는 만큼 칼을 던지다 실수로 누굴 맞추는 일은 없겠지만 글쎄·
당하는 입장에선 두려울 만하지 않겠나?
문득 엘버스에 대한 동정심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저 임신했어요·”
동정심이 사그라들었다·
“···음?”
“우리 아이 생겼다구요· 이 망할 인간아·”
아이리가 엘버스의 멱살을 쥐었다·
그 순간 엘릭의 머릿속에서 인과가 지어졌다·
아이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임신 상태의 여인은 아주 예민해진다·
엘버스는 그걸 못 견디겠다며 뛰쳐나왔고 결국 아이리가 그를 찾으러 왔다·
“허어 저런 상종 못할 말종이 다 있나···!”
절로 혀를 차게 만드는 엘버스의 만행에 엘릭이 크게 기함을 토하자 티리아의 눈초리가 더 따가워졌다·
엘버스는 멍해진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 위로는 기쁨과 함께 울먹임이나 멍함 그리고 당황까지 떠올랐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남편의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아이리가 보통 여인은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집에 가서 다시 얘기하죠·”
말한 아이리가 뒤늦게 엘릭과 티리아에게 예를 차렸다·
“갑작스레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이는 축하드리구요· 아무쪼록 행복하시고 남편과는 자주 어울리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폭풍처럼 몰아쳐 와 그렇게 폭풍처럼 사라졌다·
이제야 완전히 모든 손님이 떠난 순간·
“하하····”
엘릭은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에 웃으며 티리아를 바라봤다·
티리아는 단 한마디만을 더했다·
“절친한 친우라더니 하는 짓도 참 비슷하십니다·”
할 말이 궁했다·
*
몇 주 뒤 엘버스에게서 편지가 왔다·
대충 요약하자면 그랬다·
『내가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아직 잘 믿기지 않네· 당혹스럽기도 하고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해·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아 그리고 말인데·
만약 아이가 아들이라면 자네 딸과···』
부욱!
엘릭은 편지를 찢어 난로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달린의 유년기에 있던 가장 큰 사건이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