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 #4 손님 (1)
수확제로부터 일주일 어느덧 떨어지기 시작한 기온이 슬슬 오한을 일으킬 수준이 되었다·
성큼 다가온 겨울이 어느새 세상을 희뿌옇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서리가 창밖의 풍경이 흐릿하게 만들었고 옷차림은 더 두꺼워졌다·
집무실 한구석엔 벽난로가 타닥타닥 장작을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한 계절의 변화가 확 도드라질 정도가 되었음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알겠소·”
티리아와의 거리였다·
수확제의 사고가 있던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엔 줄곧 형용하기 어려운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왜인지 눈을 마주하기가 어렵고 긴 대화를 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
어쩌다 손끝이 스칠 때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그 부위가 뜨겁다·
그날의 낯 뜨거운 감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오늘 역시 그런 어색함에 떨며 업무를 함께하는 와중이었다·
엘릭은 본디 이런 어색함을 즐기지 않아 타계할 방법을 찾고 있었고 마침 그것이 드리워진 참이었다·
티리아가 신문을 받아 읽고 있었다·
그냥 신문이 아니라 서부 전장의 소식을 담은 월간지였다·
“서부의 신문이구려·”
엘릭의 목소리엔 작은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저 대화를 틀 변명거리 외에도 서부의 소식은 엘릭의 호기심을 끌어당기기 충분한 종류였다·
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서부 전장은 큰 거래처이니·”
“하긴 그곳만큼 식량 보급이 필요한 장소도 없긴 하오·”
전쟁에는 아주 많은 식량이 필요하다· 다 큰 성인 남성들을 수천수만 단위로 불러 모아 그 끼니를 책임져야 하니 오죽하겠는가·
자체적인 식량 생산량으로는 할당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게 보급이니 서부 전장은 외부의 식량을 유통해오는 일이 잦았다·
한창 전쟁 용병으로 살던 시절 엘릭도 보급 행렬에 호위로 들어간 일이 있기에 아는 것이었다·
옛날 일이 생각나 향수에 빠져있는 중 문득 티리아가 물었다·
“···서부에 가본 일이 있으십니까?”
엘릭은 흠칫 놀랐다·
절로 튀어나오는 것은 변명의 말이었다·
“하하··· 10년이지 않소? 대륙 어디든 가보지 못했겠소·”
전쟁 용병이었다는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리 얼버무렸다·
다행히 티리아는 크게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그녀는 재차 신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엘릭은 그녀가 읽고 있던 신문의 1면을 확인했다·
『검귀 카샤의 실종 1개월 차 체보르 왕국 함락되다·』
엘릭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맺혔다·
‘결국 저리되었군·’
20여년 간 이어져 온 서부 전쟁의 참전국 중 가장 세가 약했던 것이 체보르였으니 놀랍지도 않은 결과였다·
하나 신경 쓰이는 건 그들의 멸망에 엘릭이 아주 연관이 없진 않다는 것 정도· 그를 가장 자주 찾았던 국가가 체보르인 까닭이다·
부상을 입고 은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참전한 것도 체보르의 수도 방어전이었으니 오죽하겠나·
체보르는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대륙 7강을 배출하지 못한 나라다·
결국 부족한 무력을 외부인사로 채우는 수밖에 없었고 그 핵심 전력이었던 엘릭이 부상으로 빠졌으니 몰락에 이른 것일 터였다·
물론 그에 엘릭이 새삼 안타까움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저들과 자신은 어디까지나 거래로 묶인 타인이었으므로·
“체보르가 함락됐군요·”
티리아가 말했다·
“20년 만에 하나가 몰락했으니 앞으로 전쟁이 얼마나 더 길어질지 모르겠습니다·”
화두를 던지는 건가?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반대일 수도 있소·”
“어째서입니까?”
“균형이 무너진 것 아니오· 무릇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탑은 무너지는 속도도 빠른 법 아니겠소?”
“····”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는 티리아의 기색에 엘릭은 쿡쿡 웃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이 옳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몰락하는 왕국은 5년 전에 이미 나왔어야 했소· 한데도 이제까지 균형이 유지된 이유가 뭔지 아시오?”
“무엇입니까?”
“검귀 카샤가 있었기 때문이오·”
본인 입에 금칠하는 상황이라 꽤 수치심이 있었으나 그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전쟁에 참전한 국가 중 약소국에 해당한 이들이 망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검귀 카샤의 존재 때문이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7강 몸값이 제아무리 비싸다 한들 목숨보다 그 값이 비싸겠는가?
