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4 #후일담3 – 몰라도 되는 이야기 (2)
경지에 오르고도 10년이 지났다·
엘릭은 이따금 명상에 빠져 있을 때면 이 세계를 이루는 규칙이 피부 위로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만 감각의 혼동이라 하기엔 너무 선연한 감각·
그렇다 해서 확실히 규명할 수 있는 정의는 없으니 의아함도 함께·
와중 엘릭이 확신한 것은 하나였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다·’
이 대륙 땅과 하늘과 바다 그 너머엔 또다른 세상이 있었다·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그곳의 인물과 교감한 것도 아니지만 확실하다·
다른 세계와 이 대륙을 연결하는 끈이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다·
엘릭은 문득 호기심에 그 끈을 건드려 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이질적인 마나 의지 그리고 감정·
‘희열? 안도? 무엇이지?’
유독 누리끼리한 연결을 매만지니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감정의 파편만으로는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너머의 세상이 안정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을 알 수 있었다·
딱 거기까지·
엘릭은 더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다른 세상에 관한 것은 일말의 호기심 정도에 지금 엘릭이 더 중요시 여겨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아빠!”
달린이 에드워드를 타고 왔다·
그 옆엔 엘버스의 딸이 에드워드에게 목줄을 채우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다·
슬쩍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자네 왔는가·”
“예입····”
많은 말을 대신한 눈빛의 교환·
그것이 이어지던 중 달린이 말했다·
“에드워드는 바보야· 다른 세상이니 어쩌니 애들이나 믿는 걸 믿어·”
“응?”
“에드워드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랑 만나봤대·”
엘릭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이 무슨 공교로운 우연인지·
“···잠시 그 이야기를 내게도 들려줄 수 있겠나?”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른 세계의 것이 이곳에 침범할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이 미지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니·
“어····”
당황하던 에드워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엘릭은 에드워드가 겪은 다른 차원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엘릭이 내린 결론이 있었다·
‘난가?’
혹시 그 여인이 찾았던 호위가 자신은 아닐까·
에드워드가 그 나이일 적 확실히 자신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
말의 맥락상 그녀가 찾는 것은 강자다·
즉 현재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신이 그녀가 찾는 ‘호위’다·
생각할 점이 또 있었다·
다시 찾아온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보아 이 연결점을 타고 그녀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엘릭의 미간이 좁아졌다·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평온이었기 때문에·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그날 밤 티리아가 물었다·
엘릭은 답했다·
“잠시 검을 좀 휘두르다 오려고 하오· 요새 영 몸을 안 썼더니 찌뿌둥해서·”
“아아··· 다녀오십시오·”
쉬이 납득해주는 모습에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곤 마수가 있는 뒷산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 안 되는 상대를 부르는 일이니 전투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다·
휙!
뒷산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일곱 번째 골짜기·
본디 클라우드 베어가 주인으로 있던 골짜기이며 이젠 엘릭이 영역의 주인이 된 공간이었다·
이곳의 모든 마수는 엘릭을 피해 다녔다·
명상에 빠지거나 누군가를 부르기엔 퍽이나 좋은 위치였다·
엘릭은 곧장 검을 뽑아 들고 눈을 감았다·
사아아―
감긴 눈꺼풀 위로 총천연색의 실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껏 굳이 시도해보진 않았지만 부르는 법은 꽤 명확하게 엘릭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그저 실에 의지를 흘리면 된다·
‘용건이 있다면 나오시오·’
유독 누리끼리한 실 느껴지는 실 중 가장 선명한 것이 그것이었다·
예상하길 이 세계와 가장 가깝게 붙어있는 세계가 그곳일 터였다·
그 세계에서 느껴지던 것은 희열 안정 신념·
부디 적은 아니길 바라며 그렇게 첫 교류의 물꼬를 튼 순간이었다·
우우웅―
공간이 낮게 진동했다·
엘릭은 긴장을 삼키며 눈을 떴다·
피부 위로 ‘반가움’이 닿았다·
망막에는 허공에 새겨진 금빛의 균열이 새겨지고 있었다·
‘···온다·’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자세가 긴장된다·
마나가 몸을 감싸 안고 여섯 번째 감각이 일깨워지며 인과의 흐름을 읽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아아··· 오랜만의 초대로구려·”
떨림을 품은 사내의 미성이 옅게 울렸다·
균열을 타고 나오는 그의 모습에 엘릭의 흰자위가 충혈됐다·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이 있었다·
다름 아닌 경멸이었다·
“당신이오? 나를 부른 사내가·”
사내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알몸에 앞치마 하나를 두른 채로·
“이런 요리를 하는 중에 나왔던 터라·”
본능적인 역겨움 거부감 그리고 적의가 치솟았다·
그것은 ‘사내’라는 종의 영역에서 뻗쳐 나오는 악의였다·
“그대 나에게 검을 겨누지 마시오· 나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으니·”
사내의 허리까지 오는 금색 장발이 휘날린다·
꽉찬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맥동한다·
그의 표정은 여유로 가득했다·
그것이
‘이 무슨 끔찍한···!’
