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 #3 수확제 (6)
티리아는 엘릭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권유였고 하루였다·
대체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그가 오늘 내도록 보인 모습이 따스하다·
내뱉는 말은 꿈속에나 존재하는 언어 같았다·
타오르는 불길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
갈색 머리칼 사이로 나른한 눈이 자신을 담고 있었다· 높은 콧대 아래 걸린 입매는 굳게 물려있었다· 붉게 일렁이는 그림자에 따라 귀밑의 상처도 함께 일렁였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담고 있자니 문득 속이 조여와 입술을 앙 다물게 된다·
묻게 된다·
왜 이렇게 여지를 주는 것인지 기대하게 만드는 것인지 욕심을 부리고 싶게 만드는 것인지·
울분과 닮은 감정에 울컥한다·
그 기색을 최대한 숨겨내며 고작 흘려내는 것은 마음에도 없는 걱정이었다·
“무리가 가지 않으실는지요· 무릎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춤은····”
그 순간
“괜찮소· 북소리에 맞춰 느리게 걷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
그가 웃었다·
티리아는 목이 메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실례가 되겠소?”
티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황급했다·
황급했어야 할 정도로 굳은 의지였다·
그의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임이 분명함에도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다행이구려·”
엘릭이 손을 내밀었다· 티리아는 그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두 손가락이 살포시 구부러지며 서로의 손이 걸렸다·
오늘 내도록 함께했던 온기가 다시금 몸속을 파고들었다·
티리아의 고개는 절로 아래를 향했고 엘릭은 지팡이를 짚었다·
딱―
걸음을 옮겼다·
엘릭이 다가왔고 티리아는 한발 물러섰다·
문득 우스운 상상을 하게 되니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반대이니 몸이 이리 움직여 균형을 맞추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둥― 둥―
북소리가 몸을 진동시킨다·
아니 심장 소리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이 북소리가 심장 소리를 다 가려줄 테니·
“이런 걸음밖에 하지 못해 미안하오·”
그의 말에 또 고개를 젓는다·
“몸이 우선이니 당연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연신 내뱉는다·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손을 맞잡은 채 함께 걸음을 옮기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것은 분명 그러했다·
한데도 멈출 수가 없다·
무심코 떠오르려는 미소를 애써 참아야만 했다·
미간이 좁아지는데 이것이 인상으로 보일까 고개를 더 아래로 향했다·
차마 춤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걸음이 이어질수록 세상 모든 것들이 멀어진다·
북소리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타오르는 장작의 소리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까지·
빈자리를 대신하겠다는 듯 지팡이 소리가 더욱 커진다·
그의 숨소리가 선명해진다· 맞잡은 손의 거친 감각이 손끝에 걸린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때려 박힌다·
“미안하오·”
“···무엇이 말입니까?”
“떠나간 일 말이오·”
“그 일은 사과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또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런 사과를 바라지 않았다·
티리아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10년을 떠나있었던 일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돌아와 이 순간을 함께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이 너무 감사했다·
보여주는 미소가 고마웠고 함께 걷는 걸음이 고마웠고 그래서 숨통이 막힌다·
이 순간이 신기루 같아 문득 겁이 났다·
손에 힘을 더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엘릭의 손가락 사이로 티리아의 손가락이 걸렸다·
옭아매는 힘이 강해졌으나 그가 털어내면 쉬이 떨어질 정도·
하나 그가 털어내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이어갈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엘릭은 손을 털어내지 않았다·
조금씩 진정됨에 숨을 길게 내뺀다·
티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는 발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묘하게 신경 쓰여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뽀뽀해!!!”
흠칫―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떨렸다·
시선도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뽀뽀하란 말이야―!”
“···바트구려·”
식당의 주인 그리고 엘릭의 오랜 친우인 그가 술에 만취한 채 비틀거리며 두 사람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깔깔 웃는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티리아는 엘릭의 눈치를 살폈다·
곤란한 듯한 얼굴에 왜인지 속이 답답해졌다·
“술버릇이 안 좋은 듯하오· 저 친구는·”
문득 바트가 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꿈같던 순간이 한순간에 현실로 끌려 나왔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재미난 장난감을 찾은 듯 끌끌 미소 짓는다·
“와아아!”
