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 #3 수확제 (1)
식사는 그와 관련된 별말이 더해지지 않고 끝났다·
사과를 건넸다고 바로 호전될 관계는 아닌 까닭이다·
두 사람은 여전히 타인이었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만큼 나눌 대화 또한 마땅찮았다·
결국 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졌고 그렇게 식사를 끝낸 후 잠들어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일어났소·”
엘릭은 슬슬 서늘해지는 기온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일깨우니 주르륵 스쳐 지나가는 것은 지난 밤의 일이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목적지를 정했으니 시원스러운 기분 또한 있었다·
“끄응····”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다 나으면 떠나겠다 마음먹었지만 그 시간이 짧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적어도 겨울은 지내야 했다· 조금 여유를 두자면 봄에도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뭐가 됐든 그 시간 동안은 티리아를 도우며 지내야 할 터다·
이런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않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눈치가 보이지 않던가·
“들어가겠습니다·”
알디오가 문을 열었다·
그의 뒤로 선 하녀는 찬물을 가득 찬 대야를 들고 있었다·
“세숫물입니다·”
“고맙네· 가서 일 보시게·”
여전히 눈을 뜨면 남이 알아서 뭔가를 대령해주는 생활이 익숙지 않았다·
엘릭은 손을 휘저어 하녀를 내보내고 얼굴을 씻었다·
찬 기운이 정신을 완전히 일깨운다· 머리도 대충 감고 물기를 털어낸 후 옷까지 갈아입으니 비로소 나설 준비가 끝났다·
“가보지·”
“예 마님께선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쁘실 텐데·”
“식사는 가족이 모여 함께 주인님의 철칙이지 않습니까·”
엘릭은 피식 웃었다·
그랬다· 부친은 아침 식사만큼은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스케쥴 관리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라 엘릭이 그 루틴을 깨고 아침 식사 자리에 빠지면 하루종일 굶긴 일도 있었다·
그런 문화가 아직 저택에 있는 것일 테다·
“어서 내려가지· 이러다 날 다 새겠어·”
엘릭은 지팡이를 짚으며 방을 나섰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하니 티리아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좋은 아침이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티리아는 눈을 끔뻑였고 엘릭은 멋쩍게 웃었다·
전날 일도 있고 하니 참 평소처럼 대하기 뭣한데 그렇다고 다른 기색을 보일 수도 없으니 곤란한 일이다·
“앉아서 식사나 하지· 할 일이 많을 것 아니오·”
“예·”
아침 식사는 언제나 그랬듯 베이컨과 빵 그리고 계란이었다·
적당히 부담스럽지 않게 속을 채워주는 메뉴였고 달리 말해 이런 어색함으로부터 금방 해방 시켜 줄 메뉴였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식사를 시작한다· 대충 치우고 유산의 상속인 변경에 관한 것이나 알아봐야겠다·
그리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곧 수확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티리아가 입을 열었다·
“마무리까지 일주일 정도가 걸릴 듯합니다·”
“아 그렇소?”
“예·”
웬일로 먼저 화제를 꺼내는 걸까· 조금 놀란 마음에 고개를 드니 티리아는 깨작깨작 음식을 씹고 있었다·
엘릭은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여기서 뭐라고 답해야 하지?’
왜인지 그녀가 먼저 화제를 던졌으니 답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이대로 대화를 끊어버리면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으음····”
수확이라·
그 단어에 초점을 맞추니 엘릭이 하는 것은 결국 추억팔이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구려·”
“어떤 것입니까?”
“수확철엔 어른들이 모두 밀밭에 모여 일하지 않소? 그럼 남은 애들끼리 모여서 뭐하겠소· 평소 어른들 눈치를 보느라 못했던 장난이나 쳤지·”
장난··· 이라고 말했으나 꽤 위험한 일을 하고 다녔다·
마수가 종종 출몰하는 뒷산을 탐험한다거나 영지 밖으로 나가 전쟁 놀이를 한다거나·
다시 생각해보면 용케 아무도 안 죽었구나 싶은 일들이었다·
“사고뭉치셨군요·”
뜨끔 엘릭의 속이 찔렸다·
-이 사고뭉치 녀석들!
찾아갈 때마다 간식을 주던 식당 주인의 외침이 새삼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진다· 답할 말이 궁하니 손놀림만 빨라진다·
와중 티리아가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아마도 머뭇거림일 것이다· 음식을 깨작대면서 괜히 접시만 쳐다보는 걸 달리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할 말이 있으시오?”