엘릭의 속에 헛구역질을 일게 했다·
아니 그런 것보다 더욱 엘릭을 역겹게 하는 것이 있었다·
“아아 역시 이계와의 만남은 전투로 시작되는 법인가!”
그의 앞치마 앞섬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엘릭은 차마 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 사내는 기어코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기꺼이!”
촤아아악!
사내가 앞치마를 찢어 던졌다·
그의 눈에서 금빛 안광이 밤하늘을 밝힐 정도로 뿜어져 나왔다·
고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샛노란 황금빛!
형체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 정도의 압도적인 금광(金光)이 하늘 높이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그가 웅변하듯 웅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웻 – 푸씨 공주는 내게 말했지·”
그가 미소를 만개한 채 팔짱을 꼈다·
“당신은 검을 뽑아 들 때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다리를 11자로 벌렸다·
“사내끼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검으로 대화하도록 하지·”
엘릭의 위액이 역류했다·
“나 성스러운 좆의 주인 존슨 더- 빅 딕이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하오·”
역겨웠다·
너무 역겨워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고 그보다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강하다···!’
그는 강했다·
엘릭이 살아생전 마주했던 어떤 적보다 심지어 그 검제는 손가락 하나로 이길 수 있을 게 분명할 정도로 강했다·
“이런 강한 검사는 양성천마(兩性天魔) 이후로 처음이군· 잘 부탁하겠소·”
까딱 잘못했다간 죽는다·
위기감이 등골을 싸하게 타고 오르는 순간
탕!
그의 거대하고 끔찍한 금광이 엘릭에게 쇄도했다·
그날 이후 엘릭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은 그와의 첫 만남으로 영원불멸 고정됐다·
아직도 생각하길·
“그만!!!”
그 여인의 호통이 없었다면 자신은 얼마나 더 끔찍한 악몽 속에 살았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정신이 혼미해지는 끔찍함 탓에 엘릭은 그 순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 지옥같던 순간이 끝난 기점은 확실히 인지했다·
“그만!!!”
날 선 여인의 호통이었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사내는 공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으며 엘릭이 가진 모든 마나가 동결됐다·
그것은 경이적인 경험이었다·
마치 ‘이곳에선 어떤 종류의 마나도 쓸 수 없다’라고 누군가 법칙으로 새겨 강제하는 듯한 감각·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아니 설명할 수 없다·
엘릭은 드디어 에드워드가 만난 이계인이라는 것에 대해 확실히 인지했으니·
“···미안 쟤가 나올 줄은 몰랐네· 확실히 봉이··· 아니 폐쇄시켜뒀던 것 같은데·”
여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새 더 강해졌나? 아니 아니야· 연결점을 찾아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거겠지· 그럼 연결점은? 아·
“네가 했구나?”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새빨간 머리나 연분홍색 눈동자는 산뜻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었으나 그 기색이 너무 피로하여 강렬함이 퇴색되고 있었다·
“여기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나? 내 쪽에선 겨우 5년 정도였는데·”
한숨이 푹 튀어나왔다·
엘릭은 그제야 머릿속에서 사내에 관한 것을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꼴깍 마른침을 넘기며 말했다·
“···묻겠소·”
“음?”
“당신은 나를 찾아왔소?”
그녀는 빤히 엘릭을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모습이 사뭇 불량하다·
재질을 알 수 없는 후드가 달린 윗옷 그리고 반바지 탓에 그런 이질감이 더 짙어진다·
이윽고 그녀가 말하길·
“어 너 찾았던 거 맞긴 해· 언젠가는 찾아야지 생각한 것도 맞고· 뭐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나가 해방됐다·
엘릭은 그제야 몸이 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마침 잘 됐네· 온 김에 처리하고 가는 게 맞겠다· 안내해·”
“안내라니?”
“집으로 안내하라고· 여기 세워두고 얘기하게?”
턱짓으로 명령하듯 내뱉는 말이 참 자연스럽다·
엘릭은 생각했다·
부모가 누군지는 몰라도 교육 한번 기막히게 한 듯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