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 #4 손님 (2)
엘릭은 역으로 나왔다·
기차의 도착까지 한 시간이 남은 상황·
차마 검까지 들고 올 수는 없었기에 그는 지팡이 하나만 든 채로 긴장되는 속을 다스리고 있었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오늘 오는 손님들은 서부의 인물들이라곤 하나 결국 전장에서나 활동하는 장교들이다·
그리고 보급관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다·
‘나에 대해선 모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저 희망적인 관측은 아니었다·
서부에서 카샤로 활동할 적 엘릭의 주 무대는 전장의 최전선이었다·
그곳에서 칼을 휘두르는 일이 아니면 대외적으로 나서는 일이 없었고 그런 만큼 이름을 제외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취재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누군가 몰래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사진기를 통째로 부숴버릴 정도로 신변 보호에 철저했으니 엘릭의 얼굴을 아는 것은 직접 대면했던 몇몇 의뢰주 외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 외에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딱 한 번 친우 엘버스 그레이엄을 따라 참석했던 제국의 연회 정도를 들 수 있을까·
생각하던 엘릭은 이내 가능성을 지웠다·
‘그쪽은 말도 안 되지·’
엘버스 그레이엄이 초대했던 그 연회는 제국 유력가의 자제들이나 참석하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모임이었다·
참석인이라고 해봐야 제국의 고위 귀족 자제가 끝인 그런 모임 말이다·
한데 그들이 군의 보급관으로 있을 리가 있겠는가· 있다 한들 이런 시골까지 와서 직접 거래하려 들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밖에 할 수 없단 말이다·
‘의뢰주들만 피하면 된다· 의뢰주들만!’
엘릭은 간절히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열차가 증기를 뿜으며 속력을 줄였다·
치익치익 날 선 소음과 함께 진동이 일며 창밖의 풍경이 점점 또렷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도착이군·’
마히르 제국 3군단의 보급관 폴로는 낮게 혀를 차며 턱을 괴었다· 그에 두툼한 뱃살이 접히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자세나 찌푸려진 표정은 그의 심기가 아주 불편한 상태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한미한 시골까지 밀이나 사겠다고 나온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우스웠던 까닭이다·
제국 백작가의 삼남·
일 년만 있으면 고위 장교로 승진하는 예비 간부진·
그런 수식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 꼴이다·
그런 상황이니 결국 나오는 건 한숨이었다·
‘썩을 왕국 놈들·’
전쟁이 드디어 가시적인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체보르의 멸망으로 이제 전쟁은 지긋지긋한 소모전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서로가 뺏고 뺏기는 약탈전이다· 그만큼 격해지는 전쟁 상황에 맞게 식량 보급은 더 많이 필요해질 것 아닌가·
대륙의 모든 물자를 사들여야 하는 상황이고 와중 현 시점에 강세를 유지하는 두 왕국인 아르민과 디샤가 제국과 물자 경합에 들어섰다·
그들에게 한 톨이라도 더 뺏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한 톨이라도 더 빼앗아 오기 위해 귀족인 그가 직접 이런 거래까지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뿌우우우우―!
고동 소리와 함께 열차가 멈췄다·
폴로는 좌석에서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정거장으로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귀에 거슬리는 껄렁한 목소리에 폴로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모르고만 싶건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콧대 높은 아르민이 예까지 오셨군·”
“제국이 할 말은 아닌 듯하오?”
삐죽 솟은 눈에 매부리코 거기다 허수아비처럼 마른 체격·
아르민의 보급관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곰 같은 덩치의 험악한 인상을 한 사내가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디샤의 보급관이었다·
세 사람은 정가장 한가운데서 마주치는 상황에 기시감을 느꼈다·
아무렴 이곳 동부 끝의 위빈까지 오며 매 정거장에서 이런 양상이 벌어졌으니 이젠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폴로는 결연함을 띄워 올렸다·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이제까지 곡물 경매의 전적은 제국이 4할 폴로로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위빈의 곡물을 제국에서 전량 매수한다면 총 팔매의 6할까지 수치를 올릴 수 있었다·
제국으로서의 자존심으로나 군인으로서의 실적으로나 위빈에서의 거래는 폴로에게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러다 정들겠구려· 나중에 전장에서 만나면 잘 봐주시오?”
“벌써부터 패배를 상정하는군? 아르민의 군기도 알 만해·”
“군기까지야 좋은 승부나 하자는 취지에서 한 말인데··· 제국은 참 딱딱하구려·”
“흥! 염화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몰락했을 것들이!”
