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 #3 수확제 (2)
가을은 위빈이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아름다운 시기였다·
동부 구석의 작은 나라 중에서도 가장 외진 영지 그나마 자랑거리라곤 평탄한 지형과 온화한 기후가 끝이라 거의 모든 영지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시골 중의 시골·
그것이 위빈이었으니 밀밭이 뿜어내는 황금 말곤 딱히 자랑거리랄 게 없는 게 아니겠나·
세상은 증기 기관과 순수 마도학이 충돌하며 격변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나 이곳에 있으면 그런 일은 아주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진다·
변화하는 시대가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할 터다·
아무래도 좋았다·
엘릭은 창밖으로 밀 수확에 한창인 밭을 바라봤다·
서늘한 날씨에도 농부들의 뺨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것이 참으로 고되게만 보인다·
그럼에도 마냥 안타깝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역시
“풍년은 풍년인가 보군·”
그들의 얼굴 위로 피어난 기쁨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예 올해 수확량이 유독 많은 편입니다· 근 10년 이내엔 두 번째 도련님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시겠지요·”
알디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엘릭의 기억속엔 이렇게 빽빽하게 밀 차오른 위빈은 없었다·
아름답다·
슬슬 노을이 지며 붉고 찬란하게 빛나는 밀밭의 풍경은 삭막하기만 한 전장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 있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에 엘릭의 표정 또한 한껏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런 중이었다·
“음?”
엘릭은 저택 입구쪽에서 티리아를 발견했다·
그녀도 엘릭을 발견한 듯 시선을 정확히 창가 쪽으로 향하더니 이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엘릭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수확제가 곧이지·’
어린 시절 이후 축제다운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은 엘버스 그레이엄을 따라 참석했던 제국의 연회였다·
그날을 떠올리니 괜히 숨이 턱턱 막혀옴에 긴장감을 느끼던 엘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위빈의 축제와 제국 귀족들의 연회를 비교하는 게 어불성설이지·’
애초에 매번 뛰어놀던 축제의 장이 아닌가·
이 축제가 언어의 칼을 휘두르는 귀족들의 전쟁터와 같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저 티리아가 연설을 잘 마치게 도와주면 그만일 터다·
“알디오·”
“예·”
“부··· 그분의 연설은 어찌 준비되고 있나?”
“직접 연설문을 쓰십니다· 가주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긴 귀족의 예법을 아는 분이니 글재주 또한 있겠지·”
“실제로 작년 연설문은 꽤 훌륭했지요· 가주님의 타계로 혼란스러웠던 와중 민심을 다스리는데 큰 역할을 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시기가 겹쳤군·”
그 연설문이라는 게 새삼 궁금해지는 기분이다·
물으면 답해줄까? 답해주긴 할 텐데 새삼 묻자니 또 머쓱하기도 하고·
‘되었다· 뭘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캐물을까·’
엘릭은 생각을 털어냈다·
“슬슬 저녁 식사나 하지· 마침 저분도 일을 마치고 오셨으니·”
“예·”
창가를 벗어나 식당으로 엘릭은 그리 티리아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내려갔다·
두 사람은 이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 아침 식사자리에서 티리아가 말했다·
“혹 오늘 저와 함께 외출이 가능하신지요·”
“켁!”
갑작스러운 말에 엘릭은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내는 교양 없는 행위를 저질렀다·
순간 아차해서 황급이 입 주변을 닦고 티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일 일입니다·”
···왜인지 황급히 변명하는 기색으로 답했다·
“영지민들이 수확제를 맞아 광장을 꾸미고 있습니다· 항상 해오던 일이니 크게 손볼 곳은 없겠지만 혹시 모를 안전 검사는 해야 하니 그 일을 함께 하면 어떨까 하여 여쭤봤습니다· 이제 이런 것도 배우셔야····”
라고 말하던 티리아의 시선이 순간 엘릭의 다리를 향했다·
“···여의치 않다면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오· 함께 가지·”
먼저 권유해온 일을 물리는 것도 우습다·
사례가 들려 추한 꼴을 보이긴 했지만 솔직히 그리 힘들 것도 없었다·
자리에 함께해 그녀가 일하는 걸 지켜보면 되는 일 아닌가·
서 있는 정도야 한쪽 다리 힘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될 것도 없지·”
그 순간 티리아의 눈썹 간격이 조금 벌어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고 엘릭이 그를 눈치챈 것은 초인적인 안력으로 그녀를 관찰한 결과였다·
흡족해하는 듯하다·
“다행입니다· 가주로서 해야 할 일 중 이 시기가 아니면 배우기 힘든 것들이 더러 있는지라·”
그런 이유였구나·
엘릭은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음 배려해주어 감사하오·”
어차피 내년부턴 다시 당신이 하겠지만··· 따위의 소리로 괜히 신통을 깨고 싶진 않아 얼버무린 말이었다·
“그럼 점심 즘 출발하지요·”
“바로 가지 않으시고?”