엘릭이 기억하기로 7강을 배출하지 못했던 4개의 국가는 서로 경쟁하듯 가격을 올려 자신을 고용했었다·
‘실제로 그 값어치를 하기도 했고·’
국가를 멸망 위기에서 구한 횟수만 열 손가락으론 모자랄 정도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졌으니 저들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전장을 이탈한 이 상황 적어도 7강을 배출하지 못한 3개의 왕국은 더 멸망할 것이라고·
“···가주의 말이 맞다면 다음 전쟁에서도 국가 하나가 멸망하겠군요·”
티리아가 신문의 다음 면을 들이밀었다·
크게 쓰인 제목은 그러했다·
『빌디온의 염화 이그렛 출전 의사 표명·』
엘릭은 곧장 답했다·
“그녀가 출전한다면 사흘이 안 걸리겠지·”
염화 이그렛은 7강에 오른 전투마법사였다·
엘릭으로서도 전장에서 마주한 것은 두 번이 끝일 정도로 전쟁 참여에 큰 뜻을 두지 않은 여인이긴 하나 그녀가 나서기만 한다면 같은 7강이라도 등장하지 않는 이상 진군이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엘릭이 아는 중 가장 끔찍한 공성병기였니 말이다·
“으음····”
티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음? 왜 그러시오?”
“서부에서 올해 수확한 밀을 대량으로 사들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저 전쟁이 격해지는 이유로 생각했는데 이리되면 방침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아낼 국가를 잘 골라야 할 겁니다·”
단숨에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간 건가·
엘릭은 작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이런 말이 실례가 될지 모르나 그녀는 꼭 부친을 연상케 하는 계산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외부의 정보에서 본인에게 필요한 점만 콕콕 집어내는 사고가 특히 그러했다·
“여하튼 관련해 준비가 필요하겠군요·”
“도울 일이 있소?”
티리아의 시선이 엘릭을 바로 향했다·
엘릭은 그 순간 또 미묘한 어색함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직전까지 잘 대화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눈이 마주치니 왜인지 속이 뜨거워졌다·
그런 중 티리아가 말했다·
“혹 손님을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으 음?”
갑작스레 손님이라니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서부에서 사람이 옵니다·”
엘릭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
티리아의 말을 요약하자면 그랬다·
-본래는 밀을 구매하기 위해 위빈까지 찾아오는 담당관이 없었습니다· 거래는 어디까지나 상단을 통해서만 했으니까요· 한데 올해는 담당관들이 직접 위빈에 방문에 거래를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더군요·
서부 전장의 보급관들이 찾아온단다·
그것도 세 군데에서나·
“끄응····”
대형 사고였다·
혹시나 그들 중 엘릭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다면 단번에 정체가 들통나지 않겠나·
그들이 전장에 소식을 가져간다면 이 평화로운 위빈이 군대의 인사들로 혼란해질 수 있었다·
전쟁 용병으로 설치고 다니던 시기를 생각하면 그는 거의 확정된 결과에 가까웠다·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자리를 비워야 하나?’
부자연스럽다· 딱히 할 일도 없는 주제에 보급관들이 오는 날에 맞춰 자리를 비우는 것은 자칫 의심의 씨앗을 심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변장···?’
은 무슨 그건 더 수상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엘릭은 이내 한 가지 방도를 떠올렸다·
‘차라리····’
미리 보급관을 찾아가 알아보는 이를 입막음하는 건 어떨까·
자신이 없진 않았다·
전쟁터를 지내며 비슷한 일을 여러 번 해본 기억이 있기에·
‘찾아오는 이들은 각각 제국 아르민 디샤·’
다행히 접점이 그리 많지 않은 강국들이다·
혹시 모를 상황만 조심하면 조용히 이번 일을 넘어갈 수 있었다·
엘릭은 곧장 방을 나섰다·
“알디오·”
“예?”
“혹 서부에서 오기로 한 손님들의 도착 일정을 알 수 있나?”
“예 미리 고지받은 게 있긴 합니다만····”
“좋네· 내 방으로 올려다 주게·”
명령을 끝낸 엘릭이 이번에 찾은 곳은 다시 티리아가 있는 집무실이었다·
“두고 가신 물건이라도?”
라고 티리아가 말함에 엘릭은 답했다·
“손님맞이 내가 홀로 다녀오겠소·”
“···홀로 말입니까?”
“그렇소· 홀로·”
“안 됩니다·”
단칼에 거절당했다·
엘릭의 눈이 부릅 뜨였다·
“어째서···?”
“먼 곳에서 오신 분들께 어찌 환영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사람 열은 쓸 생각입니다·”
정론이었다·
하나 엘릭에겐 최악의 소식이었다·
다급함이 인다·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턱―!
엘릭은 저도 모르게 티리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으나 엘릭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부탁하오· 내 꼭 그리해야 할 이유가 있소·”
물론 이유는 말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짧은 대치 상태 와중 엘릭은 티리아의 눈동자에 당황이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직감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정 그러시다면·”
결국 그녀가 승낙해주었다는 사실만이 이 상황에 유의미했다·
“고맙소!”
엘릭은 감사를 표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장검을 꺼내 들었다·
‘해보자·’
만약을 위해서다·
혹시 정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날 알아본다면····’
그땐 검귀 카샤로 돌아가야겠지·
스릉―
엘릭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