부추기듯 환호한다·
바트의 술주정이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린다·
승낙은 우스운 말이다·
귀족은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있는 법이니 영지민들 앞에서 허투른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것은 춤을 추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치였다·
애초에 저들이 저리해선 안 되는 것일 텐데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축제의 들뜬 분위기 탓이겠지·
이 모든 것은 사고일 뿐이니 그저 무시하고 돌아가면 되는 것이겠지·
그게 옳은데도
“····”
막상 거절을 띄워 올리려는 순간 망설이게 된다·
아니 무시하라는 말이 돌아올까 덜컥 겁이 난다·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거절이 무섭다·
“저는····”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실례하겠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화악!
엘릭이 티리아를 끌어당겼다·
그가 고개를 숙여 코끝이 맞닿을 거리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정지·
정말 조금만 더 앞으로 나선다면 입술이 맞닿을 듯한 아슬아슬한 간격이 두 사람이 사이에 생겨났다·
티리아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와아아아아아!!!”
“엘릭! 진짜 하는구나!!!”
“사고뭉치 엘릭이 남자가 됐어!!!”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한 사고가 바짝 얼어붙어 기능을 상실했다·
티리아는 온통 시야를 메운 엘릭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붉었다·
불길 탓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 탓인지·
“뭔가 하기 전에는 멈출 것 같지 않아서 그리했소· 다들 취한 상태 아니오?”
그의 숨이 얼굴 위로 닿는 것에 티리아는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아 입을 맞추는 척을 하는 거구나·
이런 각도라면 확실히 저들에겐 보이지 않겠지·
그걸 아는데 그의 말을 이해하겠는데도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머리는 또 새하얘지려 하고 있었다·
“이해해주시오·”
다만 그의 숨결이 미소가 오감에 새겨졌다·
“···오늘은 축제니까·”
마침 적당한 변명거리에 티리아는 하나씩 의문을 지우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귀족으로서 보여야 할 품위가 지워진다·
두 번째로 저들의 불충한 행동이 지워진다·
세 번째로 이 모든 것이 연기라는 사실이 지워진다·
오로지 하나만 남긴다·
코끝이 스칠 거리에 그가 숨결을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만을·
“···예·”
그것이면 족할 터였다·
오늘은 축제니까·
*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 미친 놈·”
엘릭은 침대에 누워 얼굴을 감쌌다·
드러난 그의 귓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이제야 정신이 든 것이다·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한 걸까·
꼭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온종일 신경이 티리아에게만 몰려 어떤 이성적인 사고도 되지 않았다·
변명을 해보자면 그랬지만··· 실례되는 행위임은 자명했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귀족인 그녀가 아닌가·
축제를 돌아다니는 일은 거부감이 있었을 것이다·
손을 잡는 건··· 그래 그렇다 쳐도 춤을 신청한 건 정말 선을 넘은 짓이었다·
조금 비약하자면 아녀자를 희롱한 일이다·
그것도 심한 일인데!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오늘은 축제니까·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녀를 끌어당겨 입맞춤을 할 뻔한 것이다·
연기라는 것조차 급조한 변명임을 그녀가 알까·
분위기에 이끌려 정말 입술을 맞추려다 그 순간 머리가 차게 식어 직전에 멈춘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평생 얼굴을 못 볼 수준이 되었으리란 말이다·
‘바트···!’
이게 다 그놈 때문이었다·
그놈이 술주정만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치를 떨며 지난 일을 후회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홀린 듯 멍했던 축제는 지나갔고 이제 드리워진 것은 현실이었으니·
“도련님 기침하셨는지요·”
알디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릭은 답했다·
“···조금 더 누워있어도 되겠나?”
티리아를 볼 자신이 없었다·
오늘 아침 식사 정도는 따로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늦장부리시면 안 됩니다· 이제 어른이시니까요·”
한데 야속한 집사는 봐줄 생각이 없는 것인지 단호하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엘릭으로선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심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세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식당으로 내려가는 그 길이 얼마나 길게만 느껴지던지·
끼익―!
식당 문이 열린 순간 엘릭은 짧은 순간 숨을 참아야만 했다·
“···기침하셨는지요·”
티리아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겉보기엔 분명 그랬다·
그런 점이 더욱이 부끄러움을 가중시켰다·
전날의 일이 새삼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비단 사건뿐만 아니라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이목구비 촉감 체향 숨소리 따위가 모두 몸 위를 뒤덮는 것이다·
“그으····”
엘릭의 시선이 괜히 창밖을 향했다·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좋은 아침이오·”
이제 겨울이 왔건만 몸은 저 혼자 여름 한가운데 서서 더위를 호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