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0 #후일담2 – 포트먼의 꼬마 아가씨 (1)
전쟁이 끝나고도 4년이 더 지났다·
세상은 평화 속에서 급변하고 있었고 변해가는 문명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 시대를 과도기라 표현하며 모두가 자기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촌동네에 살면 다 먼 이야기지·”
페르딘 왕국의 위빈은 아직도 전쟁 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포트먼 가의 기사단장 다날은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벤치에 앉아 여유로운 숨을 내쉬었다·
한때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살던 때도 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지나 보니 다 추억이 된 일이다·
다날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기사 치곤 꽤 많은 봉급 할 일이라곤 농사 도우미가 끝에 별달리 변화라곤 없는 동네다 보니 새로이 뭔가를 배울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요즘이 행복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장! 또 편지 왔습니다!”
“오오! 그래?!”
다날은 벌떡 일어나서 베론이 가져온 편지를 낚아챘다·
다날의 인중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이런 게 낭만이지·
그것은 냇가를 지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유리통 속 편지로부터 이어진 인연이었다·
[이 편지를 발견하는 분은 XX로 답장을 주세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여성스러운 필체로 쓰인 누가 봐도 여성이 쓴 편지에 장난으로 답을 줬던 것이 오늘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
‘나도 연애 좀 해봐야지!’
나이가 올해로 서른둘 결혼하기엔 꽤 늦은 나이지만 나이 빼고는 다 정정하다!
아무렴 돈도 있고 직장도 있고 명예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상대는 참 여성스러운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요즘은 연애 소설에 푹 빠져 있어요· 가만 읽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달까요?]
‘이게 그 플러팅인가 하는 그거지?’
당신과 연애하고 싶다는 얘기를 애둘러 말하는 게 아닐까·
다날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인을 두고 이렇게까지 설레다니·
아니 얼굴을 몰라서 설레는 건가?
아무튼 좋다·
‘빨리 답장을···!’
하며 발걸음을 보채는 순간이었다·
바스락!
수풀이 들썩였다·
다날은 덜컥 멈춰서 수풀 쪽을 바라봤다·
바스락!
또 수풀이 들썩인다·
작은 동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날은 알았다·
저기서 ‘히히!’ 하며 웃는 조막만 한 아이는 근 몇 년간 포트먼 가에 있었던 가장 큰 변화이자 이 마을의 사고뭉치라는 것을·
다날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고~ 수풀이 왜 들썩이지~? 귀신이라도 나온 건가~?”
작위적인 말투였으나 괜찮았다·
“야옹~·”
아가씨는 그런 걸 눈치챌 정도로 똑똑하지 못하니까!
“아이고! 고양이었네~·”
다날이 답한 순간이었다·
“꺄우! 깜짝 놀랐지!!!”
바스락!
수풀을 헤치며 나오는 것은 다날의 무릎에나 겨우 올 키를 가진 빵실빵실한 여자아이였다·
갈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풀잎색 눈동자를 빛내는 모습에선 조금의 그늘도 찾을 수 없다·
유독 천진해 보이는 인상이라 더욱 그리 보이는 것이겠지·
분홍색 드레스는 아가씨가 가장 좋아하는 보물 중 하나다·
그런 것들을 다 확인하고 나서야·
“으악! 아가씨다!”
“어흐으응!!!”
다날은 놀라 자지러지는 연기를 했다·
풀썩!
바닥에 쓰러져 기절한 척을 하니 아가씨 달린 포트먼이 흥! 콧방귀를 뀌면서 뺨을 붉혔다·
뒤늦게야 유모와 하녀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 아가씨! 또 언제 나가셨어요!”
“아가씨 아니야! 단닌이야!”
“정말이지 어떻게 이렇게 사람 눈을 잘 피해 다니시는지 모르겠네····”
유모가 한숨을 내쉬며 달린을 안아 들었다·
다날은 이유를 알았다·
‘그럼 괴물이 낳은 자식인데 사람이 나오겠수?’
달린 포트먼은 무재를 타고났다·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 즉 마나를 다루는 기사라면 모두가 그 압도적 재능의 차이에 절망해버릴 정도의 재능을 말이다·
그게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저놈의 아가씨는 일반인이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주변 마나를 뒤틀어 인지를 흐리고 있었다·
그게 다날이 어린 꼬마아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 잘해줘야 커서 보복을 안 당하지· 그리고 친해져야 퇴직금도 든든하게 챙겨줄 거 아니야?’
다날은 노후를 착실히 준비 중이었다·
“다난! 안냥!”