“···준비가 필요합니다·”
“앗·”
이런 그러고 보니 여인의 외출 준비엔 사내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던가·
엘릭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준비가 끝나는 대로 불러주시오·”
“예·”
티리아는 그리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가 조금 남아있었다·
‘식욕이 없으신가?’
그녀가 기대감에 식사도 잊고 준비하러 간 것은 엘릭으로선 모를 일이었다·
*
엘릭은 차려입는다는 개념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다·
옷의 역할은 중요한 신체 부위를 가리고 혹여 겨울날 있을 전쟁의 추위를 덜어주면 족하다 여기는 사내였고 그렇기에 패션 감각이 절망적인 수준에 이르러있는 사내였다·
참사는 예견된 것이다·
“도련님 그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음? 공적인 업무로 영지를 나선다기에 나름 차려입어봤네만·”
“제가 모르는 새 ‘차려입는다’의 개념이 바뀌었나 보군요·”
알디오의 탄식은 당연했다·
엘릭의 꼴은 그만큼이나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였다·
웬 한가을에 민소매 셔츠 그 위로 넥타이와 갈색 베스트 바지는 밑단만 나부끼듯 펄럭거렸고 구두는 누굴 죽일 기세로 뾰족하게 솟은 하얀색이었다·
대체 저런 옷을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부터가 참 의문스러운 끔찍한 몰골인데 본인만 그걸 모르고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뒷골이 다 당기는 게 아니겠나·
알디오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갈아입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음? 별로인가? 내 세상을 떠돌며 듣기론 이런 복장이 사내다움을 드러낸다 들었거늘·”
“어떤 놈이 그러덥니까?”
용병·
엘릭은 그 말을 삼켰다·
서부에서 구를 적 여인을 아주 밝히던 한 용병이 주변 병사들을 모아놓고 해준 이야기에서 따온 복장이었다·
15세의 일이지만 똑똑히 기억나는 것은 실제로 그는 꽤 잘생긴 미남이었다·
그런 사내가 허투루 복장에 관한 것을 말하진 않았을 거란 말이다·
‘물론 그 패션 감각이 목숨까지 지켜주진 못했지·’
목이 뎅겅 잘려나가 죽었던가·
엘릭이 추억에 잠겨있는 순간이었다·
“어서 갈아입으십시오· 이런 꼴을 마님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티리아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알디오는 등골이 섬찟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에 무어라 제지를 하기도 전이었다·
“아 들어오시오·”
“예·”
끼익―
문이 열렸다·
알디오는 눈을 질끈 감았고 엘릭은 싱긋 웃었다·
“오셨····”
인사말을 꺼내던 엘릭의 입이 다물렸다·
시선이 멍하니 그녀를 쫓았다·
간편함을 중시한 듯 그리 두껍지 않은 옷 그것이 찌릿한 생경함을 엘릭에게 선사해줬다·
목부터 발목 위까지 일자로 이어진 백색의 원피스와 어깨 위로 두른 곤색의 숄이 유려한 선을 그린다· 그리하며 더욱 돋보이는 것은 머리를 한데 묶어 올려 드러난 목덜미와 얇은 발목이었다·
원체 우아한 인상에 머리까지 작으니 옷과 몸의 비율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고 처진 눈꼬리와 기다란 속눈썹은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으····”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순간 엘릭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복장을 향한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엘릭은 머릿속이 차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런 옷을 입고 있지?’
마치 악몽 속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이런 복장을 입은 채로 걸을 생각을 하니 소름이 다 끼쳐오는 기분이었다·
비교 대상이 생기니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이다·
고개를 든 엘릭은 보고야 말았다·
“····”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티리아의 동공을·
그녀가 이렇게까지 진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단언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티리아의 입이 열렸다·
“혹 나가고 싶지 않으셨던····”
“아니오· 알디오를 놀려주려 잠시 입은 것이오· 금방 갈아입겠소· 늦어서 미안하오·”
거짓말이 청산유수처럼 튀어나왔다·
알디오의 얼굴이 순간 의문으로 물들었으나 이내 미소로 화했다·
“재밌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
엘릭은 눈짓으로 알디오에게 감사를 전했다·
와중 속으로는 그저 바랄 뿐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그녀가 경멸하지 않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