“두 분 다 그만하시지·”
중재에 나선 것은 디샤의 보급관이었다·
그의 건장한 체구는 두 사람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폴로는 이를 악 물었다·
‘언제까지 그리 여유로울 수 있는지 보자고·’
일정의 마지막이 바로 이 위빈인 만큼 앞선 여러 거래보다 조사할 시간이 많았다·
폴로는 이미 제국이 자랑하는 정보조직에서 알아낸 이곳 가문의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영지의 이름은 위빈이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포트먼· 거래도 포트먼과 하게 되겠지·’
포트먼은 귀족의 지위에 오른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신흥 가문이다· 게다가 그런 입지적인 일을 해낸 가주는 타계한 지 1년이 되었으니 아직 내부적인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포트먼엔 그런 혼란을 가증시키는 요소가 덧붙어있었다·
‘10년 전 가출한 포트먼의 후계자가 돌아왔다고 했지·’
사실상 정황만 봤을 땐 철없는 도련님이 귀족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 뒤늦게 돌아와 권력을 주장하고 있다 보는 게 옳았다·
그에 지난 10년간 포트먼으로 살았던 안주인이 반발하고 있을 건 뻔한 일이다·
가문의 주인이 누구인가·
귀족가에선 흔히 있는 싸움이고 이런 경우라면 폴로가 노려볼 만한 점이 하나 있었다·
‘도련님 쪽에 힘을 실어 주는 거다· 가문의 주인이라는 자리를 미끼로 밀의 전량 거래를 추진하는 게지·’
폴로는 자신이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것은 제국이고 제국의 이름은 이런 동부의 한미한 남작가에선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게 뻔하지 않나·
가주의 아들이 돌아온 건 이제 막 1달 정도가 지난 일·
아르민과 디샤에 제국만큼의 정보력이 있을 리는 없었다·
위빈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이 거래를 주도할 사람이란 것이다·
폴로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여유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자 일단 움직이지· 마중 나온 이들도 있을 텐데 이리 늦장을 부려서야 되겠소?”
“흥 그래봐야 시골 남작가의 하인들이겠지·”
아르민의 말라깽이 보급관이 으스댔다·
그 말에 아주 동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역시 정보적인 우위는 폴로로 하여금 그를 내리깔아 보게 만들었다·
‘멍청한 놈 언제까지 그리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고·’
펄럭! 폴로는 코트를 휘날리며 정거장 밖을 나섰다·
그리 역의 입구로 나서니 보이는 것은 비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한적한 시골 동네· 제도에 비하면 100년은 뒤떨어질 것 같은 구시대적인 풍경이었다·
자연히 어깨가 솟는다·
이런 곳에 사는 이들이라면 분명 머리를 조아려 오리란 확신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두 보급관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거만한 얼굴이었다·
직후
“혹 서부에서 온 손님들이 맞으신지요·”
부드러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보급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있는 것은 지팡이를 짚고 있는 절름발이 사내였다·
갈색 머리 서글서글한 눈매와 오똑한 콧대가 선한 인상을 준다· 떠오른 미소엔 호의가 가득했으며 와중에도 멀끔한 옷차림은 그의 신분이 농민은 아님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 그리 호감상인 얼굴임에도 마주하는 폴로는 웃을 수 없었다·
“엘릭 포트먼이라고 합니다· 위빈의 영주 대리지요·”
직전까지 여유롭던 폴로의 안색이 급격히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손끝은 차가워졌고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엘릭··· 포트먼?’
저 사내가 그 철없는 가출 소년?
아니다· 아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말은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였다·
폴로는 저 사내가 그런 이름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어 어째서····’
다름 아닌 그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크흠 아르민의 보급관 우길이라 하오· 다른 마중은 없나 보오?”
“디샤의 보급관 템트 위빈의 영주를 뵙소·”
두 보급관이 인사를 함에도 폴로는 입을 열 수 없었다·
학습된 공포가 그의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고 있었기에·
‘제발···!’
제발 알아보지 말아라·
제발 자신에 관한 것을 모두 잊었어라·
그의 간절함은 그가 품은 생을 향한 갈망만큼이나 짙었다·
그 갈망을 따르려면 이 자리에서 뒤돌아 도망가는 게 더 합리적인 판단일 정도로 두려움은 이루 말할 데가 없는 수준으로 치솟고 있었다·
하나 돌아갈 길은 없다·
열차는 이미 떠난 상황이었다·
그렇게 직후
“저분은····”
포트먼의 도련님·
···아니 검귀 카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소개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폴로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