달린이 혀짧은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실눈을 뜬 다날은 헤실헤실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그렇게 달린이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
‘막사나 가자·’
다날은 편지를 소중히 품고 막사로 들어갔다·
*
달린은 이름이 아주 많았다·
하녀들에겐 ‘우리 이쁜 아가씨’였고 마을 사람들에겐 ‘어이쿠 사고뭉치 아가씨’였고 부모님껜 ‘우리 보물’이었다·
하지만 달린은 멍청하지 않았다·
자신의 진짜 이름은 ‘달린 포트먼’이었다·
하여 달린은 언제나 말했다·
“아기씨 아니야! 단닌이야!”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다날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자신을 ‘아가씨’라 부른 유모에게 엄포를 놓은 달린은 슬금슬금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곳에 부모님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영주님과 마님은 지금 아주 바빠요· 곧 수확철이거든요·
라는 유모의 당부가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달린은 어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놀고 싶었다·
히히 웃으며 살금살금 집무실의 문 앞으로·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후·
“꺄웅!”
하며 문을 열자 집무실의 풍경이 보였다·
창가 자리에 부모님이 계셨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보물!”
“아가 왔구나·”
엘릭과 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달린은 헤실헤실 웃으며 달려가 두 사람에게 안겼다·
“어이쿠!”
엘릭이 달린을 받아내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하고선 등을 두드려주는데 달린은 그게 너무 편안해 엘릭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그래 오늘은 무얼 하고 놀았니?”
“다난 깜짝 놀라기!”
“기사단장을 놀래켰구나· 잘했다·”
“여보?”
티리아가 눈치를 줬으나 엘릭은 못 본 척했다·
보통은 이런 구도였다·
그저 달린이 씩씩하길 바라는 엘릭은 달린이 뭘해도 칭찬했고 티리아는 그런 달린에게 해선 안 되는 일을 가르쳤다·
“아가 남을 괴롭히는 건 못된 짓이란다·”
“재민는데!”
“그래도 안 돼·”
달린의 뺨이 부풀었다·
시선은 자연히 편을 들어주는 엘릭을 향했다·
엘릭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우리 딸이 심심했나보구나·”
“웅!”
“그럼 아빠랑 놀러 나갈까?”
“웅!”
“여보!”
“딸아이가 심심하다 하지 않소·”
달린은 이럴 때 해야하는 일을 알았다·
“단닌 엄마랑도 놀고 시픈데····”
우는 시늉을 하면 된다·
티리아의 얼굴 위로 당황이 피어올랐다·
이윽고 나오는 것은 헛웃음이었다·
“요 작은 것이 벌써부터 잔꾀만 부려서는· 꼭 아버지를 닮았구나·”
“···부인?”
“그래 가자·”
“꺄!”
달린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
달린은 올해에 들어 겨우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자신이 다칠 것은 염려한 유모가 저택 안에서만 돌아다니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달린이기에 이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아아아····”
황금빛 밀밭·
꼭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닮은 거대한 세상이 달린을 집어삼켰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것은 꼭 아버지의 눈동자를 닮은 빛이었다·
“이게 모야···?”
하며 혼이 빠져 묻자 엘릭이 답했다·
“밀밭이란다· 우리 위빈이 한 해 동안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가족·”
엘릭이 밀대 하나를 꺾어 달린의 손에 쥐여줬다·
달린은 꼬물꼬물 밀대를 꼭 쥐곤 이삭을 바라봤다·
동글동글 알에 보송보송 털이 나 있다·
이파리가 맨들맨들하게 나 있었고 풀내음이 한가득했다·
“가족!”
하며 밀대를 높이 들자 엘릭이 달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아주 고마운 가족이지· 아빠와 엄마가 어릴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우리를 지켜준 밀이란다·”
“우웅!”
속이 간질간질했다·
달린은 황금빛 세상을 마주한 채로 벅차오른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밀밧아 고마어―!”
외치니 왜인지 마음속이 충만해지는 기분·
달린은 헤헤 웃으며 발을 굴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달린 우리 딸·”
엘릭이 달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딸도 크면 이 밀밭을 지켜줄 수 있겠니? 엄마와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가슴을 적신다·
달린은 노을이 묻은 엘릭의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웅!”
그리 말하지 않아도 달린은 밀밭을 지키고 싶었다·
너무 아름답고 또 고마운 밀밭이니까·
달린은 이미 이 풍경에 매료되어 있었다·
“단닌이 지키께!”
“그래 이제 조금만 걷다 들어가자·”
그렇게 세 가족은 밀밭을 거닐었다·
달린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추억 중 하나가 만들어진 날이었다·
물론 행복이 있다면 슬픔도 있는 법·
그것은 도래한 수확철이었다·
“압빠아아아아!!!!!”
달린은 오열했다·
밀밭의 밀들이 숭덩숭덩 썰려 나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