“아·”
나이프를 쥔 손 끝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직후 티리아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말을 내뱉었다·
“혹····”
“혹?”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는지요·”
무슨 부탁이기에 저리 조심스레 말하는 걸까·
엘릭은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시오· 할 수 있는 선에선 최대한 돕겠소·”
“수확제 관련입니다·”
“수확제라····”
기억 속에 있는 일이었다·
위빈의 수확제는 밀의 수확이 끝나는 날을 기점으로 약 나흘간 이어지는 축제였다·
영지에 술과 곡식을 풀어 한 해 동안 고생한 영지민을 치하하는 행사인데 그 일을 주관한 것이 바로 부친이었던 게 아닌가·
썩 좋은 기억은 없었다·
엘릭의 기억 속 수확제는 특히 부친의 관심이 멀어지는 시기였던 까닭이다·
“수확제에 문제가 있소?”
“문제라면 문제지요· 위빈의 수확제는 아직 포트먼이 주관합니다· 마지막 날 밤엔 포트먼의 주인이 연설을 해야하구요·”
“그런 기억이 있긴 하구려·”
“작년엔 전 가주께서 타계하시어 그 역할을 제가 대신 했습니다· 한데 올해는····”
엘릭은 그제야 티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 연설을 부탁하고 싶은 것이오?”
“···예·”
티리아의 손은 완전히 멎어있었다·
엘릭은 잠시 고민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시점에 가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맞나· 그 역할을 그녀에게 맡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암만 생각해봐도 생각이 그쪽으로 기운다·
하나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 또한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으음····”
절충안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엘릭은 이내 하나의 방도를 떠올렸다·
“이런 건 어떻소?”
“예?”
“내 사실 연설 같은 일엔 자신이 없소· 하나 포트먼의 사람 되어 자리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도 이상하리란 건 아오· 그러니 당신께서 연설을 하고 내가 옆에 서있는 것이오·”
꽤 괜찮은 방도 아닌가·
포트먼의 실권자가 티리아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고 그녀의 부탁을 어느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하나 걱정이라면 완고해 보이는 그녀가 그런 일을 허락할까인데····
“···그리하시겠다면야 일단 올해는·”
다행히 허락하는 듯하다·
‘일단 올해는’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올해면 충분했다·
“그럼 그리 하도록 하지· 수확제와 관련하여 따로 필요한 일이 있다면 알디오에게 일러주시오· 나보단 아는 게 많을 테니·”
“예·”
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뭔가 다르다· 이상하다·
티리아는 그런 생각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첫 재회 때 그리 싫은 표정을 만들고 아직도 자신을 위빈이라 여기는 점이 있었으나 그것을 제외하면 엘릭의 태도가 참으로 부드러웠던 까닭이다·
달리 말해 ‘기대감’을 품게 하는 태도였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지난 10년을 사과하는 말이 그랬다·
그리 떠나서 미안하다며 자신으로 인해 떠난 것이 아니라며 진중하게 사과하던 태도에 얼마나 많이 놀랐던가·
그 순간 표정 관리를 잊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돌이켜보니 또 심장이 쿵쿵 뛴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그럼에도 욕심을 내게 된다·
혹시 정말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좀처럼 떠나가질 않는 것이다·
수확제의 일을 부탁한 것도 그런 기대감의 연장선이었다·
분명 명목은 ‘포트먼의 가주로서 자리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였으나 그 속에서 개인적인 욕심이 없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무심코 떠올리는 것은 연설 이후에 있을 행사였다·
‘···후야제·’
그날은 마을 광장에 거대한 캠프파이어가 타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춤을 춘다·
어릴 적부터 꽤 많이 봐온 축제였고 언젠가부터는 그 상대로 엘릭을 떠올리며 바라봤던 축제였다·
이제야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가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었다·
물론 다리가 불편하니 춤을 출 수는 없겠지·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자리하고 싶을 뿐이다·
생각하던 티리아는 열이 더 뜨거워지는 기분에 손으로 뺨을 지그시 눌렀다·
집무실에 홀로 앉아있어서 다행인 일이었다·
밖이었다면 이런 감정을 참느라 심력을 소모했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후으····”
그리 숨을 내쉬며 열기를 털어내던 중이었다·
똑똑―
“마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알디오의 목소리·
티리아의 얼굴이 곧장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들어오게나·”
목소리 또한 단번에 원래 톤을 되찾았다·
그녀는 남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